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 2014년 15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문학의숲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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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유감이지만, 별 3개 중 2개는 황정은의 몫이고 나머지 하나는 윤성희의 몫이다. 심지어 윤성희의 작품은 수상작도 아닌, 기수상작가 자선작이었다... 내가 여태껏 읽은 문학상 단편집 중에 제일 많은 단편을 실었는데, 결과가 이렇다니...

 

김사과의 단편을 이번에 처음으로 읽었는데, 감상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상하다. 읽는 내내 맥을 잡는 게 어려워서 힘들었다. 그래도 서사가 흐릿한 소설의 맥을 나름 잘 짚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이 오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날의 혼잡한 현실이 이런 식으로 구현된 걸까, 하는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박솔뫼의 '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은... 김사과의 작품보다 더 이상했다. 도대체, 왜 작가는 쉼표를 단 한 번도 안 쓴 걸까. 그의 요상한 문체가 일상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는 사실의 반영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래도 그의 문장은 여전히 나에게 낯설다. 이 두 작품을 읽으면서 예전에 이상의 '종생기'를 읽던 기억이 떠오르는 건 그 난해함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이상은 '날개'에서 아스피린과 아달린의 비유를 잘 녹여냈는데, 이들의 작품에도 그런 상징이 숨어있는 걸까. 그걸 못 찾아내는 건, 나의 눈이 어두운 탓인가.

 

윤이형의 '러브 레플리카'는 소재와 이야기는 흥미로웠으나, 그것을 끝까지 끌고 가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행기 안에서의 그 일이 최경이 진짜 모습을 찾은 거라면, '나'는 왜 그 이후에 최경에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최경의 모습을 보면서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인간은 삶을 살면서 보고 들었던 모든 텍스트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런 얘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최경은 자신이 보았던 텍스트들을 남의 것인지도 모르게 자기화해 버리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그렇다면 비행기 안에서의 그 사건 이후의 그녀는, 자신의 고유한 텍스트를 찾았을까.

 

조해진의 '문래'가 끌리지 않았던 건, 내가 갖고 있는 자전소설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을 해 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은 자신의 세계,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이 빈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항상 한다. 물론 자전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쓴 좋은 소설들이 많이 있지만, 김원일의 '어둠의 혼'이 '도요새에 관한 명상'보다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듯, 나는 '문래'에 대해서도 그런 평가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천운영은 예전에 단편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가 인상적이어서 단편집 <바늘>과 <그녀의 눈물 사용법>, 장편 <잘 가라, 서커스>도 찾아서 읽었었는데, 실망도 그만큼 커서 한동안 찾아보지 않았었다. <생강>이 이근안을 다루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찾지는 않았었고... 그녀의 작품에는 어딘가에 집착하는 인물들이 자주 나온다. '바늘'도 그랬고,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도 그랬다. '다른 얼굴'에도 정원에 집착하는 한 여자가 나오는데, 여전히 그녀의 묘사는 섬세하고 치밀하다. 하지만 지갑 절도 사건 얘기는 왜 나온 걸까, 탈일상적인 그녀의 행동의 시발점 같은 거였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를 않는다.

 

최은미의 '백 일 동안'은 이야기 자체는 흥미로웠고, 전통적인 이야기의 틀을 가지고 있어서 빠르게 읽었는데, 마지막 결말 처리에서 실망을 했다. 너무 급작스럽기도 하고,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호하다. 인과응보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뻔한 의미가 되어버리니 그건 아닐 테고...

 

최제훈의 '단지 살인마'에서 나는 단지가 부사 '단지'인 줄 알았는데, 읽어보니 '단지(斷指)' 였다. 손가락을 자르는 연쇄살인이 엽기적이기도 했으나, 다 읽고 나서 어쩌면 연쇄살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편이 좀더 섬뜩하면서 의미있는 구조가 될 것 같다.

