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소만 적절하다면 언제라도 괜찮죠. 잠자는 시간 빼고는.. 사실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소파인데, 등을 푹 기대고 다리를 쭉 편 채로 책을 읽을 때 가장 잘 읽힙니다. 여기에 커피 한 잔만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까페나 도서관 등에서도 자주 책을 읽지만 저에게 책을 읽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주변의 소리이기 때문에, 시끌벅적한 공간에서는 잘 읽지 않습니다. 조용하기만 하면 지하철 안에서 서 있는 동안에도 책은 읽을 수 있죠. 그래도 소파가 제일 낫습니다.

Q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거의 종이책을 읽습니다. 전자책보다 더 집중이 잘 되고, 전자책은 책의 형태가 아니라 텍스트 파일 같이 변형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라서.. 움베르토 에코의 퍼포먼스가 보여주듯, 시간이 지나도 종이책이 전자책을 넘어서지는 못할 겁니다. 책의 존재 자체가 없어지지 않는다면야..

독서 습관은.. 예전에는 책을 굉장히 깨끗하게 읽었는데, 문득 '어차피 이 책들을 내가 팔지도 않을 거고, 누구한테 주지도 않아 온전히 내 책이 될 텐데 이렇게 애지중지 하듯 모실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더불어 점점 기억력이 나빠지고 집중력도 떨어지기 시작해서, 책장을 접고 밑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치기 시작하니까 거침없이 긋게 되더라구요.. 밑줄은, 일단 문장이 마음에 들면 치고, 책을 읽으면서 기억해야 할 부분이면 치고, 나중에 따로 정리할 때 참고해야 할 부분에 칩니다. 그리고 밑줄을 친 페이지는 항상 접죠. 보통 밑줄 친 페이지의 아랫부분을 접는데, 읽으면서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거나, 윤문이 제대로 안 되어 있는 부분은 윗부분을 접습니다. 이렇게 접고 밑줄을 쳐도 나중에 보면 '내가 여기에 왜 밑줄을 쳤지..?'하고 고민할 때가 많아서 이따금 포스트잇(그 뭐냐.. 큰 거 말고 책갈피처럼 표시할 수 있는 그거요)에 핵심어만 적어놓고 붙여놓기도 하죠. 나중에 그걸 보고도 기억나지 않을 때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Q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지금 제 침대에는 골격이 없습니다. 사실 침대가 아니라 그냥 매트리스... 침대에 엎드려서 책을 읽는 시간이 거의 없어지기도 했고, 요즘 아침하고 밤에만 집에 있는 일이 많다보니, 집에서는 책상에서 잠시 읽다가 올려놓고 침대로 가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지금 제 책상에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 페소아의 『불안의 책』, 우석영의 『철학이 있는 도시』, 그리고 『로쟈의 인문학 서재』가 놓여 있네요. 『시지프 신화』를 제외하고는 아직 책갈피가 꽂혀 있습니다. 페소아 책은 읽기 시작한지 세 달이 다 된 거 같은데 아직도 반을 넘기지 못했네요. 『시지프 신화』는 읽으면서 밑줄 친 부분을 정리하려고 놓아둔 건데, 너무 많아서 엄두가 안나요. 아마 오늘도 이 문답 다 적으면 또 미루겠죠...







