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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영시선 - 베오울프 외 ㅣ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62
이성일 역주 / 한국문화사 / 2017년 4월
평점 :
표제 그대로 고대 영시를 담고 있는데, 대표작인 <베오울프> 포함 8편을 수록하고 있다. <베오울프>을 제외한 다른 영시 작품에 호기심이 생겨 펼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1. 베오울프
수년 전 문학과지성사 번역본을 읽었으므로 쓸데없는 되풀이는 하지 않으련다.
베오울프는 기트인 전사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예이츠인이라고 한다. 기트인은 오늘날의 스웨덴 남부지방을 세력권으로 하고 있고, 현재의 스웨덴인[쉴빙]은 중북부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양 종족의 대립과 갈등이 꽤 심했다고 한다. 종국적으로는 스웨덴인이 기트인을 병합한 셈이다. 작중에서 기트인과 덴마크인은 비교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고, 스웨덴인과 대립관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덴마크인은 오늘날 독일북부와 폴란드북부에 해당하는 프랑크인들과 프리지아인들과 적대관계다.
영문학 작품인데, 영국이 아닌 머나먼 스웨덴과 덴마크 지역을 다루는 연유는 <햄릿>의 배경이 덴마크라는 점과 같은 까닭이다. 켈트족의 브리튼 섬을 훗날 점령하고 지배세력이 되었던 것은 앵글족과 색슨족이다. 앵글족과 색슨족은 게르만족으로써 바로 독일북부를 근거지로 삼다가 북해를 건너가 영국인의 시조가 되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는 조상들의 유산을 듬뿍 품고 있을 테니 고대영시가 게르만족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것은 전혀 엉뚱한 게 아니다.
베오울프의 영웅적 업적은 점층적 구도를 형성한다.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 그렌델에 이어 한층 막강한 그렌델의 어미를 무찌름으로써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리게 된다. 그리고 50년 후. 대충해도 70세가 넘는 고령이다. 불을 뿜는 용이 국토를 유린함에 따라 베오울프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사악한 용에 맞선다. 젊은 용사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기에 급급한 가운데, 그는 홀로 초자연적 존재와 대결하는 것이다.
영웅의 죽음을 무릅쓴 휴머니즘적 행위는 화려하기보다 차라리 고독하면서 비장하다. 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사상은 인간의 유한성과 운명의 필연성이다.
......아무리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모두를 기다리는 것이라오.
무릇 대지 위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자,
영혼을 보유하는 자, 인간의 자손이라면,
그가 가야만 하도록 예정된 장소가 있는 법-
삶의 향연이 끝나면, 육신은 죽음의 침상에
꼼짝없이 눕게 되는 것이오. (P.63)
깊은 상처, 치유할 수 없는 상흔에도 불구하고,
베오울프는 말하였소.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소.
자신이 이 지상에서의 삶을 이미 다 살았음을.
세속의 기쁨이 다했고, 예정된 삶의 나날들을
소진하고 나면, 죽음이 곧 닥치게 되어 있음을. (P.149)
베오울프는 영웅다운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고 시인은 예견한다. 이로써 기트인의 성세는 막을 내리고 어두운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2. 방랑하는 사람
3. 바닷길 가는 사람
<베오울프>를 제외하면 나머지 영시는 비교적 분량이 적은 편이다. 1쪽에서 길어야 15쪽 이내이므로. 이 두 편을 역자는 ‘극적 독백’으로 분류한다. 화자가 자신의 신상과 심경을 토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다. 화자의 어조는 회한에 가득 차 있다. 한때 행복한 시절이 있었을지 모르나 방랑과 역경과 고난의 나날을 겪는 고통이 그를 참담케 한다. 한편 <바닷길 가는 사람>은 전반부와 후반부에 내용상 심각한 단절이 존재하는데, 역자는 통념과 달리 무리한 종교적 의미 부여보다는 편집의 오류로 보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해 거짓 없는 노래 하나 부르노니,
내 삶의 여정을 읊은 것이오. 고난의 날들을 통해
얼마나 잦은 역경을 헤치며 지내왔으며, 가슴에 맺힌
쓰라린 고통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내왔는지- (<바닷길 가는 사람>,P.178)
4. 캐드몬의 찬가
5. 십자가의 환영
이 두 편은 기독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 <캐드몬의 찬가>는 천지창조를 이룩한 조물주에 대한 짧은 찬가다. <십자가의 환영>은 꿈속에서 한 나무가 자신이 베어져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로 만들어지게 된 사실, 덕분에 일개 나무이자 형틀에서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음을 자술한다. 종교적 배경이 없더라도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나는 기쁜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십자가를 향해 기도하였으니, 내 주변엔 아무도 없고,
나 홀로 있었다오. 내 영혼은 현세를 떠나라는 권유를
지속적으로 받았고, 영원의 세계를 갈구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가져왔소. (<십자가의 환영>, P.191)
6. 폐허
이 시는 폐허가 된 어떤 성채의 퇴락한 흔적을 과거의 영광과 빗대어 기술하는데, 보전이 완전치 않은 상태라 세부적 이해는 어렵다.