 

요즘은 모든 화제가 증폭되어 돌아다닌다. 이슈가 되는 검색어 하나를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쳐 보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비슷비슷한 기사들, 똑같은 사진들, 이를 퍼 나른 각종 웹 페이지가 끝없이 이어진다. SNS에서는 사람들의 한마디가, 그 한마디를 리트윗한 한마디가 미처 읽을 새도 없이 격류처럼 흘러간다. 정보의 망망대해로.

일말의 회의도 없이 계속되는 자기 복제. 정작 검색창에 쳐 넣은 단어는 한없이 가벼워져 휘발되는 느낌이다. 혹은 한없이 무거워져 제 무게에 압사되는 느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지우는 시스템이라...... 생각해 보면, 매우 윤리적인 소멸이다.

- 최제훈, 단지 살인마

 

윤성희의 단편은 읽을 때마다 항상 재미있다. 이 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건 뭐지하며 생각할 필요 없이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도 그랬고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도 그랬고, '모서리'도 그렇다. 소설이 재미있기만 하면 다냐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녀의 작품에서는 그렇다. 익살스러움을 즐기며 읽다보면 어느샌가 '찌질이'같은 인물들에게 눈길이 가게 되므로... 그녀의 단편에서는 항상 이야기 자체에 초점이 놓여지면서 흐르고, 등장인물들은 어딘가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하지만 힘든 현실을 견디고 있는 그런 사람일 것 같다. 여기에 황석영이 한국 명단편 101선에서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를 평한 내용을 잠시 인용한다. (한국 명단편 101선 10권에도 실려 있고 문학동네 네이버 까페에 가면 볼 수 있다.)

 

앞의 몇몇 작가들과 더불어 치열하고 날카로운 존재의 싸움터를 헤치고 나오려니 어느 동구 밖 나무 아래서 한가로이 쉬다 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윤성희의 단편들을 몇 편 읽고는 이내 원기를 좀 차리게 된다. 이번에는 그의 단편소설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를 읽어보자. 박민규의 파격적인 서사에 비해서 이번에는 소설의 격식을 좀더 갖추고 있으며, 재미있고 술술 잘 읽힌다는 공통점이 있다. 윤성희의 소설은 민담처럼 이야기가 그 주제이고 구성이며 형식이다. 한 페이지 속에서도 끊임없는 에피소드들이 발전하고 곁가지가 뻗어나가고 사건은 엉뚱하며 그 어떤 장면도―사실은 비약과 충격의 연속이지만―극적이지 않다. 그것은 민담에서처럼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윤성희의 이야기는 박민규의 ‘구라’와 목소리만 다를 뿐 비슷한 계통이다. 인물과 사건의 엉뚱함과 비약과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서는 인간의 생로병사는 그래서 익살스럽다. 박민규의 웃음이 블랙 유머 계통이라면 윤성희는 따뜻한 익살이다. 그의 소설들이 현대 도시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도 어느 오래된 저잣거리에서 벌어지는 옛날이야기 같은 인상이며 아련한 공동체적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주인공인 '염'의 엄마와 새아버지 이야기가 궁금하긴 하지만, 그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어서 언급 안했겠거니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불안한 20대를 지칭하는 것 같은 염과 조의 모습은 전혀 불안하지 않고 코믹하기까지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가 그냥 아르바이트 말고 부모님의 전 가게를 물려받기로 했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쓸쓸함도 그때뿐, 작가는 그것도 익살스럽게 넘겨버린다. 가끔씩 읽을 때면, 익살스럽게 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익살스럽게 쓰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왜 제목이 '모서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효석문학상 작품집을 처음으로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실망을 많이 해서 올해 작품집이 나와도 내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올해 작품집에는 황정은의 작품이 기수상작가 자선작으로 실릴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 말은 결국, 올해 작품집도 보게 되리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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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당일배송은 무섭다. 아침 10시에 주문한 책이 오후가 되니까 바로 도착했다. 서울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인데....