Q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일단 전집별로 구분을 해놓고, 그다음엔 같은 작가들끼리 구별을 해놓죠. 이렇게 놓다 보면 가끔씩 난감한 경우가 생기는데, 카뮈의 다른 책들은 전부 전집(책세상)으로 사놓고 『페스트』만 민음사본으로 사 놓은 경우라든가, 새로 나온 『이방인』 개정판이 전집과 다르게 양장본이라든가, 아멜리 노통브처럼 문학세계사랑 열린책들 판본이 뒤섞여 있는 경우도 있죠(이건 디자인도 너무 확 달라서 난감합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작가를 1순위에 두고 정리를 합니다. 요즘엔 이런 고민이 적은 편인데, 난감한 일이 생기지 않아서라기보단 책을 꽂을 공간이 점점 줄고 있어요. 책 위에 책을 얹을 수밖에 없는... 정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저는 책을 헌책방에 다시 내놓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간소하게 줄이는 일 같은 건 없을 거 같네요.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책을 딱 한 번 팔아봤습니다. 되게 후회하고 있지만, 다시 사진 않았어요..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음... 얼마나 어렸을 때인지.. 어렸을 때 집에 90권짜리 동화책 세트가 있었는데 엄청 많이 읽었죠. 몇 번씩이나 계속.. 그때부터 책 읽기를 취미로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과를 갔을지도...ㅎㅎ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책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인데, 그 당시에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었죠. 자신의 상상력을 이렇게까지 밀고 나가면서 지식이 채워져 있는 소설을 처음 봤으니까.. 그 덕분에 본격적으로 책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고, 독서 경험이 한 단계를 넘어서는 계기가 되었죠. 지금은 더 이상 팬이라고 하기 그렇지만, 그 때 그 경험은 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경험입니다..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진짜 열심히 찾아봤는데, 없네요.. 너무 뻔한 사람이라 그런가.. 전공서적이나 수험서 아니면 (인)문학 서적밖에 안 보이네요. 그나마 놀랄 만한 건... 고등학교 졸업 앨범? 표지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노려보고 있어요..

Q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전에는 작가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썼을까, 하는 생각이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고 그랬는데, 지금은 별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네요. 물론 가끔 책이 정말 이해가 안될 때면 만나서 묻고 싶을 때가 있긴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따지면서.. 그럴 때를 제외하면 딱히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작가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몰랐던 내용을 이해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셰익스피어는 만나보고 싶네요. 책 내용이 궁금한 건 아니고 그를 둘러싼 논란의 실체를 알고 싶어서.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너무 많은데... 일단 박경리 작가의 『토지』가 있죠. 전권을 사놓고 여태 한 페이지도 안 읽어본... 먼지만 쌓이고 있고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도 있습니다. 여섯 권으로 분권되어 있는 걸 샀는데, 계속 미루고 있어요. 맨날 궁금해하기만 하고... 만약 합본이었으면 엄두도 못냈겠죠? 롤랑 마뉘엘의 『음악의 기쁨』(전 4권)도 계속 미루고 있는 책 중에 하나죠. 전 하루의 절반 이상을 음악을 들으며 보내기도 하고, 클래식 음악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 싶어서 산 책인데, 이것도 계속 미루기만 합니다.. 그리고 『돈키호테』. 고등학교 때 시공사판(그땐 아직 1권밖에 없었어요)으로 3분의 2 정도까지 읽다가 그만 둔 뒤에(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와서..)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열린책들판 두 권을 샀어요. 이미 줄거리도 거의 다 잊어버린 상태라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지 읽어야지 말만 하다가, 정작 책은 펴지도 않고 해설서인 『돈키호테를 읽다』를 사버렸죠. 원작을 읽어야 해설서를 읽든지 말든지 하는데...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최근은 아니지만, 이태준 작가의 『문장강화』를 다 못 읽고 덮어 두었어요. 내용이 못 읽겠어서는 (절대!!) 아니고, 읽던 중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계속 겹쳐서 몇 달 동안 놓고 있었더니 흐름을 놓쳐버려서... 소설의 줄거리 같은 흐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책을 읽을 때의 흐름을 놓치면 끝까지 못 읽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될 것 같아요. 『문장강화』는 글쓰기를 위한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글쓰기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 책만한 글쓰기 교본을 찾긴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어요. 예문이 워낙 오래 전 것이라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도 다 못 읽고 있는 책이지만 아직 내려놓지는 않았는데, 자꾸 읽어야 할 책이 생기다보니 차일피일 미루고 있네요. 외적인 사정도 있지만, 200개의 조각난 소아르스들을 보고 나서 남은 200여 개의 파편들을 읽어낼 생각을 하니 엄두가 안 나기도 하고.. 소아르스의 일기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가 좌절, 우울함, 절망 같은 것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Q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음... 일단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강의』를 가져가고(안 그러면 계속 안 읽을 것 같은...),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을 가져갈게요. 앞의 두 권은 아직 안 읽은 책이라 그렇고, 최승자 시인의 시집은 위로삼아.. 안 그래도 혼자라서 외로운데 가장 애정하는 시에라도 기대야죠. 이 시집을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외로움의 폭력」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 근데 『마의 산』이 분권되어 있으니까 두 권으로 치는 건가?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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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4-23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의 강요로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안 좋았지만, 다행히 독서의 특별한 재미를 알게 된 덕분에 지금도 책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

