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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문록 : 현대어본 ㅣ 조선 왕실의 소설 5
임치균.송성욱 옮김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1년 10월
평점 :
뒤표지의 대여섯 줄 작품 소개 문구를 읽더니 큰아이가 대뜸 말한다. <사씨남정기>랑 비슷한 것 같다며. 맞다. 작품 해설에서도 밝혔듯이 이 작품은 “처첩간의 쟁투를 그린 이른바 가정소설의 하나”(P.305)에 해당한다. 하지만 단지 평범한 가정소설에 불과했다면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며, 소위 낙선재본에 포함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어떤 점이 독자에게 호소하였을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남녀의 혼인 관계에 있어 가장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유형이 일부일처제다. 사랑하는 한 명의 배우자와 평생을 보낸다는 상상은 매우 윤리적이며 이상적이기까지 하다. 다만 사랑으로 충만한 현대의 결혼 관계도 끝까지 유지되기 어려운데, 사랑은커녕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부모의 결정에 따라 평생이 좌우되던 과거에 부부 관계가 정말로 이상적이었을지는 의문스럽다. 세월이 흘러 정이 든다고 하지만, 정과 사랑은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남성중심 사회의 여유 있는 남편들이 정실로서의 부인 외에 측실을 두고 집안 대 집안의 결합이라는 혼인의 의무와 부담을 벗어던진 채 홀가분한 감정 유희에 빠지는 사례가 비일비재다.
[화경] 제가 비록 호방하지만 절대 미인을 얻어 금슬이 화평하면 어찌 다른 여자를 넘보겠습니까? 저는 이미 호씨 집안의 규수를 다른 남자의 노리개로 만들지는 않으리라 뜻을 정하였습니다. (P.14)
[이혜란] 이혜란의 완전하고 맑고 깨끗한 모습은 세상의 어떤 미인보다도 아름다웠고, 높고 고상한 태도는 비할 곳이 없었으니 그 자태를 어찌 호홍매의 한갓 낮은 태도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P.21)
[호홍매] 제가 사대부 규수로서 이미 화 공자와 서로 만나는 비례를 저질렀습니다. 비록 정식 절차를 거쳐 혼인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허락하여 부부의 의를 가졌으니 어찌 차마 다른 성씨의 남자를 섬기겠습니까? (P.24)
화경과 이혜란, 화경과 호홍매의 관계가 그러하다. 화경과 혜란은 부모가 정해준 인연이다. 양가가 당당한 명문집안이요, 양자는 진부하지만 군자와 요조숙녀다. 양자가 행복하게 결합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불행하게도 화경은 혜란에 앞서 홍매를 만나게 되고 마음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후에 그녀를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여기까지는 세상의 법도를 크게 벗어난 상태가 아니다. 각자 자신의 직분에 만족하고 원만한 가정을 유지한다면 말이다.
사람의 마음은 제아무리 잘난 인물일지라도 어찌할 수 없나보다. 분명 인물로나 품성으로나 첫째 부인이 우월하지만 애정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더욱이 혜란의 성품은 고고하여 위엄이 있기에 허물없이 대하기가 어렵다. 작중 영웅호걸인 화경은 홍매에게 홀딱 빠져버렸다. 홍매는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첫째 부인의 지위를 누리고 싶어 한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부인에게 매정한 남편의 태도와 이후 끊임없이 고초를 겪는 부인의 운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늘의 뜻을 끌어오기까지 한다.
[화경] 제가 평생 원수를 만나 신세가 잘못되었으니 원통할 뿐입니다. 이씨의 아름다움을 듣기는 하지만 참으로 비위가 뒤집히니 아예 듣고 싶지 않습니다. (P.26)
화 공자가 마음속으로 사랑스러워 하면서도 호홍매를 본 후로부터 오로지 한 생각에만 얽매여 잊지 못하고 있었고, 이혜란의 액운 또한 심상치 않은 탓에 결국 화 공자의 마음은 돌이켜지지 않았다. 하늘의 뜻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P.23)
혜란의 액운이 다하지 않은 탓이니 어찌 한갓 홍매의 간사함과 시녀의 악랄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홍매가 그 틈을 잘 타서 큰 계교를 행한 것일 뿐이다. 결국 혜란을 폐출하고 첫째 부인 자리를 빼앗으려 한 것이지만 이 일은 하늘이 혜란의 어진 성덕과 정숙한 행실이 천고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사단인 것이다. (P.77)
최초에 홍매는 비록 혜란보다는 떨어지지만 제법 요조숙녀로서 묘사되었는데, 어느 순간 사특한 인물로 기술되더니 나중에는 철저한 악인으로 변모한다. 본성이 그러한지 아니면 사랑과 질투의 소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편과 시부모에게 미약을 먹이고 혜란의 살인을 수차 사주하는 등의 악행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것으로 봐서는 단순한 투기는 아닐 것이다.
