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무도회 지만지 희곡선집
미하일 레르몬토프 지음, 박선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레르몬토프의 대표적인 운문 희곡이다. 그는 소설과 시로 유명하였기에 솔직히 희곡은 전혀 의외였다. 지식을만드는지식은 이렇게 가끔 참신한 놀람을 안겨준다.

 

근세 귀족사회에서 사람들의 만남은 주로 사교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무도회에서 춤과 대화, 카드게임 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가십거리를 주고받으며 짝을 찾는다. 뛰어난 외모와 재치 있는 언행, 그리고 고상한 출신을 뽐내는 이는 언제나 사교계의 총아가 될 수 있다. 반면 사교계는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자 우민화시키는 바보상자라고도 할 수 있다. 사교계는 가벼움과 쾌활함의 표면에 시기와 음모와 비방이 드리워져 있다.

 

(남작부인)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 버리면, 그때는 행복과 평안을 잃게 되지! 이곳의 사교계란…….비밀 같은 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 사교계에선 외모로, 옷차림으로 가려내지, 성실한지 방탕한지를 말이야. (P.62)

 

(아르베닌) 사람들과 지겹지 않으려면, 멍청함과 교활함을 바라볼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하는 것을! 이 두 가지가 사교계를 움직이는 전부이지 않소! (P.130)

 

가면무도회는 익명성을 전제로 한다. 나의 정체를 숨길 수 있다니 엄청나게 짜릿하다. 지위와 신분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본능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여도 나를 질책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솔직과 자유의 가면을 쓴 일탈과 불륜의 용인에 다름 아니다.

 

(아르베닌) 가면 아래서는 모두가 동등한 신분이 됩니다. 가면에는 영혼도, 직위도 없으니까요. 몸뚱이만 있을 뿐이지요. 가면무도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는 가면으로 숨기면서, 자신의 감정을 덮고 있던 가면은 과감하게 벗어던져 버린답니다. (P.22)

 

(남작부인) 행실이 바른 여인이 어찌 발걸음을 향할 결심을 할 수 있겠어요, 온갖 잡다한 인간들과 바람둥이들이 모욕하고 조롱하는 곳으로 말이에요.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P.64)

 

이 희곡은 가면무도회로 대표되는 사교계의 위선적 본질을 폭로하고 있다. 그나마 사교계는 귀족사회에서 필요악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가면무도회는? 가면무도회에 대한 평판은 당대에도 부정적이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니나의 유일하며 절대적인 과오는 바로 가면무도회에 참석했다는 점이다. 아르베닌은 니나가 가면무도회 갔었다는 말을 통해 그녀의 배신을 확신한다. 극중에서 니나는 남편이 자신을 죽이는 이유도 모르면서 억울하게 죽어간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의 간청도 외면하고 죽이듯이 아르베닌 역시 니나의 애원에도 막무가내다. 사랑을 배반당했다는 증오와 배신감의 위력은 이렇게 극도로 편향적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주인공 아르베닌의 본성이다. 그는 어두운 과거를 지닌 인물이다. 도박과 방탕에 젖은 생활을 하다 문득 과거를 청산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는 세상의 밝은 면에 현혹되지 않고 숨어있는 어두운 힘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경험과 지성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작중에서 그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냉혹하다.

 

(카자린) 새끼 양 같은 눈빛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짐승이야. 누군가는 고칠 수 있는 거라고 말하겠지, 타고난 천성을 말일세.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자는 바보라네. 제아무리 천사인 척해 봤자 그 속에는 악마가 들어앉아 있는걸. (P.18)

 

아르베닌은 니나를 사랑했을까? 분명 그의 결혼은 순수한 동기에 의한 게 아니었다. 그들의 결혼생활도 행복하지는 못하였다. 니나가 사교계에 몰입하게 된 것도 결국 가정생활의 무미함과 답답함을 벗어나고픈 욕망에서였으리라. 다만 아르베닌은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다고 믿는다. 그녀의 순수한 사랑만이 자신을 정화시킬 줄로 기대하였다. 나는 비록 더럽고 어두운 시절을 겪었지만 아내만은 한 점 흠결 없이 완벽히 순수한 애정을 나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바람.

 

(아르베닌) 나는 삶과 선을 위해 다시 태어났다오. 하지만 가끔씩 어떤 적대적인 혼이 나를 폭풍 같았던 예전 생활로 데려가곤 하오. (P.46)

 

(아르베닌) ,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사랑하고 있어. 그리고 그녀는 날 처참하게 기만했어...아니, 난 그녀를 사람들에게 양보하지 않겠어...그들은 우리를 심판할 수 없어...내가 직접 무서운 심판을 내리겠어...그녀에게 사형을 내리겠어. (P.125)

 

아르베닌은 위선자다. 그의 인물됨은 <우리 시대의 영웅><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의 페초린과 동격이다.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악에 친연성을 갖는 인물. 우리가 레르몬토프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당혹감의 근원은 바로 주인공의 통상적 속성에서 어긋나는 독특한 성격에 기인한다.

 

(아르베닌) 썩 꺼져 버려라, 선인이여. 난 너를 알지 못하니. 난 너에게 기만당했던 것이고, 그렇기에 오늘로써 우리의 짧았던 동맹을 파기하노라. 영원히 안녕! (P.91)

 

아르베닌과 니나를 제외한 여타 등장인물 역시 위선적 요소를 띠고 있다.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단초인 니나의 친구인 남작부인, 사채업자인 슈플리흐, 아르베닌을 다시 어두운 세계로 유혹하는 카자린 등. 공작 정도만이 그나마 낫다고 할 정도. 마지막 대목에서 등장하는 미지의 인물은 모호하다. 그는 사람일까 아니면 사람 이외의 존재일까 분명치 않다. 다만 그는 아르베닌의 영혼을 적나라하게 간파하고 있다.

 

(아르베닌) 인생은 무도회와 같소. 춤추며 돌다 보면 즐겁고 주변은 온통 빛이 나고 밝지...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구겨진 옷을 벗는 순간 그 모든 건 기억에서 날아가고 피로가 덮쳐 온단 말이오. (P.137)

 

인생이 무도회와 같다면, 가면무도회가 암시하는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이 모든 악의 꽃이 번화하는 사교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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