 

 

 

목차를 보면 진짜 구미가 당기는데, 아직 천명관의 인터뷰만 잠깐 읽고 읽지를 못했다. 하지만 천명관의 인터뷰는 뭔가 촌철살인과 같은 면이 있었다. 인터뷰가 두 달 전이었으니 신경숙 사태가 벌어지기 전일 텐데... 빨리 새 장편소설이 나왔으면 좋겠다.

 

 (아무리 예쁘게 놓아보려고 해도 안 된다. 이게 최선인 듯....)

 

되게 오랜만에 연필을 잡아봤는데, 뭔가 편안하면서 잘 써지는 것 같다. 연필에도 깨알같이 도끼 문양을 박아놨다. 연필잡고 공부하는 것도 오랜만이고...

 

정기구독 신청할까, 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데, 현재 내 재정 상태로는 <악스트>를 정기구독하면 월간 <책> 정기구독을 포기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듯하다. 둘 다 놓치기는 싫은데 이걸 어찌해야 하나... 하고 고민중. 하지만 이런 잡지가 나왔다는 것 자체로도 주목할 만한 일이고, 현재의 문단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악스트>를 받은 지는 일주일이 넘었다. 근데도 여태껏 읽은 게 인터뷰 하나라니, 나도 참 게을러졌다는 생각을 한다.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책을 열어보기란 정말 어렵다. 원래는 공부하면서 하루에 단편 하나씩은 읽으려고 했는데, 저녁에 읽으려고 하면 지쳐있기도 하고, 귀찮아지기도 하고 해서 자꾸 안 읽게 된다.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건 내 게으름에 대한 변명밖에는 되지 않는데도, 이것을 지키는 건 정말 어렵다. 덕분에 읽어야 할 책만 계속 쌓여간다... 

 

 

 

 

 

 

 

 

 

 

 

 

 

 

 

 

이효석문학상 작품집은 아직 단편 네 편이 남았는데, 아직까지 '누가'를 빼고는 와닿는 작품이 없다. 특히나 김사과와 박솔뫼의 단편은... 음... 나중에 다 읽고 리뷰 쓸 때도 얘기하겠지만 정말 이상하다.

<문장강화>는 현재 3장까지 읽고나서 답보 상태다. 읽으면 읽을수록 왜 사람들이 문장 공부의 바이블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정말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담긴, 교과서 같은 책인 것 같다. 얼른 마저 봐야 할 텐데...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전집을 살 때 문학동네 1년 정기구독권에 당첨이 됐는데, 저번에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보내더니 이번에는 이 책을 보냈다. 계간지도 열심히 안 읽고 있는데... 문학동네에서 대학소설 공모를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는데, 알았어도 사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앞에만 살짝 훑어봤는데, 기대라기 보다는, 뭔가 호기심이 생긴다. 위에 두 권 다 보면 이거부터 읽게 되겠지..

 

 

 

 

 

 

 

 

 

 

 

 

 

월간 <책>은 아직 6월호도 손을 못 댔는데, 7-8월 합본호가 와 버렸다. 점점 숙제가 되어가는 이상한 기분은 뭘까. 틈틈이 짬을 내서 읽어야 할 텐데 이것도 참...

 

 

 

 

 

 

 

 

 

 

 

 

 

 

 

사실 이효석문학상 작품집을 읽고 읽으려던 책은 <스토너>와 <제5도살장>이었다. 보네거트의 작품이 대부분 품절이나 절판된 상태이고, 이동진 씨도 <제5도살장>을 제일 좋아하는데 절판된 책이라 빨간책방에서 못 다루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다행히 도서관에는 책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직 못 읽은 것들이 수두룩한데 언제 찾아볼 수 있을지...