[호홍매] 하늘이 이미 나를 내시고 어찌 또 이씨를 내셨는가? 만일 이씨가 세상에 있으면 내가 어떻게 기운을 펼 수 있으리오? 이씨를 어떻게든 처단하여 이 세상에 같이 있지 않게 하리라. (P.47)
[호홍매] 이처럼 용모는 비록 절묘하나 마음이 요사하고 소행이 간악하여 사특한 기운이 외모에 현저히 드러나니, 그저 아쉬울 뿐이다. 화운 부부가 이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 불행함을 탄식하면서도 겉으로는 애중하는 표정을 지어 주위의 의심을 막고, 부드러운 기색을 보여 신부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P.38)
결국 혜란은 내쫓기고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이렇게 소설이 끝나면 비극에 해당될 테지만 고전소설은 대개 해피엔딩 아닌가. 화경은 서서히 심경의 변화가 생기고 홍매의 언행에서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고 마침내 홍매의 투기에서 사단이 생겼음을 알고 홍매를 또한 내쫓는다.
작품의 후반부는 살아난 혜란을 찾아서 화경이 재결합하기 위한 필사적인 분투의 노력 이야기다. 가뜩이나 냉대로 미덥지 않은 남편인데 정나미가 떨어진 이 마당에 혜란은 재결합을 극구 거부한다. 양자 간에 계속되는 밀당에 더해 혜란의 오라버니가 가담하는 화경 놀리기 에피소드가 추가된다.
혜란이 죽기로 결단하여 보지 않기로 작정하였기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꾸짖어 보기도 하고, 달래어 보기도 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고 돌아가 먹지도 않고 누워만 있으니 집안에서 다시 권유하지 못하였다. (P.174)
본래 혜란은 세상을 살 마음이 없어 화경을 대하는 마음이 식은 재처럼 차가워 다시 부부 동락할 뜻이 없었다. (P.194)
거부하는 혜란과 잘못을 뉘우치고 간절히 애원하는 화경, 이후 재결합한 부부를 보며 혜란을 다시금 제거하기 위해 온갖 모해를 꾸미는 홍매. 자중지란으로 인한 시녀 난화의 죽음과 호빈 집안의 풍비박산, 그리고 이어지는 홍매의 낭패. 그럼에도 홍매의 사악함은 그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작품은 혜란의 올곧은 마음씨와 고매한 품성으로 홍매가 개과천선하며, 결국 화경도 홍매를 다시 받아들여 모두가 영화를 누린다는 결말로 맺는다.
여기서 짚어볼 점은 홍매의 악인성이다. 작품해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화문록>이 여타의 가정소설 작품과는 다른 독특한 부분이 바로 ‘악녀의 형상’이다”(P.306). 분명 악녀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지향점은 오로지 화경에게 향해 있다. 에로스적 사랑은 대상에 대한 강력한 독점욕을 수반한다. 후에 곤경에 처한 홍매가 절개를 지키려고 애쓴 대목은 그녀가 일반적인 악녀의 전형과는 다름을 보여준다.
옛날 첩이 허물을 지은 것은 명공이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편벽하게 하여서입니다. 명공이 만일 가정을 공정하게 다스리고, 첩은 엄정하게 경계하였다면, 첩이 어찌 방자하게 첫째 부인을 해칠 수 있었겠습니까? (P.296)
홍매의 항변처럼 화경이 처신을 올바르게 했더라면 이 모든 분란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며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로 묘사되지만 화경의 잘못도 매우 크다. 가정의 화목에 남자의 역할이 중요함을 알게 해준다. 또한 혜란도 완벽히 무구하지는 못하다. 하늘의 뜻이라고 변호해봤자 혼인 초 화경에 대한 혜란의 데면데면함은 여인의 따뜻한 애정을 기대한 남자를 실망시켰을 뿐이다. 혜란 오라버니의 말은 비록 구시대적이지만 혜란을 꿰뚫어 본 것이기도 하다.
혜란의 시는 너무 고결하여 옥구슬보다 맑고 얼음보다 깨끗하다. 이런 탓에 젊은 날에 박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재앙이 다 지나고 길운을 만났으니, 고집스러운 마음을 돌려 부부가 다시 만나 과거의 원한을 떠올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 여자의 도리는 유순함이 제일이다. (P.147)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막장이라고 비난을 받는 드라마에 몰입하여 울고 웃는다. 예전 여인들도 재자가인을 주인공으로 파란만장한 운명이 전개되는 막장성의 이야기책을 돌려 보았으니 시대가 달라도 시정이나 궁중이나 마찬가지로 세태의 비슷함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