아무 2016-04-23 12:03   좋아요 0 | URL
전 강요를 받진 않았지만, 환경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었죠. 집에 장난감이 없었거든요.. 의도하셨던 것 같긴 합니다만.. ㅎㅎ
어릴 때도 활동적이지 않았던 저는 책이랑 티비 보는 걸 제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 덕에 안경을 일곱 살 때부터 끼고 있죠^^;;

2017-12-23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전집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7년 4월
평점 :
절판


카뮈의 글은 항상 읽기가 어렵다. 『이방인』도 그랬고, 『페스트』도 그랬으며 『시지프 신화』도 그랬다.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부조리의 문학이 잘 읽히길 바라는 게 사치인가, 라는 생각도 해 보고, 지시어가 너무 많아서 잘 안 읽히는 건가라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만두었다. 일종의 고행과 같은 독서가 끝나면, 부조리 안에 우뚝 서 있는 카뮈라는 한 인간을 만날 수 있으니.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 반항은 갈망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반항은 짓눌러오는 운명의 확인이다. 그러나 그런 확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한 채의 확인인 것이다. (83-84쪽)


『시지프 신화』는 세 개의 장('부조리의 추론', '부조리한 인간', '부조리한 창조')과 에필로그('시지프 신화'), 그리고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평론이 부록으로 실려있다. '부조리의 추론'은 저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15쪽) 카뮈가 생각하는 세계와 삶의 관계는 '부조리' 그 자체다. '부조리'는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장치 사이의 절연"이다.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직면해 있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습관' 속에서 관성에 젖어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게 바위를 굴리는 것과 같은 '습관' 속에서 부조리를 인지하는 순간은 바위를 올리고 다시 산을 내려오는 순간, '의식'의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다.


먼저 카뮈는 합리적이지 않은 부조리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태도 중 자살과 희망에 초점을 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부조리함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행위다. 그는 부조리의 풍토를 발견한 철학자들,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야스퍼스, 체스토프, 후설이 부조리의 의식에서 어떤 귀결을 이끌어내는지 주목하고, 그들이 모두 그 귀결을 '희망'에 두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를 '철학적 자살'이라 지칭한다. 카뮈에게 희망이란 "삶에 어떤 의미를 주며 결국은 삶을 배반하게 되는 거창한 관념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22쪽)일 뿐이기 때문다. 자살 역시 마찬가지다. 자살은 부조리의 문제 자체를 폐기하는 일이기 때문에 부조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다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최극단의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매일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서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85쪽)


희망과 자살이라는 문제를 논한 뒤 카뮈가 제안하는 태도는 바로 '반항'이다. 부조리는 세계와 인간의 관계의 단절이지만, 동시에 그 둘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매듭이기도 하다. 부조리를 인식하는 인간의 정신과 세계는 "서로 힘 겨루듯이 밀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65쪽) 결국 카뮈가 제안하고 있는 반항은 부조리라는 매듭에 매달리는 것이 된다. 합리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 부조리의 세계에서, 인간에게 자명한 것은 부조리뿐이기 때문이다. 이 부조리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하는 명철한 의식이야말로 반항을 지탱하는 요소가 된다. 모든 삶이 곧 반항이어야 한다는 것이 부조리의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조리가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은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므로, 이것은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물론 자유는 영원하지 않다. 인간은 결국 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자유에는 한계가 없다. 두 번째 귀결인 자유의 개념에서 카뮈는 '양(量)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이 논의는 '부조리한 인간'에서 돈 후안의 사례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한계 없는 자유를 책임 없는 방종으로 치부하는 것보다는, 생의 모든 순간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소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 듯하다.