 

읽을 책을 정리해보고 나를 채찍질하려고 작성한 건데, 쓰면 쓸수록 막막하기만 하다. 어떻게 해야 시간을 잘 쪼개서 읽을 수 있을까... 공부를 하다가 고개를 들면 책들이 언제까지 안 읽고 냅둘 거냐고 질책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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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5-07-24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중도책상인가요? 책상이 깔끔하네요.

2015-07-24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4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4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4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4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24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붉은돼지 2015-07-24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악스트 책과 사은품 받고 페이퍼로 올리려고 이리놓고 찍고 저리놓고 찍고
이리저리 아무리 놓아봐도 왠지 구도가 안나와서
결국 페이퍼 작성 포기했던 기억이....ㅎㅎㅎㅎ

책상 위가 정갈합니다.^^

아무 2015-07-24 12:04   좋아요 0 | URL
이리저리 해봐도 다 마음에 안 들더라구요ㅠㅠ 그래서 저걸로 그냥 만족하기로.. ㅎㅎ
책상은... 저 때만 해도 깨끗했는데 지금은.. 그냥 웃지요 허허허
 
바벨
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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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없는 세상의 모습은 어떨까. 언어를 말할 수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세상. 입을 열면 목숨을 잃는 세상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정용준의 <바벨>은 언어가 없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여태껏 다른 소설들이 다루었던 디스토피아의 모습과는 다르다. 아마 그의 서정적이면서 시적인 문체가 결합했기 때문이 아닐까.

 

프롤로그에 제시된 아이라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이 언어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암시를 주지만, 이 동화가 보여주는 신비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바벨>의 시작은 매우 어둡고 암울하다. 아이라에서는 언어가 얼음이 되었지만, 언어를 말할 수 없는 바벨의 세계에서 언어는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펠릿으로 변한다. 처음에 펠릿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사전을 검색했을 때는 우라늄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이런 건가 했는데,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언어를 내뱉는 순간 언어는 펠릿이 되어 악취를 풍기며 인간의 주위에 고이고, 계속 말을 하는 인간은 펠릿에 둘러싸여 그 냄새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노아는, 베일에 둘러싸여 있다.

 

이야기는 정부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잡지 <횃불>의 편집장인 요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요나가 실제로 이 소설에서 취하는 액션은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 디스토피아를 다룬 여러 소설과는 달리, 그는 그저 사태를 관망하거나 서술할 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소설은 인류에게 닥친 재앙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보다 재앙과 대면한 인간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초점을 둔다. (근데 오늘날 현실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자꾸 겹쳐지는 건 왜일까?) 책을 읽는 독자는 요나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노아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하며 책을 읽어 나가지만(내가 책장을 넘기게 하는 동력이기도 했다), 소설은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내주지 않는다.

 

