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은 얄궂다. 물리적으로는 가장 얇은 외피로 덮여 있으며, 가장 깊은 입구이자 출구라 할 수 있는, 이 구(口)가 일단 충족되지 않으면 몸의 나머지 기관들이 제대로 일해주지 않는다. 시험에 떨어지고 사랑에 실패하고 굴욕적인 노동을 하고 불시에 사고를 당해 손발을 잃고 애착하는 이의 죽음을 겪고도, 사람은 밥을 먹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구차하고도 귀한 기관을 통해 먹고 마시고, 나와 남의 사정에 관하여 발설한다. 이러한 입을 얻어맞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심을 느끼며, 각별한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다. 먹는 입을 향한 주먹질은 먹지 말라는 의미이고, 말하는 입을 향한 주먹질은 닥치라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황정은, '입을 먹는 입' (28-29쪽)


특별한 일이랄 것이 없는, 평범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독서실에 있었고, 밀린 방학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Axt』 5호를 읽기 시작했고, 『시지프 신화』의 두 번째 장을 읽었고, 『불안의 책』은 200번대에 진입한 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마지막 유세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누가 당선될지 알 것 같았고, 뉴스는 암담하거나 시답잖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집에 와서 오로지 황정은 작가의 글을 보기 위해 구입한 『문학동네 61호』를 폈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정치적 소견이나 성향을 드러내는 일을 기피했다. 이는 사람들이 정치적 성향이라는 잣대를 내세워(때로는 휘두르기도 한다) 사람을 판단하는 이분법적 잣대가 싫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점점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가 그런 화제를 피하는, 그리고 그런 화제에 무관심한 것이 당연한 것 같은 분위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가끔 나의 입, 누군가의 입을 향한 '주먹질'이 생각났던 것 같다. 이 안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하나의 주먹이 되고, 주먹에 맞기 싫어서 입을 다물고, 주먹은 말이 없어 무용해진 입을 먹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감옥(監獄)으로 자진해'(이성복, '1959년') 가는 꼴이었다.


무관심이, 침묵이 미덕인 양, 쿨한 것처럼 치부될 때도 있었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이 때탄다고 말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것이 유효해 보일 때가 있지만.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희대의 오지라퍼'(구병모, '이창')로 손가락질받던 시기는 지났지만, 이미 먹힌 입은 뚫리지를 않는다.


일인시위용 피켓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동생에게 그 자리에 같이 가자고 말하자 단번에 싫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곰곰 생각하더니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용산이 참혹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점을 알며 그러한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기는 무섭다고 말한다. (47쪽)


'입을 먹는 입'은 용산 참사를 다룬 일종의 르포다. 글의 말미에서 황정은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침묵과 부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고. 지금 이 세계에 '침묵으로써 일조했던 것'은 아니냐고 묻는다. 2016년 현재, 내 입은, 안녕하지 않았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넓지 않다. 그리고 깊지도 않다. 그런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길어졌다. 손이 가는 대로 써 버렸는데, 어쩌면 주먹보다 무서운 것은 내 입에 주먹이 날아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내 입을 먹은 것은 내 입일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내일 선거가 나의 일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나는 집에서 1분 거리에 있는 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하고,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고,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잠을 잘 것이다. 없는 입을 앙 다문 채. 당장 입을 되찾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작은 틈이나마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잠을 청해야겠다. 그리고 내일 내 입에 낼 그 틈이 여전히 '1959년'을 살고 있는 이 세계에도 틈을 내서, 다음에는 불만이 덜해진 선택지를 들고 나를 찾아왔으면 싶다. 물론, 주먹은 사양이다.


질문을 해보자.

그들의 국가와 당신의 국가와 나의 국가가 다른가.

어떤 대답을 고를까.

같아도 문제, 달라도 문제 아닌가.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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