카뮈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단절을 '의식'하는 부조리를 논의하고 있지만, 그의 초점은 부조리한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행복한 시지프'로 표상되는 일련의 태도, 즉 반항, 자유, 열정으로 나타난다. 남은 두 개의 장, '부조리한 인간'과 '부조리한 창조'는 첫 번째 장인 '부조리의 추론'의 부연이다(..라고 마음대로 정의해본다). 부조리를 대하는 인간의 풍토와 부조리한 창조자와 작품의 모습을 통해 부조리와 마주한 인간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조리에 대응하는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은 마치 초인과 같이 느껴지지만, 이를 열렬하게 외치는 카뮈의 글에는 넘치는 열정이 있다. '부조리'에서 출발한 그의 문학적 테마가 '반항'으로 나아가는 것, 즉 『이방인』에서 『페스트』로 나아가는 도정은 당연한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줄거리가 가물가물한 『이방인』을 떠올리며 그 작품은 결국 '부조리의 감수성'의 소설적 재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왜 부조리한 세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은 남는다. 세계는 그 자체로 이미 부조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부조리의 감수성이 갖는 문제들(이러면 결국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이 있지만, 시지프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태도와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카뮈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쉽게 술술 읽히는 문장은 아니었으며, 중간중간 막히는 부분도 꽤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수록된 김화영 평론가의 해설은 『시지프 신화』가 나오게 된 배경과 내용을 잘 정리해주고 있으므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이 글을 쓰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보다 더 간단한 설명을 찾으려면 김용규의 『철학까페에서 문학읽기』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페스트』를 다룬 장에서 『시지프 신화』를 언급하며 '부조리'와 '반항'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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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16.3.4 - no.005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고백을 하자면, 나는 지난 호에서 듀나의 인터뷰를 읽었을 때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었다. 다만 인터뷰에서 '익명성'의 비중이 너무 크지 않나...라고 생각해보았을 뿐이다. 발행 이후의 후폭풍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5호가 나올 때가 되어서야 그런 논란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 다시 생각해보면서 비판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 부분이라고 결론짓게 되었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도 소위 '순수'문학의 시선에 길들여져 있었던 건 아닌가, 하고.


이번 호에서 문제의 '4호'를 대상으로 한 서평을 실은 것은, 어떤 비판도 감내하겠다는 일종의 제스처로 보인다. 'Outro'에서도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을 인용하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아직도 분위기는 싸늘한 듯하다. 사과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논란이 사그러들기에는 그 시기가 너무 늦었다. '지면을 통해 말할 수밖에 없어' 그랬다지만, 논란이 일었을 때 공식 입장을 밝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 실린 서평들에 대한 인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실망.' 목차를 볼 때부터 의문이 들었던 건 왜 오한기의 『의인법』을 다룬 서평이 세 개나 되는가..였고, 전반적으로 핵심을 찌르는 글보다 개인적인 감상에 머무르는 글이 많이 있었다(콕 집어서 하나만 말하자면, 『은어낚시통신』 서평. 서평의 기본적인 기능이 '소개'라고 했을 때, 이 글은 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줄거리를 알면 '이 부분이 소설의 이 내용을 토대로 한 거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 글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윤대녕 작가가 처음 이 책을 출간했을 때와 비슷한 나이가 된 작가의 소회 그 이상이 아니다). 서평 중에 가장 나았던 것이 『Axt』 4호를 다룬 서평이었으니..


