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클래식으로 자살하기
허은 지음 / 답게 / 2018년 12월
평점 :
클래식으로 삶의 위안을 얻기도 부족한 판에 저자는 무슨 사연으로 도발적인 표제를 선택했는지 궁금하다. 제1부 우리는 누구인가? 제2부 진리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여기까지만 보면 클래식 음악과 무관한 철학서로 오해하기 딱 좋다. 그렇다, 이건 철학이다. 클래식 음악을 삶의 철학과 연계시켜 이해해보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다. 그가 보는 삶의 관점은 죽음이다. 삶은 고달프다. 죽음에 직면해서야 인간은 가면을 벗고 비로소 진솔하기 마련이다. 예민한 감성의 작곡가들은 더할 나위 없다. 운명과 죽음의 두려움에 쫓겨 그들은 고통으로 얼룩진 삶의 무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 책에 나오는 음악가들의 작품과 그들의 비극의 세계로부터 우리는 인생의 본질에 근접해보면서, 그 음악을 들으면서 그대로 죽음의 세계로 갈 것 같은 충동과 마치 머리에 총을 겨눌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 음악이 각자에게 주는 의미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P.50)
제3부는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에릭 사티,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베토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본다. 삶과 죽음의 미학이라는 시각으로. 그리고 여기에 부합하는 주요 작품을 곁들여 상세히 분석한다. 슈베르트는 ‘마왕’과 ‘현악 5중주’, 슈만은 ‘환상곡’, 브람스는 ‘교향곡 제1번’, ‘간주곡 Op.118-2’,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제32번’. 베토벤은 제4부에서 ‘교향곡 제5번’도 다룬다. 이렇게 보면 일종의 음악해설서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단지 귀로만 흘려들었던 해당 작품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음악 이해의 깊이를 더한다는 의미에서. 다만, 그네들의 작품세계를 전적으로 죽음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생각이다. 슈베르트와 슈만의 음악은 기쁨으로 충만한 곡들도 제법 많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지 이 책의 내용을 지나치게 맹신하면 그들은 죽음으로 찌들어 잿빛 삶을 살다가 작곡가로 오해할 수도 있다. 특히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자살유도곡’으로 설명한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어느 음악해설서에서는 이 곡을 멜랑콜리한 밀회의 느낌으로 해석한 사례도 있다. 작곡자 자신 또는 리흐테르의 러시안 스타일로 듣는 이 곡은 자살유도곡이라는 그릇된 상념을 타파할 것이다.
운명의 굴레에 대처하는 삶의 3가지 스타일을 저자는 제4부에서 풀어놓는다. 베토벤의 정면 돌파, 리스트의 운용능력 그리고 모차르트의 비극으로 구분한다. 개인적으로 리스트의 포용과 승화의 방식이 다가온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완벽한 오해와 그 실체를 작품의 핵심으로의 접근과 일체화로 밝혀내다’ (P.235)
맺는 글에서 밝힌 저작의 의도다. 저자는 클래식 음악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를 작품이 어떠한 배경과 목적을 갖고 탄생했는지를 고통, 운명 내지 죽음이라는 견지에서 조망하고 있다. 전반부에서 에세이 스타일의 독자적인 접근을 시도하기에 저자의 의도와 판단에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반면 이런 입장에서 익숙한 작품들의 내면으로 들어가 생경한 묘미를 느껴보는 것도 괜찮은 체험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