소설은 요나가 정부에 의해 수배되면서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듯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요나와 마리의 언어를 둘러싼 논쟁은 흥미로웠다.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서로가 보이는 의견의 대립점이 분명함에도 편안함을 느끼면서 가까워지는 지점에 눈길이 갔다. 물론 이 둘의 관계가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랬다. 특히나 두 인물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그들이 나누는 언어의 모습은, 해설의 한 꼭지 제목처럼 '언어를 만지는 언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나>에서 보여주었던 정용준의 문체, 너무나 아름답지만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그 문장은, <바벨>에 이르러서 그 완급이 어느 정도 조절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번에는 읽으면서 너무 지나친 비유다, 라는 불편함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역시 작가는 장편소설에서 빛을 발한다는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서사 역시 다음 내용을 확인하고 싶게끔 유혹하면서, 언어가 사라진 세계의 비극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아쉬운 건 '갑툭튀'한 마리와 요나의 관계 발전의 작위성과, 요나의 동생 룸의 역할이 잘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왜 룸이 노아에게 필요한 인물이었나 하는 점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사소하지만, 노아가 펠릿 실험에 실패한 것이 어떻게 세계에 여파를 끼치고 전 인류가 말을 할 때마다 펠릿이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계속 궁금증이 남아있다. 전체적인 내용과는 별로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정용준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의 결말은 암울하기도 하고, 허무주의적이기도 하다. 요나는 결국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끝까지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시민들의 저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고 요나를 둘러싼 사건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도 못한다. 이렇게 무력한 주인공, 아니 주인공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를 설정한 건 암울한 세계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을까.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처음으로 노아의 언어가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장이 반드시 있어야 했을까하는 의문이 많이 든다. 작가는 비극과 허무만이 존재할 뿐인 결말에서 '차가운 북풍을 뚫고 바다를 건너 기어이 고래의 배 속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을까.(고래의 배 속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는 '요나'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에필로그로 제시된 장은, 바벨의 세계와 격리되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인물이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말은, 왜 노아가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말을 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날 잡고 소설을 종일 읽은 것도 되게 오랜만인데, 역시 소설은(특히 장편은) 하루 날을 잡고 흐름의 끊김 없이 쭉 읽어내려가서 한 호흡에 끝내야 제격인 것 같다.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어 즐거웠고, <바벨>의 서사는 단편에서 보여주었던 위태위태함을 어느 정도 해소한 것 같아 좋다. 아무래도 언어가 물질화된다는 상상력이 나를 자극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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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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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의 단편은 '첫 번째 기념일'을 옛날에 읽었는데, 이 단편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택배원 얘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읽고 그냥 잊어버린 이름이었는데, 대학교에 입학한 뒤에 (다시)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통조림공장'을 읽었다. 줄거리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느낌은 정말 선명하다. 역겨움, 징그러움, 더러움. 읽고 나서 속이 굉장히 안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느덧 5년이 지나, 나는 그녀의 단편집 <아오이가든>을 집어들었다.

 

최근에 편혜영의 장편 <선의 법칙>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제목이 주는 끌림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읽으려면 먼저 이 작가가 어떤 글을 썼는지 봐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도서관에 들렀다. 초기작을 빌리려고 했는데, 장편은 다 빌려가고 없는 상태여서 이 책을 빌려서 읽었다. 편혜영의 작품세계에 대한 소문은 예전부터 많이 들어서, 벌써 5년이나 지났는데 나도 어느 정도 비위가 강해졌겠지...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징그럽고, 속이 안 좋았다.

 

괴기 소설,이라는 명칭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류의 소설군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한국문학에서 그런 괴기함을 다룬 소설을 찾기는 어렵다. 리얼리즘의 전통이 강한 탓인지, 환상성을 전면에 내세운 소설을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편혜영의 소설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설의 제목이 '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 랜드'였는데, '시체'와 '괴담'이야말로 아홉 편의 단편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다.

 

표제작 '아오이가든'을 읽으면서 자꾸 메르스가 생각나는 건 기분 탓일까? 역병이 돌아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 아오이가든의 모습이 메르스 사태가 터졌을 때 우리의 모습과 자꾸 겹쳐진다. 다만 그것이 더 징그럽고 역겨운 이미지로 형상화될 뿐... 9편의 단편에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작가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한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는 듯이.

 

예전에 정용준의 <가나>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불구성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그 불구성은 편혜영의 <아오이가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불구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기이하면서 역겹고, 공포스러운 세계와 인물들이 등장한다. 정용준의 소설이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불구자들을 다루었다면, 편혜영은 처음부터 불구성을 내포한 세계를 독자 앞에 들이민다. 그리고 독자는 읽는 내내 불편하고, 메스꺼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괴이한(더 심한 수식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세계가 현실에 대한 비유라면, 그렇게 징그럽고 역겹기까지 한 이미지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단면이라면, 우리는 현실의 역겨운 냄새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이 소설들에 나오는 인물들과 별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닐까.

