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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비룡 문장풍류삼대록 징세비태록 : 현대어본 ㅣ 조선 왕실의 소설 1
배영환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09년 9월
평점 :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창덕궁 낙선재의 소위 낙선재본 소설을 ‘조선 왕실의 소설’이라는 명칭으로 출간한 첫 번째 결과물이다. 낙선재본에 대해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흥미로운 이야기 작품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실체를 대할 수 있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다. 이 책은 모두 세 편의 장편 및 중편 소설을 수록하였다.
1. 낙성비룡(洛城飛龍)
영웅호걸은 출생과 용모, 습벽까지 범인과는 오롯이 구별된다고 선조들은 생각하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이경작이 그러하다. 범상치 않은 태몽과 기이한 풍모가 그러하며, 시도 때도 없는 잠과 엄청난 식사량도 일반과는 현저히 다르다. 초 장왕도 처음에 향락에 빠진 일개 범용한 군주에 불과한 듯 보이는 것처럼. 그런 면에서 이경작의 가리어진 참모습을 발견한 양자윤의 안목이 대단하다.
이 사람은 용과 호랑이의 기상과 금빛 봉황새의 재질을 가졌습니다. 제비와 참새가 어찌 기러기의 큰 뜻을 알겠습니까? (P.37)
영웅은 나면서부터 영웅의 자질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지만, 특정 자극과 계기로 절치부심하여 비로소 영웅성을 발휘하는 사례도 있다. 이경작도 처가의 박대로 가출한 후 오래도록 공부에 힘써 장원급제하고 병란을 진압하여 일대에 명성을 날린다.
주인공이 이후 아내와 재회하고 해로와 영화를 누리게 됨은 여타 고전소설과 유사한 전개이므로 특이사항이 아니다. 다만 이경작의 이채로움은 공부 시절에 만난 두 벗과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며, 통상적 세속사에 함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매일 조회 후 여가 때면 서로 모여 바둑과 해학을 주고받으며 소일하는 것으로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삼았다. (P.162)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아내인 양경주는 시종여일 남편을 향한 믿음과 공경을 저버리지 않는다. 미모와 심성을 겸비한 뛰어난 인물로서 그녀는 친정의 개가 권유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의지마저 갖추었다. 또한 훗날 벼슬길에 나선 남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주저 없이 직언하고 훈계하는 강직한 풍모도 지녔으니 당대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을 구현한 것이리라.
2. 문장풍류삼대록(文章風流三代錄)
<적벽부>의 소동파라고 하면 어지간한 식자는 이름이나마 들었음 직한 중국의 유명한 고전 시인이다. 본명이 소식인데,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부자가 모두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다소 불우하였지만, 이것이 그가 시인으로서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계기였다.
이 작품의 작가는 소동파를 추앙하였음이 틀림없다. 곳곳에 소동파에 대한 극진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소씨 집안을 배경으로 어찌 보면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이야기로 엮어 나가며 소동파의 노년마저 행복한 장면으로 바꿔치기한다.
이 반드시 소동파 선생이 지은 바다. 진실로 신선의 풍모를 지녔으며 정의로운 군자도다. 내가 규방의 아녀자이지만 어찌 깊이 감복하지 않을까? (P.191)
참으로 이 시대의 문장가요, 만대에 빛날 학자입니다. 어찌 시속의 보잘것없는 문인들에 비기겠습니까? 품격이 고상하여 속세에 찌든 사람 같지 않으니 틀림없이 동파 선생이 지으신 것입니다. (P.256)
이 작품의 진짜 재미는 후반부라고 하겠다. 소동파의 조카인 소원은 인물과 재주가 유달리 뛰어났는데 이의 혼인을 둘러싼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두씨와 여씨 집안에서 함께 소원과 혼인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소원의 호탕함에 대한 여자 측 집안의 우려와 미인을 아내로 얻고자 하는 소원의 바램이 절묘하게 교차하면서 두 명의 요조숙녀가 한 명의 군자와 결합하는 요즘 기준으로서는 낯설지만 당대로서는 익숙하면서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진다.
세상에 속 좁은 무리들은 부부간의 정을 중히 여겨서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꺼리지만, 나는 그렇지 않지. 내 마음에 맞는 숙녀가 있으면 서로 친구가 되어서 남편을 함께 섬기고 옳은 방법으로 내조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 (P.263)
네가 날 적부터 비범하더니 팔자가 이렇게 대단하구나. 스무 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절세미인을 둘이나 얻었으니 참으로 기특하다. (P.300)
여기서 당시 사대부들의 모순적 도덕관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즉 겉으로는 내면의 심성을 중시하지만 결국 보다 중시되는 것은 외모인 것이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은 옹색할 따름이다.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소설 속 선호되는 여인상은 빼어난 미모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얼굴은 월나라 서시 같고, 덕은 주나라 태임과 태사 같은 여자를 얻어야 일생이 행복할 것입니다. 만일 이 가운데 하나라도 제 뜻과 다르면 어찌 절대가인이라 하고 요조숙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P.220)
조카는 풍류호남자다. 미인을 많이 모을 것이니 만일 조강지처를 이런 희한한 박색으로 얻으면 반드시 금슬의 즐거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저 두공의 외동딸은 평생을 외롭고 힘들게 살 것이다. (P.245)
3. 징세비태록(懲世否泰錄)
단편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이야기 속 사건과 우여곡절은 빼곡하기 그지없다. 충신과 간신의 대립과 이로 인해 핍박받는 충신(과 그 자식)의 사연이 작품 전체에 깔린 배경으로서 사건이다. 구체적 사연으로서 장자의 혼인담과 차자의 피살이 뒤따르고 더불어 차자 아내의 절개와 그 동생의 혼인담 등 간계와 모략, 기만과 사랑이 뒤얽힌 복잡한 스토리가 정치적 격변과 함께 전개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유달리 주목되는 장면은 정작 따로 있다. 작품 배경이 청나라인 점이다. 충신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결국 오랑캐인 청나라이며, 이들이 토벌에 나서는 반역도당의 대의명분은 명나라로 대변되는 중화문명의 복원인 것이다. 운남성의 이극과 절강부의 임상문이 그러하다. 하지만 작가의 뜻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이 작품의 시대적 인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여타 소설과 차별되는 점이다.
우리 청나라가 비록 오랑캐라 하나 선대로부터 공자와 맹자를 숭상하고 윤리와 기강을 밝히신 바, 하늘이 친근히 하시어 세종 임금에 이르러서는 요순의 다스리심을 본받아 천하가 모두 마음을 돌려 따랐으니 어찌 오랑캐라 하겠는가? (P.345)
더러운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게 하고 분수에 맞지 않은 지위에 있은 지 오래되었다. 내 천명을 받고 너희 나라를 쓸어 없애버리고자 하거늘, 늙은이가 어찌 하늘의 뜻도 모르고 목숨을 재촉하느냐? (P.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