반달 북클럽의 좌담은 반가웠다. 알라딘서재로 보았을 때는 두 번의 좌담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에는 한 번의 좌담만 실려서 아쉬웠다. 그래도 『Axt』에서 북클럽의 좌담을 실은 이래 가장 깊이있는 좌담이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나는 문학동네판 『페스트』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이번 호에서 가장 좋았던 글을 꼽으라면(소설과 서평 전부 포함해서), 나는 주저없이 이우성 시인이 쓴 「'쓱'과 빛」을 고르겠다. 요즘은 좀 뜸하지만, 얼마 전까지 TV만 틀면 나오던 이 광고에 대한 단평이 재미있기도 하고, 인상주의와 함께 묶어 설명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내가 그 광고를 보며 생각했던 건 '색채가 강렬하고 그 대비가 두드러진다', '극단적인 심플함의 추구' 같은 것이었는데, 이우성 시인은 나와 반대로 말한다. 간단명료한 메시지('이거 사세요!')를 명쾌하게 전달하기 위해 셀러브리티가 가장 부각되고 나머지는 단순화되고 있는 시대에, '쓱'은 오히려 복잡함을 추구한다고.


그런데 '쓱'은 복잡하다. 신기하게 복잡하다. 사실 이 광고는 모든 것을 '쓱' 한마디로 요약해버린다. 하지만 미장센은, 헐, 왜 이렇게까지 하지, 라는 생각이 든다. 등장인물은 공유와 공효진이다. 둘은 초현실적으로 꾸며진 방 안에 있다. 대단한 것을 가져다 놓은 것은 아니고, 색감이 독특하다. (...) 이런 식의 작품에서 구도는 중요한 요소다. 색의 배열 역시 신경 써야 한다. '쓱'의 방은 마치 몬드리안 이전의, 이제 갓 추상을 경험하기 시작한 어떤 화가가 화면의 분할과 색의 조화를 신경 쓰며 그린 작품 같다. (...) 특히 빛은 다분히 '인상주의적'이다. 창문으로 오후의 빛이 들어온다. 두 배우는 이 빛과 조화를 이루며 앉아 있거나 서 있고, 필요한 말을 '쓱' 한다. (106-107쪽)


피곤하고 바쁜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쓱'은 "그래서 쓱이 뭔데?'라는 의문을 던지고, 회화적인 광고의 모습에 주목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광고의 인상과 달리 'SSG닷컴에 접속하면 역시 너무 별것 아닌 세상'이 펼쳐져 있다. 시인의 말대로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겠다. 구도의 복잡함과 메시지의 심플함, 그리고 의문까지 품고 있는 '쓱' 광고를 티저광고와 '인상주의'의 결합으로 볼 수 있으려나.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은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번 인터뷰를 읽고 나니 호기심이 생겨 읽어보고 싶어졌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은밀한 생』부터 찾아봐야 하는 건지.. 인터뷰를 보아하니 장르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인 듯 한데, 심호흡을 하고 도전해봐야 할 듯하다.

서면으로 진행된 인터뷰인데도 현장 인터뷰처럼 느껴지도록 애를 쓴 흔적이 보였고, 인터뷰 방식이 조금 바뀐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과거 악스트 편집자들이 작품 얘기를 거의 안 했다면(내 기억이 맞다면 박민규 작가 인터뷰 때 배수아 작가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언급한 것이 전부다), 이번 인터뷰는 작품 이야기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일종의 팬심(?)이 발현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지켜봐야 할 변화인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실린 단편 중에는 인상적인 작품이 없었고, 읽기 힘든 것이 더 많았다. 특히 정영문 작가의 「유형지 X에서」를 읽으면서 나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문장들 속에서 헤매었고(1시간 동안이나), 화자가 '엑스프로방스'에서 겪는 일들이 갖는 의미도 도통 알 수 없었다. 「목신의 어떤 오후」 이후 두 번째 만남인데, 정용준 작가의 글로 감상을 대신하려 한다.


