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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Z ㅣ 밀리언셀러 클럽 84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평점 :
5백 면을 넘는 두툼한 책이다. 비교적 근래의 좀비 소설로 영화 <월드워 Z>의 원작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Z는 좀비를 의미하며, 표제는 좀비 세계대전을 지칭한다. 좀비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하여 모든 국가가 좀비와 명운을 건 사투를 벌이게 되는 상황을 제재로 삼고 있다. 말미에 러시아와 중국의 장래에 대해서는 다소간 이념적 편향도 개입하고 있으므로 이 점만 염두에 둔다면 비교적 흥미로운 독서가 가능하다.
무대가 세계 전역이니만큼 일반적 소설 서사구조로는 표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작가는 인터뷰 형식을 택하였다. 세계대전이 거의 종료된 이후 각국의 주요 정부 관계자와 일선 군인 등을 찾아가서 그들이 맞닥뜨린 상황에 대한 인식과 헤쳐나가기 위한 노력 등을 가감 없이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이를 통해 좀비 전쟁은 단순한 허구의 차원을 넘어 실증적 의의를 지니는 존재로 격상되고 우연한 발발이 아닌 필연적 원인에 기인한 것임을 독자들이 납득하게끔 한다. 따라서 그 흡인력은 만만치 않다.
작중에서 최초의 환자는 중국에서 발생한다. 현실 세계의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원지도 중국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혹은 필연의 반복일까. 수년 전 유행했던 사스 또한 중국에서 나왔다. 중세 유럽을 황폐화한 흑사병도 중국발이다. 이른바 땅덩어리가 넓고 기후도 다양하며 인구도 많은 곳이다 보니 병원균의 변종 가능성이 큰 듯하다.
대개 그러하듯 좀비 바이러스의 발병 원인은 불명확하다. 어쨌든 환자가 생겼고 점차 전파 속도가 빨라져 마침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치닫는다. 작가는 여기에 장기 매매를 결부시켜 동떨어진 이역만리로 퍼져나가는 자연스러운 전개 수순을 밟는다. 세상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발병 사태를 은폐하려는 정부, 사람들의 심리적 공황을 이용하여 위약으로 한몫 챙기는 사람들.
이스라엘은 신속한 정보 획득으로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건설한다. 이란과 파키스탄은 핵전쟁을 불사한다. 용커스 전투에서 멋들어진 좀비 섬멸전을 시연하려던 미국은 오히려 국토의 절반 이상을 상실하고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쪼그라들었다. 좀비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오직 생존자의 신선한 피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몰려들 뿐이다.
남극기지에서 시베리아 동토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제3세계까지 넘나들면서 지위의 고하, 역할의 대소와 관계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흥미진진한 전쟁 모험담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는 처절함이 배어 있다. 감염된 동료를 쏘아야만 하는 눈물겨움이 있다. 가능성 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나머지 사람들을 죽음의 위협에 방치해야 하는 비인도적 선택이 불가피하다. 공포에 사로잡혀 스스로 유사 좀비의 길을 좇는 야만성도 낯설지 않다. 작가는 인간 군상들이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보여주는 온갖 행태의 양상을 남김없이 노출한다. 그것도 매우 적나라하게.
그나마 원작의 좀비는 아직 원시적이다. 빠르지도 않고 사고력도 없다. 숫자가 많기에 대적하는데 힘겹지만 어쨌든 서서히 퇴치가 가능하다. 영화 속 좀비였다면 인류는 일찌감치 멸종하고도 남았으리라. 어쨌든 좀비를 물리쳤으니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리라. 좀비 전쟁을 치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인명과 재화의 손실, 사회 문화적 가치관의 전도, 국가 이념의 붕괴와 변질 등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자연도 황폐화되었으니 복구는 요원하리라.
나는 홀로코스트에는 생존자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조차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과 영혼이 망가져서, 예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겁니다. 그 말이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게 만약 진실이라면, 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지구 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P.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