 

읽으면서 '이게 뭐야?' 싶은 단편들도 여럿 있었고, 너무 더럽고 불쾌해서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적도 있었는데, 다 읽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한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아오이가든'과 '만국 박람회', '문득,'이 인상적이었고 '저수지'랑 '서쪽 숲'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읽어볼 것 같지는 않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비위가 굉장히 약하단 걸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에. 하지만 편혜영이 누구도 개척하지 않은 영역에 깃발을 꽂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선의 법칙>은 지금까지의 편혜영 작품과 많이 다르다는 얘기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가계는 여덟 달 만에 망했다. 단지 옆 가게라는 것 때문에 내개 몇 권의 책을 집어갈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 책은 가게 안에서 쓰레기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누가 올 아메리칸 걸을 죽였나`라는 제목의 추리 소설을 골랐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삼류 주간지의 헤드라인 같은 제목이었다. 가장 추리 소설다운 제목이기도 했다. 아무리 제목이 거창하더라도 결국 추리 소설의 핵심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누가` 멋진 그녀를 혹은 돈 많은 그를 죽였나가 그것이었다. `왜`가 없는 세상, 그게 바로 추리 소설의 세상이었다.
- `누가 올 아메리칸 걸을 죽였나`

만국 박람회는 나에게 있어서 첫번째 박람회였다. 개막일에 맞춰 물속에 잠긴 집으로 돌아가게 되건 말건 나는 박람회 개막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똑똑히 봐둘 작정이었다. 큰 칼로 명치를 잘라 뜸을 들이다 개의 숨을 끊는 삼촌에게 미래는 연필심처럼 가느다란 칼로 단번에 개를 죽일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이른바 세기의 마술사에게 미래란 검은 천이 없어도 자유자재로 속임수를 쓸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미래란...... 짐작할 수 없는, 내가 알 바 아닌 시간이었다.
- `만국 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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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미래 Kong's Garden K-픽션 6
황정은 지음, 전승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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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한국문학을 조금이나마 읽어온 바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한국문학은 역사적으로 장편보다 단편이 훨씬, 정말 훨씬 우세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대소설의 효시라고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이 장편소설이었지만, 이후에 발표된 작품들을 생각하면 역시 단편이다. 100년에 가까운 근현대 문학사에서 황석영은 101편을 집어냈지만, 이 목록에는 '이건 왜 빠졌지?'하는 의문이 남는 단편도 몇 편 있다. 그런데 만약 장편이라면? 카프처럼 사상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고르라고 해도, 50편도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근대문학의 태동기에 소설이라는 것이 신문지상에 게재되는 형식으로 발표되고, 출판사가 존립하기 어려운 시대에, 언제고 붙잡혀 갈 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편을 발표한다는 건 모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어디까지나 사견이다. 오류를 범한 것일지도) 그렇게 불운하게 가꾸어진 문단 시스템이 답습되어 오늘날 단편은 넘쳐나고 장편을 보기 힘든 풍경이 형성된 것이라고 보면 성급한 일반화일까?

 

갑자기 지루한 역사 얘기를 한 건, 이 'K-픽션' 시리즈가 단편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들어서다. 번역의 부담이라는 문제도 있겠으나, 장편으로 하더라도, 세계에 당당히 소개할 수 있을 만한 보편성을 갖춘 장편소설이 많이 있을까...하는 회의가 들어서다. 단편은 삶의 한 단면을 구체적으로 포착하고, 장편은 삶의 총체적인 양상을 다룬다는 일반론적인 정의를 생각했을 때, 한국의 장편소설 중에 정말 그런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장편은 많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게 많지 않다고 대답하면, 한국문학을 무시하는 발언이 될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노블리스트는, 있을까.