이런 예가 또 있다. 정영문이다. 이름과 얼굴과 소설이 딱 영문이다. 내가 왜 이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영문을 모르겠는 그의 소설. 정영문의 소설을 읽으면 나는 혼잣말로 영문을 모르겠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몰래 웃곤 하는데 이런 말장난이 그의 소설을 설명하는 함축적인 감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37쪽)


『Axt』가 싣는 단편들에 일종의 경향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리얼리즘에 가까운 소설(지난 호에 실린 윤고은의 「된장이 된」 같은 단편이 예시가 되겠다)보다 '모던한 경향'의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던한 경향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인 서사가 부재하는 작품군을 내 맘대로 표현한 것이다. 서사라기보다 인과라고 해야 할까. 'diary fiction' 같은 경우 그동안 서정적인 소설이 주를 이루었으나, 이번에는 다른 시공간의 '나'가 나타나고, 링 위에서 마지막 펀치를 맞는 순간 시간이 멈추는 이야기로 흘러가 그 경향이 모던함에 가까워졌다, 고 (내 멋대로) 진단해본다. 여전히,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냐'는 의문이 남지만...


서평이 다루는 책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지만(이번에는 인물의 전기, 역사만화에 대한 서평이 실렸다), 예리하게 파고든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특히 한국소설에 대한 서평이 해외문학을 다룬 서평보다 기복이 심하다. 감상을 정리하자면, 내적·외적으로 문제가 많은 총체적 난국이다. 꾸준히 읽어온 독자로서는 안타깝지만, 잘 추슬러서 다음 호를 내주길 기다려본다. 리스트를 증식시켜 줄 수 있는 다음 호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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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은 얄궂다. 물리적으로는 가장 얇은 외피로 덮여 있으며, 가장 깊은 입구이자 출구라 할 수 있는, 이 구(口)가 일단 충족되지 않으면 몸의 나머지 기관들이 제대로 일해주지 않는다. 시험에 떨어지고 사랑에 실패하고 굴욕적인 노동을 하고 불시에 사고를 당해 손발을 잃고 애착하는 이의 죽음을 겪고도, 사람은 밥을 먹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구차하고도 귀한 기관을 통해 먹고 마시고, 나와 남의 사정에 관하여 발설한다. 이러한 입을 얻어맞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심을 느끼며, 각별한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다. 먹는 입을 향한 주먹질은 먹지 말라는 의미이고, 말하는 입을 향한 주먹질은 닥치라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황정은, '입을 먹는 입' (28-29쪽)


특별한 일이랄 것이 없는, 평범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독서실에 있었고, 밀린 방학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Axt』 5호를 읽기 시작했고, 『시지프 신화』의 두 번째 장을 읽었고, 『불안의 책』은 200번대에 진입한 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마지막 유세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누가 당선될지 알 것 같았고, 뉴스는 암담하거나 시답잖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집에 와서 오로지 황정은 작가의 글을 보기 위해 구입한 『문학동네 61호』를 폈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정치적 소견이나 성향을 드러내는 일을 기피했다. 이는 사람들이 정치적 성향이라는 잣대를 내세워(때로는 휘두르기도 한다) 사람을 판단하는 이분법적 잣대가 싫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점점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가 그런 화제를 피하는, 그리고 그런 화제에 무관심한 것이 당연한 것 같은 분위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가끔 나의 입, 누군가의 입을 향한 '주먹질'이 생각났던 것 같다. 이 안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하나의 주먹이 되고, 주먹에 맞기 싫어서 입을 다물고, 주먹은 말이 없어 무용해진 입을 먹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감옥(監獄)으로 자진해'(이성복, '1959년') 가는 꼴이었다.


무관심이, 침묵이 미덕인 양, 쿨한 것처럼 치부될 때도 있었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이 때탄다고 말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것이 유효해 보일 때가 있지만.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희대의 오지라퍼'(구병모, '이창')로 손가락질받던 시기는 지났지만, 이미 먹힌 입은 뚫리지를 않는다.


