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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매춘부
존 마스턴 지음, 최경희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9월
평점 :
17세기를 전후한 영국 사회는 매춘이 매우 성행한 듯하다.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러 희곡 작품에서 매춘, 여성의 정조 등을 제재로 한 사례가 제법 많다. 게다가 이 작품은 아예 대놓고 표제에 드러내고 있을 정도다. 영국의 봉건사회도 남성의 일탈을 비교적 용인하는 반면 여성에게는 엄격한 순결을 요구한다. 사회적 금기를 어기는 경우 사회적 몰락은 물론 심할 경우 목숨까지 내놓아야 한다. 결혼할 여성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는 대신 남성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필요악적 존재가 바로 창녀, 즉 매춘부이다.
존 마스턴은 베아트리스와 프란세스치나를 통해 상반된 여성상의 양극단을 대변하게 한다. 베아트리스는 말뢰르의 약혼녀로서 전통적 여성상에 딱 부합한다. 남편에 대한 애정과 헌신, 겸손과 순결, 그리고 미모마저 갖춘 완벽한 아내감이다. 프란세스치나는 화려한 외모와 교태로운 애교를 갖춘 뛰어난 매춘부다. 대가를 지급한다면 그녀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육체와 교태를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말뢰르는 욕정을 가볍게 여기며 매춘부와의 즐거움을 일상으로 여기다가 정숙한 베아트리스와 결혼을 앞두고 프란세스치나와 관계를 끊는다. 친구 프리빌은 말뢰르의 부정한 행동을 비판하며 조언을 하다가 프란세스치나를 본 후로부터 오히려 자신이 매춘부를 사랑하게 된다. 여기에 말뢰르의 배신(?)에 분노한 네덜란드 매춘부가 복수를 획책하며 파란만장한 사건이 전개된다. 그녀의 분노는 극도로 폭발적이어서 과연 말뢰르가 떠나간 사실에 그녀가 그토록 분개하고 복수를 다짐하는 연유가 궁금할 정도다.
말뢰르의 처신이 훌륭하지는 않지만 당대 도덕관으로서는 별다른 흠결이 되지 않음은 이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베아트리스를 통해 알 수 있다. 오히려 프란세스치나의 분노가 언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매춘부의 삶이란 많은 남성을 상대하지만 한 남성도 마음을 주고 정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와 말뢰르가 진실한 사랑을 교환하고 맹세하였을까? 말뢰르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그녀가 믿는 것인지 의아하여 솔직히 복수의 동기를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에게 돈을 펑펑 쓰던 물주가 사라지면 아쉽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베아트리스에 비하면 동생 크리스피넬라는 현대적인 여성상에 가깝다. 자기주장이 보다 명확하고 감정표현에 솔직하며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거부한다. 그녀가 타이스퓨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전제는 그가 많은 것을 그녀에게 양보하여 비교적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약속에서다. 물론 그것이 오늘날 관점으로는 미흡하다 하겠지만 크리스피넬라는 사회적 제약 내에서 자신이 쟁취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작품도 당대의 관습처럼 서브플롯을 지니고 있다. 코클드모이와 멀리그럽 부부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해학적이며 우스꽝스럽게 전개되는 와중에 코클드모이는 분명 악당임에도 불구하고 막판에는 갑자기 깨달음을 주는 대인배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코클드모이는 문제적 인간이다. 그는 야바위꾼, 이발사의 조수, 봇짐장수, 금세공인의 하인, 야경꾼, 법원 소환리로 변신을 거듭하여 멀리그럽을 괴롭히고 조롱하며 때로는 은근슬쩍 부인을 유혹한다. 그의 변화무쌍을 통해 외견상 충실한 상인인 멀리그럽 부부가 속임수와 부정으로 치부하는 실상이 독자에게 파헤쳐진다. 미워할 수 없는 악당, 코클드모이.
작가가 남녀 불평등에 대한 문제적 인식을 가지고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집필하였을 거라고 판단되지 않는다. 이 작품 어디에서도 당대의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의 비판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숙한 아내와 (타락한) 매춘부의 구별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내재해 있다. 따라서 작품해설에서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지나친 의미 부여(가부장제 사회의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의 횡포와 모순)와 과도한 해석(예컨대 사랑을 빼앗긴 매춘부의 정당한 분노)을 부여하고 있는 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