 

 

 

 

 

 

 

장편소설에 대한 고민은 잠시 접고, K-픽션 6번째 책인 황정은의 '양의 미래'를 이야기하려 한다. 영어 제목은 'Kong's Garden'인데, 왜 제목이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아예 감도 안 잡힌다. 하지만 디자인은 정말 마음에 쏙 들었는데, 책이 진짜 예쁘고 깔끔하게 나왔다. 예전에 양장본이 한창 유행할 때, 굳이 양장으로 안 해도 될 법한 분량의 책도 양장으로 만들어서 짜증나는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시리즈의 책은 정말 심플하게 나왔다.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을 만큼 아담한 사이즈기도 하고. 다만 아쉬운 건 사진처럼 한글 한 쪽, 영어 한 쪽으로 편집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래 한글본 영어본 다 나온 건 저렇게 되어 있나? 차라리 한글만 쭉 하고 뒤에 영어를 쭉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이 작품은 조금 있다가 읽어야지, 하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충동적으로 구매를 해버렸다... 그리고 오자마자 읽어버렸다... 이 단편에서 황정은은 정말 말도 안되게 쿨한, 아니 쿨하다 못해 차가운 문장을 구사하며 이 세상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걸 드러내는 듯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20대 여자이지만, 대학생이 아닌 고졸 출신이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20대를 다룰 때에는 마치 20대라는 단어에 함의된 의미 자질인 양 대학생 혹은 대졸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데, 황정은은 20대 중에서도 소수인, 해설을 빌리자면 '프레카리아트'를 화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 사람들, 심지어 같은 나이의 청년들마저도 그들에게 편견의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재는 포기했던 학위를 받으려고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적어도 학사인 나라에서 학사도 받지 못한 남자는 곤란하다, 라는 것을 절감했다, 라고 호재는 말했는데 어떤 상황에서 그런 것을 절감했는지는 끝까지 말하려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나는 다만 그렇게 생각했고 호재 때문에 조금 마음이 아팠다.  (24쪽)

 

그렇다고 학위를 받은 자는 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가. 그것은 현실에서도, 이 소설 안에서도 아니다. 더욱이 화자의 눈에 비친 그들은, 같은 운명에 속해 있는지도 모르지만 결국 자신과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에 불과하다. 그들은 '아무것도 주의 깊게 듣지 않'으므로.

 

재오는 나보다 다섯 살이 어렸는데 명문대를 졸업한 고시생이었다. 본격적으로 국가고시를 준비하기 전에 용돈이나 벌려고 서점에 들어왔다고 그는 말했다. (...) 쾌활한 편이었는데 말하다 보면 이상한 방식으로 대화가 꼬였다. 재오는 아무것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하지 않은 걸 했다고 대답하거나 한 것을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일도 많았다. 자기가 모르는 것에 관해서도 안다고, 자기가 아는 것이 옳다고 무섭게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은 몰랐고 틀렸다는 게 증명되면 여태까지의 고집이 다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그런가 보네, 하고 말았다.   (36쪽)

 

재오의 '그런가 보네' 인식은 어쩌면 '난 곧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야'라는, 학위를 가진 자의 현실도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에게 재오는, 바쁜 시기에 통보도 없이 알바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달라고 협박하는 재오는 자신을 생각해주지 않는 타인에 불과하다.

 

소설의 가장 큰 사건인 소녀의 실종은 소설의 후반부나 되어서야 나온다. 해설에서는 이 실종 사건을 통해 '나'로 대표되는 '비인들에게 타인에 대한 윤리나 책임 등을 묻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묻고 있다고 했으나, 내 생각에는 소녀의 실종 역시 '나'에게는 별다를 게 없는 일로 비쳐진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사건 이후 온갖 질문의 대상이 된 '나'의 문장은 여전히 차갑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터널이라는 것이 있든 없든,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낙하하다'보다 더한, 염세적 세계관의 정점을 찍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는 없고, 지금과 다를 것 없는 삶만이 있을 뿐이라는 메시지를 이렇게 담담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전달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더 안타까운 건 너무 허무주의 아니냐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만드는, 한숨부터 나오는 뉴스가 넘치는 현실일 것이다. 문득 박솔뫼의 '우리는 매일 오후에'의 그 문장이 생각난다. '우리에게 예언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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