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러스킨 라파엘 전파 시민 교양 신서 7
존 러스킨 지음, 임현승 옮김 / 좁쌀한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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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은 사회 사상가이기 전에 당대의 저명한 미술평론가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근대화가론>은 이러한 면모를 대변하는 거작이라고 하겠다. 그는 당대의 일군의 젊은 화가들이 일으킨 새로운 회화 작풍을 옹호하며 이를 하나의 사조로서 적극적으로 체계화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표제이기도 한 라파엘 전파이다.

 

서양회화에 무지한 나로서는 전파가 있으니 응당 라파엘 후파도 있겠구나 싶었다. 라파엘이 소위 르네상스의 세 거장 중 한 명인 라파엘로를 지칭한다는 것도 근자에나 알았을 정도다. 러스킨에 따르면 라파엘 개인은 최고의 거장으로서 이후 서양 회화의 표준으로 군림할 정도다. 문제는 그 후대가 라파엘의 미를 전범으로 삼고 라파엘의 길을 따르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으며 한 치도 그 길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데 있다. 어느 영역도 마찬가지지만, 교조화된 체제에서는 독창성과 개성이 숨 쉴 수 없다. 절대미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므로.

 

청년들은 남달리 영민한 무언가를 지극히 독창적으로 이루어야 함과 동시에 이 남다른 무언가라는 것은 라파엘로 화풍의 규칙들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P.39)

 

이 전복되어 마땅한 특정한 제도란 바로 강직함과 진실함의 희생 아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제도를 말한다. (P.41)

 

러스킨이 라파엘 전파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들이 진실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에게 있어 진실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회화에서 윌리엄 터너를, 건축에서 고딕 양식을, 그리고 사상에서 사회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주창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같이 진실을 향하고 있음에서다. 회화에서 그가 찾는 진실은 무엇일까?

 

위대한 화가들은 모두 자신이 보거나 이미 본 것만 그림에 담는다는 진실이 보다 많은 이의 이해를 얻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라파엘 전파주의, 라파엘주의, 터너주의는 교육이 끼칠 수 있는 영향에 있어서만큼은 일말의 차이도 없다. (P.118)

 

러스킨은 이런 관점에서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을 죽 훑어 나가며 품평한다. 그리고 밀레이를 이들의 대선배격인 윌리엄 터너와 함께 나란히 설만한 최고의 예술가로 추켜올린다. 이 대목에서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부록의 상세한 연표에서 러스킨 부인과 밀레이의 불륜, 그리고 이어진 이혼 소송을 접하면서다. 나쁘게 보면 배은망덕이며, 다른 시각으로 보면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 셈인데 러스킨의 복잡다단한 심경을 헤아리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주된 목적은 라파엘 전파에 앞서 회화의 진실을 추구했던 윌리엄 터너를 찬미하고 그의 위대함을 대중 앞에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며, 가장 큰 미덕임을 알아야 한다. 책 분량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여 간명한 표현으로 핵심을 짚어가며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 윌리엄 터너에 대해서 잘 몰랐던 나같은 사람조차도 단번에 그에게 호기심을 갖고 작품들을 보고 싶도록 만들 정도다.

 

러스킨은 윌리엄 터너의 작품세계를 3기로 나누어서 각 시기별 주요 작품들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통해 그의 작풍의 장단점과 개별 작품들의 미적 우열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해석과 평가가 통설로서 인정받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독자 입장에서는 매우 진실 되고 설득력 있음을 밝힌다. 특히 터너의 본격적 개성이 발현되고 절정에 달하는 제2기에 대한 러스킨의 글 - 특히 <몽세니 고개>를 평한 - 을 한번 살펴보면 누구라도 그 생동하는 적확한 표현에 매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짓과 활력이 움트는 모든 장면에서 기쁨이 포착되었으며, 오랜 관찰을 거친 외재적 사실성에 대한 단순 묘사에 그치지 않고 터너 자신의 내재한 감정에 기원을 두는 모종의 위력과 분노를 통해 작품을 이루는 선 하나하나가 비로소 생동한다. (P.89)

 

바로 이런 점들이 터너 제2시기의 특색, 즉 첫 시기와 구별되는 주요한 특색이다. 화가로서 터너의 내면에 태동하는 어떤 원동력, 안정감은 줄이되 구상 속 넘치는 힘과 번뜩이는 정열은 드높여 주는 새로운 활력. (P.90)

 

러스킨이 터너에게 맹목적인 찬미만 한다고 폄하할 수는 없다. 매너리즘에 빠진 나머지 제2시기의 후반부는 몇 편을 제외하고는 졸작들만을 생산해 냈다고 혹평을 아끼지 않는 게 러스킨이다. 이 대목에서 러스킨의 독특한 예술 작업관이 등장한다. 그림을 한층 그럴 듯하게 보이고자 공들여 다듬고 덧칠하는 수고’(러스킨은 이렇게 표현한다.)가 두드러질수록 예술의 위대성은 타락한다고. 러스킨은 본질 외의 것을 덧붙이거나 꾸미는데 거부감을 지닌 듯하다.

 

진정으로 품격이 넘치는 작품들은 자신의 생각을 수고없이 표현해 낸 작업들, 무아의 경지에서 집착 없이 이루어진 작업들 가운데 있다. (P.120)

 

러스킨에 따르면 터너의 제3기는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고 단순명료한 가운데 풍부한 색감으로 평온한 정서를 그리는데 성공했다고 하며, “인간의 지성이 낳은 가장 고결한 풍경화”(P.134)로 평가한다. 이처럼 러스킨이 터너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인습과 인위를 타파하고 자신이 깨닫고 발견한 자연의 진실을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 연유다.

 

러스킨은 라파엘 전파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들과 윌리엄 터너를 연결시켜 양자 간의 동질성을 대중에게 뚜렷이 각인시키고자 하였다. 그것은 바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비단 예술에만 국한할 수 없고 그리되어서도 안 된다. 인생과 사회의 모든 면에서도 본질은 마찬가지이리라. 러스킨이 예술에서 사회로 시선을 돌릴 연유는 동일한 맥락에서라고 하겠다. 진실 되지 못한 사회에서 진실한 예술이 탄생할 수 없으므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같은 범부들도 품을 수 있는 위대함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윌리엄 터너의 행보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이를 도모하는 최선의 길일 것이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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