7. 버림받은 자의 탄식
역자는 이 시를 ‘애가’라 칭한다. 님에게서 버림받아 헤어진 화자가 자신의 신세와 님과의 재회를 간절히 소망한다.
......내 벗은 큰 슬픔 속에
기쁨에 넘치던 옛날의 거처를 회상한다오.
사랑하는 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자에겐
그리움과 슬픔만이 가슴에 가득할 것이오. (<버림받은 자의 탄식>, P.200)
8. 말돈 전투
9. 브루난부르흐 전투
이 전쟁시들은 <베오울프>와 함께 가장 극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 모두 10세기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는데, 전자는 잉글랜드와 바이킹과의 전투를, 후자는 스코틀랜드인과 바이킹의 연합과 잉글랜드의 전투를 다루고 있다.
<말돈 전투>는 비장미가 물씬 넘친다. 수적 열세에도 굴하지 않고 모두가 스러질 때까지 고장을 사수하는 전사들. 정정당당함을 잃지 않는 지휘관의 당당한 태도. 이에 대비되는 비겁한 자들의 졸렬한 행동을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브루난부르흐 전투>는 반면 승전의 기록이다. 그들이 어떻게 외부의 침입자들을 물리쳤는지에 대한 전황을 설명식으로 늘어놓는다. 전자가 전투에 임하는 전사들 개개인을 하나씩 실체적 존재로 다루고 있는 반면 후자는 전투 전반을 조감하여 전체로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전자가 문학작품으로서는 월등히 흥미롭다.
......일찍이 동쪽으로부터
앵글 족과 쌕슨 족 사람들이 브리튼 섬을 찾아
넓은 바다를 건너와, 용맹스러운 전사답게
웨일스 사람들을 정복하여, 영광을 자랑하는
용사들로서의 명성을 이룩한 이래, 이보다
더욱 잔혹하고 치열한 전투는 없었다 하오. (<브루난부르흐 전투>, P.220)
이 책은 단순히 시만 수록한 게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한 상세한 각주를 덧붙이고 있다. 아울러 후미에 <베오울프>의 세 왕실 가계도, 그리고 작품에 등장하는 각종 고유명사에 대한 풀이를 수록하고 있어 피상적으로 넘기기 쉬운 대목도 충분한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이미 천년도 더 옛날의, 그것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유럽 저편의 고전 작품을 읽는 의미는 무엇일까? 단순히 회고적 취향이라고 치부하기엔 그네들의 목소리와 행동이 생경하지 않다. 그렌델과 용이라는 불가항력의 존재에 맞닥뜨린 사람들의 좌절감은 오늘날도 여전할 것이다. 신앙예찬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님과 헤어지고 행복했던 시절은 아득한 옛날인 듯 느껴질 때 범인들이 갖는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다.
무엇보다 어진 임금으로서 늙은 수호자로서 노구를 이끌고 생사를 건 대결을 벌이는 베오울프의 처절한 고독감과 괴로움은 마음 한구석을 여전히 서늘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