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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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대문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탓으로 작가는 알지 못한다. 단지 알라딘 인터넷서점의 클래식 음반 메뉴에 동명의 음반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그나마 흥미를 갖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에서 일본의 세계 최대의 시장이라고 한다. 그만큼 애호가도 많고 매니아층도 넓다는 뜻이리라. 언제나 감동을 주는 <노다메 칸타빌레>와 같은 기억을 남겨주길 바라며 책장을 펼친다.

 

노력만으로 이루기 어려운 분야 중 특히 예술이 그러하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의 한탄은 그래서 우리 같은 범부(凡夫)의 심정을 대변한다. 단지 1%, 아니 0.1%의 차이로 좋은 연주가와 거장의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긴다. 노력한다고 모차르트가 될 수 없음을 알지만, 재능이 있다고 가만히 있어도 모차르트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치열한 경연의 현장이 음악 콩쿠르다. 무명의 음악이 단순에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

 

소리의 느낌을 글로써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단순히 글 솜씨가 뛰어나다고 충분하지 않다. 작가 자신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지극한 애호와 관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반 독자가 아닌 소위 음악을 좀 아는 독자의 비웃음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온다 리쿠는 다행히도 그러하다. 물론 일본인 특유의 뭐랄까, 호들갑스럽고 과장되게 찬미하는 버릇은 여전하지만.

 

작가는 이 두툼한 소설에서 여러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음악과 삶에 관한,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한다는 의의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연주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한 삶의 의미에 관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리쿠는 먼저 작품의 굵직한 플롯인 요시가에 국제 피아노콩쿨의 예선과 본선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르포르타주처럼 세밀하게 기술하여 독자에게 콩쿨의 세계를 속속들이 알게끔 한다. 참가자들의 처지, 선곡의 목적, 음악에 임하는 태도 등 비록 나와는 다른 영역에 속하지만 그네들 역시 한 사람으로 갖는 불안과 초조, 기대 등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생활 속에서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뛰어난 귀를 가진 사람은 할머니처럼 평범한 곳에 있다. 연주자 또한 평범한 곳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평범한 곳에 머물고 싶었다. 할머니 같은 사람이 사는 세계에 속하고 싶었던 것이다. (P.80)

 

그런 면에서 다카시마 아카시에게 응원의 염이 쏠림을 어쩔 수 없다. 가정을 갖고 생계에 애쓰는 그나마 일반인에 가까운 그가 예술과 생활을 병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보다 인간미가 있으므로. 예술은 외따로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공감하고 수용될 때 본연의 가치가 빛을 발한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는 후대에 영예를 누리지만 생전은 불우하기 십상이다. 감식력 있는 귀가 없더라도 음악이 들려주는 음 자체와, 선율과 리듬에서 즐거움을 찾고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요즘 연주가는 작곡가의 의도를 얼마나 정확하게 읽어내고 작곡 당시의 시대나 개인적 배경을 상상하는 데 중점을 둔다. 연주가의 자유로운 해석, 자유로운 연주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풍조가 있다. (P.226)

 

가자마 진 같은 괴짜 천재의 사례는 무어라고 해야 할까. 심사위원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당혹스럽다. 콩쿨에서 전혀 비콩쿨 스타일의 연주를 하는 그는 오늘날 거의 사라져버린 연주가 유형이다. 작곡가의 의도 구현에 목매단 나머지 도전과 개성을 상실하여 박제화 된, 또는 균질적인 연주가들이 득실거리는 시대에. 그는 의식하지 못한 채 음악의, 그리고 연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새삼 청중과 독자에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중의 저명한 유지 폰 호프만은 세상에 그를 내보내며 선물이 될 지 재앙이 될 지는 음악계에 달렸다고 유지를 남긴 것이다.

 

이 아이는 반대다. 곡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고 할까, 프로나 잔소리꾼들이 싫어하는 방법을 쓴다. 아니, 그렇지 않다. 곡을 자기 세계의 일부로 만들어버린다. 곡을 통해 자기 세계를 재현하고 있다. 어떤 곡을 연주해도 뭔가 커다란 그림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듯한. (P.535)

 

솔직히 마사루와 아야의 기묘한 우연과 뜻밖의 재회는 작위적이다. 천재적 재능이 지닌 두 젊은이를 굳이 엮어놓을 필요는 없을 텐데. 완벽한 연주로 청중과 심사위원을 모두 사로잡는 마사루는 기교와 예술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개성마저 뚜렷하다. 아마 현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탁월한 연주가의 전형일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에게 한 가지 여운을 남긴다. 재현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즉 음악 창작의 욕구 말이다. 연주 자체도 창작의 일환이지만 순전한 창작에는 미치지 못한다. 고고한 예술혼에 치중한 나머지 세상과 고립된, 자신만의 음악에만 매몰된 음악이 아니라 모차르트나 베토벤 당대처럼 청중과 교감하는 음악.

 

그것은 새로운클래식을 만드는 것. 현대에 클래식으로 불리는 작곡가들처럼 새로운피아니스트 작곡가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P.458)

 

소위 말하는 대부분의 현대음악은 한없이 좁은 시장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본인과 평론가를 위한 음악이지, 반드시 연주하고 싶고 듣고 싶은 곡은 아니다. (P.459)

 

표제는 상징적이다. 꿀벌은 가자마 진, 천둥은 에이덴 아야와 결부된다. 일찍이 자연에서 음악을 발견한 뛰어난 재능. 전자는 뒤늦게 유지 폰 호프만의 섬세한 가르침으로 살아있는 음악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후자는 천재 소녀로서 회자되다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소진 증후군으로 음악계를 떠나버렸다. 여러 참가자와 심사위원이 등장하지만 에이덴 아야가 핵심적 인물이다. 등 떠밀려 콩쿨에 참가한 아야는 경연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이 들려주는 음악의 일깨움을 통해 음악인의 본질에 다가선다. 음악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의 의미.

 

치열한 콩쿨은 어느덧 끝나고 각자는 순위가 매겨져 흩어진다. 그럼에도 독자는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그네들에게 있어 대단원이 아니라 눈부신 시작에 불과하다고. 그들 앞에는 음악을 향한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길이 펼쳐져 있음을. 가자마 진은 이렇게 되새긴다.

 

행복. 행복하다. 세상은 이토록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실내에서 음악을 데리고 나가, 함께 세상을 채워갈 것이다.

동지도 있다. 동지를 찾아냈다. (P.692)

 

온다 리쿠의 글쓰기는 영화를 연상시킨다. 카메라는 인물들 전체를 조감하다 쓱 하나의 인물 깊이 파고들어 그들의 과거와 내밀한 심경을 파헤친다. 주변 인물들에도 소홀하지 않고 적절한 배분을 아끼지 않는다. 인물 몰입이 지나칠 때쯤 문득 콩쿨에서 연주되는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분위기를 전환한 후 영탄어린 감상으로 고조시킨다. 양념으로 인물의 개인사와 인물들 간의 은근한 러브라인도 반영하여 다른 의미에서 독자를 지루하지 않게 한다. 무척이나 능숙하고 효과적인 작법이다.

 

내가 나름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서 더 집중과 몰입이 용이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과 사람에 대한 작가의 시각과 기술이라면 음악 애호 여부와는 상관없이 소설 자체로서 충분히 설득력이 높다는 생각이다. 새삼 다른 작품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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