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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가닥 여자
토머스 미들턴.토머스 데커 지음, 조광순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평점 :
원제는 <The Roaring Girl>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소매치기 몰’로 알려진 실존 인물을 극화하였다고 하는데, 어쨌든 ‘roaring’은 부정적 의미를 가지므로 ‘왈가닥’은 오히려 순화된 표현이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진 점은 인간의 이중성 내지 양면성에 대한 고찰이다. 고상한 귀족의 내면에 자리 잡은 속물근성과 세간에서 비난받는 몰의 더없이 고상하고 도덕적 품격이 대조적 본보기를 제시한다. 알렉산더 경이 아들 서배스천과 메리의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는 단 하나, 신부의 지참금이 기대 수준에 비해 적다는 것뿐이다. 신부의 아름다운 덕성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오직 금전으로만 평가할 뿐이다.
작가는 몰을 영웅처럼 묘사한다. 남장 복장의, 소매치기 창녀이자 쓰레기 같은 사회의 암적 인물로 취급받는 몰. 단번에 랙스턴을 제압할 만한 빼어난 칼솜씨도 지녔고 알렉산더 경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는 고매한 덕성을 지닌 그녀가 현대 여성에 못지않은 독립적 가치관을 표명하는 대목은 신선한 충격이다. 자신을 창녀처럼 취급하는 랙스턴에 분연히 대응하는 제3막 제1장이 인상적이다.
(몰)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고 남성적이지만 여성적이에요. 결혼은 죽음이고 변화예요. 왜냐하면 처녀가 처녀성을 잃고 대신 남편을 얻기 때문이죠. (제2막 제2장, P.76)
(몰) 너에게 도전함으로써 모든 남자에게 도전할 거야! 남자들이 품고 있는 최악의 증오와, 이들이 행하는 최고의 아첨과, 무지한 자들의 불쌍한 영혼을 옭아매는 이들의 금빛 마술에 대해서 말이야. (제3막 제1장, P.94)
(몰) 내가 필요하면 남자를 사지만 남자에게 내 몸을 파는 것은 경멸해, 자, 내 공격을 받아. (제3막 제1장, P.96)
(몰) 자신의 몸에 무릎을 꿇는 여자는 아내를 무서워하는 남편처럼 천박한 거야.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정신은 내 몸의 여주인이야. (제3막 제1장, P.97)
제5막 제1장에서 몰과 뚜껑문, 떠버리 간의 뒷골목 은어 대화는 놀런드 남작을 포함한 귀족들의 귀에는 무척이나 흥미롭게 들릴 뿐만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작품해설은 이 대목에 단순한 희극적 요소 외에 심오한 의미를 덧붙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과도하다.
인간의 이중성 내지 양면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갤러폿 부인과 망사바느질 씨 부인 등이 등장하는 부수적 플롯을 배치한다. 정숙한 부인의 가슴에 잠재한 내밀한 욕정의 숨결과 유혹. 이를 감지하고 이용하려는 랙스턴과 참매의 행동. 여기에 갤러폿의 순수함과 망사바느질 씨의 현명함이 어우러져 상황을 해피엔딩으로 끌고 간다.
무엇보다 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외설적이며 해학적 요소들의 은밀함이 독자와 관객의 흥미를 배가한다. 예나 지금이나 성적인 요소는 대중성에서 중요하다.
(랙스턴) 잘생긴 손이 담뱃대를 쥐고 있어. 누군가 내 담뱃대를 항상 쥐고 있으면 좋겠어. (제2막 제1장, P.48)
(랙스턴) ......용감한 대장이 진격과 후퇴를 충분히 빠르게만 한다면 그녀로부터 남자아이만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마일엔드에 있는 군사 훈련소에 가서 모집을 하지 않아도 돼. (제2막 제1장, P.57)
(갤러폿 부인) 30파운드가 맞아, 0 앞에 3이 있으니까. 3은 그의 스리 피스 옷이야. (제3막 제2장, P.106)
인간이기에 약점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의 이중성 내지 양면성 또한 존재 자체에 깃들인 불가피한 본성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작품에서 갤러폿과 망사바느질 씨가 자기 부인들과 랙스턴, 참매를 흔쾌히 용서하는 장면이 이해 가능하다. 어이없을 정도로 너무나 쉬운 용서는 작가의 안이함이 아닌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몰과 메리라는 이름이 서로 맞바꾸어서 사용되었는데 메리는 여성의 성모와 같은 순결함을, 몰은 여성의 창녀적 천박함을 의미한다. (P.238)
작품해설에 따르면 당대에는 몰과 메리를 혼용했다고 한다. 서배스천이 제1막 제1장에서 메리를 몰이라고 부르는 대목이 비로소 이해된다. 영어사전에 따르면 몰은 메리의 애칭이기도 하며, 한편으로 매춘부, 정부(情婦)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니 확실히 양면적이다. 그렇게 보니 다니엘 디포의 소설 주인공도 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토머스 미들턴은 그다지 잘 알려진 희곡 작가는 아니다.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인물인데 ‘또 다른 셰익스피어’로 불릴 정도로 높이 평가받는다고 하니 그의 작품들을 읽어봄 직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