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청비 : 칼 선 다리 건너 세상 농사 돌보니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휴머니스트) 203
조현설 지음, 이선주 그림, 전국국어교사모임 기획 / 휴머니스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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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는 전통 설화에서 보기 드문 적극적 여성 인물이다. 자청해서 낳았기에 자청비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사연도 독특하다. 제주도 지역의 자연적, 문화적 환경이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원전은 강을생 창본과 안사인 창본의 서사무가인 <세경본풀이>라고 하는데, 자청비가 후에 세경신, 즉 농사의 신이 되었다는 설정은 내륙의 바리공주와 당금애기와 대비되는 지역적 특색을 보여준다. 농토가 부족한 제주도에서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자청비는 첫눈에 반한 하늘나라 문 도령과 인연을 맺기 위해 삼 년간 남자인 척 그와 함께 지낸다. 문 도령과 혼인하기 위해 옥황 문선왕이 내건 조건인 칼 선 다리조차도 주저하지 않고 건넌다. 결혼 후 문선왕의 나라에 적군이 쳐들어오자 선봉에 나서 일거에 물리치는 용맹도 발휘한다. 더욱이 문 도령이 간계에 빠져 목숨을 잃자 되살리기 위해 서천행(이 대목은 바리공주 서사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물론 세부 장면과 전개는 전혀 다르다.)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듯이 자청비는 활달한 여장부라고 하겠다. 이 점에서 오히려 문 도령이 수동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어 대조적이다.

 

자청비의 적극적 성품은 현대적 시각에서 긍정적인 반면 당대의 보수적 눈으로는 다분히 부정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 책 곳곳에도 자청비에 대한 비난적 언사가 기술되어 있다. 자신을 희롱한 하인 정수남을 죽이자 어머니는 오히려 정수남을 옹호하고 자청비를 쫓아낸다. 문 도령의 방문을 믿지 못하여 거부(그런데 문 도령의 방문을 유도한 자청비가 굳이 모른 체 거부한 장면은 사실 납득하기 어렵다.)한 자청비를 마귀할망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을 잊은 문 도령에 대한 하소연을 들은 시아버지 문선왕은 오히려 자청비를 책망하여 마음이 괘씸하다며 상세경에서 중세경으로 지위를 낮춰버린다.

 

자청비와 정이 없는 정수남의 대결 구도는 자청비 설화의 핵심적 서사에 해당한다. 상전과 하인이라는 신분상의 차이를 무시하고 어여쁜 자청비를 탐내고 희롱하며 범하려고 하는 정수남의 목숨을 자청비는 서슴지 않고 거둔다. 다소간 외설적이고 해학적인 장면(앞서 서당 선생이 자청비의 성별을 의심하여 이리저리 시험하는 대목과 함께 대표적이다.)에서 용감하고 능동적인 자청비가 연약한 태도를 견지하는 모순된 설정이 실소를 자아낸다. 훗날 자청비가 정수남을 살려내고 문 도령과 함께 세 세경신이 되는데, 미스터리는 부록의 작품해설에서 해결된다.

 

한편 봉건적 가치관이 자청비 설화에 여전함을 알 수 있다. 자청비 부모가 애초에 기대한 것은 자식, 그중에서도 아들 낳기였다. 수륙재를 드리러 갈 때 정성이 부족하고 당초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탓에 아들 대신 딸을 낳게 된 것이다. 마지막에 문 도령이 뜬금없이 상세경이 되는 까닭도 이해 불가다. 자청비야말로 세경신이 될 운명임은 일찍이 문선왕 자신이 천명하였음에도 괘씸하다고 낮은 지위를 받아들이도록 하였으니.

 

자청비 설화는 내륙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독자적인 진취적 인물상이 특기할 만하다. 자청비는 눈앞의 시련에 주저앉지 않고 맞닥뜨려 자신의 사랑과 이상을 쟁취해 나간다. 비록 전통적 가치관에서는 부정적일 수 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더욱 높이 평가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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