일인시위용 피켓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동생에게 그 자리에 같이 가자고 말하자 단번에 싫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곰곰 생각하더니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용산이 참혹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점을 알며 그러한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기는 무섭다고 말한다. (47쪽)


'입을 먹는 입'은 용산 참사를 다룬 일종의 르포다. 글의 말미에서 황정은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침묵과 부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고. 지금 이 세계에 '침묵으로써 일조했던 것'은 아니냐고 묻는다. 2016년 현재, 내 입은, 안녕하지 않았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넓지 않다. 그리고 깊지도 않다. 그런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길어졌다. 손이 가는 대로 써 버렸는데, 어쩌면 주먹보다 무서운 것은 내 입에 주먹이 날아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내 입을 먹은 것은 내 입일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내일 선거가 나의 일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나는 집에서 1분 거리에 있는 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하고,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고,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잠을 잘 것이다. 없는 입을 앙 다문 채. 당장 입을 되찾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작은 틈이나마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잠을 청해야겠다. 그리고 내일 내 입에 낼 그 틈이 여전히 '1959년'을 살고 있는 이 세계에도 틈을 내서, 다음에는 불만이 덜해진 선택지를 들고 나를 찾아왔으면 싶다. 물론, 주먹은 사양이다.


질문을 해보자.

그들의 국가와 당신의 국가와 나의 국가가 다른가.

어떤 대답을 고를까.

같아도 문제, 달라도 문제 아닌가.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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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능동적인 시민의 혁명적 활동이 성과를 거두어 국민국가의 틀 속에서 (국민으로서) 시민의 권리가 확립되고, 시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의회를 중심으로 정치가 움직이게 되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가하고 선거 때 투표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렇게 되면 역설적으로 이미 국내에서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긴장감이 사라진 결과, 정치를 남의 손에 맡겨도 괜찮다고 여기는 수동적인 사람들도 늘어난다. 19세기 후반에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복지와 공공사업이 정비되자, 수동적 시민은 정치의 소비자로 변했다. 이것이 '대중'에 깃들어 있는 일반적 이미지다. (60쪽)


전체주의는 현실 세계의 불안이나 긴장감을 견딜 수 없게 된 대중이 도망갈 수 있는, 그야말로 '총체적' 공상세계를 구축한다. 총체적인 공상적 세계 안에서 대중은 편안함을(at home) 느낄 수 있다. 다만 이 공상적 세계는 전면적으로 현실세계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상당히 왜곡시킨 형태로 가공됨으로써 전체주의적 공상의 기반이 된다. (63쪽)


그런데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그러한 공감의 '정치'는 토론을 활성화하거나 관점을 다양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불행한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것을 인간적이고 올바른 모습이라고 강요하는 배타적 가치관으로 기울기 쉽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지 않는 자들을 비인간적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배제하려는 경향마저 낳는다. (...)

실제로 프랑스혁명 과정에서는 '공감하지 않는 무리'를 대량으로 숙청하는 공포정치(Terror)가 이루어졌고, 똑같은 일이 20세기 좌파적인 '해방'의 '정치'에서도 되풀이되었다. '공감'을 '정치'의 무대 위로 끌고 들어오면 자신들과 똑같이 공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 대해 관용이 없어지는 한편, '사이'를 두고 논의할 수 없게 된다. (152-153쪽)


요컨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법정에 들어가는 것은 자연적인 자아가 아니다. 법 앞에 드러내는 모습은 법에 의해 만들어지고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인격(person)이다." persona를 벗겨내 버리면 남는 것은 권리와 의무가 없는 개인(individual)이며, 아마도 '자연인'일 것이다. 한마디로 본래적 의미의 인간(human being)이자 사람(homo)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는 노예처럼 법의 영역과 시민의 정치조직 외부에 놓은 사람을 의미하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존재다.

- 한나 아렌트, 『혁명론』(이 책 164쪽에서 재인용)


'자유의지'를 말할 때 우리는 타인의 강제나 압력에서 '자유로운' 의지 같은 것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사에서 전통적으로 문제 삼아온 '자유의지'는 그 이상의 것, 도는 그것과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자연계를 지배하는 물리적인 인과법칙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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