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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자의 비극 ㅣ 지만지 희곡선집
토머스 미들턴 지음, 오수진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12월
평점 :
이 희곡은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복수와 관련하여 죽음을 맞게 되는 ‘복수극’이다. 작품해설에는 복수극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성서의 내용과 세네카 복수극의 중요 요소인 무모한 권력 추구와 현명하지 못한 군주, 그로 인한 국가의 파국에 대한 우려와 복수에 관한 주제는 여러 영국 극작가들에 의해 계승되어 엘리자베스 시대 복수 비극에 잘 나타난다. (P.226)
복수를 감행하는 인물은 빈디체와 히폴리토 형제이며, 특히 빈디체가 핵심적 역할을 맡는다. 복수의 대상은 공국의 지배자인 늙은 공작과 그 가족이다. 이 작품에서는 특히 지배층의 부정의와 부도덕이 두드러지는데, 권력을 무기로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이에 대한 죄의식을 갖지 않는 그들의 언행을 통해 독자는 복수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된다.
공작의 막내아들 주니어는 고결한 귀족 부인을 겁탈하여 자살하게 만드는데,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면 다시 저지르겠다고 법정에서 뻔뻔하게 말한다. 공작부인은 아들의 죄는 외면한 채 그를 방면하지 않는 공작에 대한 원망을 토로하고 자신의 불륜 정당성을 옹호한다. 그녀에게 있어 법은 권력층에 적용되지 않는 장치다.
(공작부인) 공작이 한마디만 해 줬어도 내 귀염둥이 막내아들이 사형이나 투옥을 면했을 텐데. 가시투성이 법을 대담한 발로 짓밟았을 거라고. 법의 가시가 그 애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잖아. 하지만 공작은 말하지 않았어. 그러니 나도 결혼의 맹세 따위는 잊어버리겠어. [제1막 제2장]
공작과 그의 적장자인 루수리오소 역시 권력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수많은 처녀를 유혹하고 응하지 않는 자는 독살해 버리는 공작의 무자비한 정욕과 냉혹함은 빈디체의 복수를 유발하는 직접적 계기가 된다. 루수리오소 또한 빈디체의 여동생을 유혹하고자 한다. 공작의 서자인 스푸리오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으로 계모인 공작부인과 정을 통한다. 이복동생인 앰비티오소와 수퍼바쿠오는 루수리오소를 제거하고 후계자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한마디로 공작 가족은 비윤리의 총체적 난맥상을 통해 몰락의 불가피함을 극 중에서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빈디체와 히폴리타의 복수는 치밀한 계략과 우연의 덕택으로 대성공을 거둔다. 그럼에도 독자는 그들의 성공을 무턱대고 기뻐하기 어렵다. 특히 빈디체가 변장을 한 채 어머니 그라티아나와 여동생 카스티자를 시험해보는 장면은 여동생의 굳은 정절을 돋보이게 하는 반면 어머니의 연약한 마음을 비참할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놓는 결과를 낳았다. 그라티아나 뿐만 아니라 현대의 그 어떤 여성도 변장한 빈디체의 탁월한 논리와 언변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 이 장면을 통해서 독자는 당대 사회에서 순결을 부와 지위로 교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그것이 매우 설득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된다.
더불어 작품해설의 지적과 같이 빈디체의 남성중심적 사고와 마키아벨리언적 냉혹성의 두드러짐이 나중에 빈디체의 죽음에 별다른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 연유이기도 하다. 작품해설은 새로운 통치자가 된 안토니오 경에게도 비판적 전망을 하고 있는데 굳이 그렇게 볼 까닭은 없다고 본다. 그로서는 늙은 공작 살해와 자신의 관련 없음을 밝히고 군주를 시해한 인물을 처벌해야 할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빈디체는 어쨌든 반역행위를 저지른 셈이고, 안토니오 경은 빈디체와 같은 체제 전복자가 아니다. 따라서 그는 빈디체를 신속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의도치 않은 토사구팽이 되고 만 것이지만. 빈디체 또한 현실을 재빨리 깨닫고 담담히 받아들인다.
(안토니오) 노 공작의 살인은 정말 교묘하게 은폐되었군! 저 비극적인 시체들을 들어 올려라. 지금은 무거운 시간이다. 신의 가호로 저들의 피가 모든 반역을 씻어 내길! [제5막 제3장]
이 작품은 부도덕과 패륜과 기만과 살인의 잔혹한 장면으로 가득하지만 정작 처절한 비극성은 별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등장인물, 특히 공작 가족들과 변장한 빈디체의 대사와 행동이 해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 사건의 세세한 묘사보다는 진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 등에 힘입는다. 인물들의 방백이 매우 많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무대 위에서 주요 장면이 전개되는데 한쪽에서 참견, 비판, 조롱하는 따위의 방백은 자연스레 긴장감과 집중도를 분산시키는 효과가 크다. 일부에서 이 작품을 전형적인 복수극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유도 나름 타당성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