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
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어가 없는 세상의 모습은 어떨까. 언어를 말할 수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세상. 입을 열면 목숨을 잃는 세상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정용준의 <바벨>은 언어가 없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여태껏 다른 소설들이 다루었던 디스토피아의 모습과는 다르다. 아마 그의 서정적이면서 시적인 문체가 결합했기 때문이 아닐까.

 

프롤로그에 제시된 아이라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이 언어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암시를 주지만, 이 동화가 보여주는 신비로운 분위기와는 달리 <바벨>의 시작은 매우 어둡고 암울하다. 아이라에서는 언어가 얼음이 되었지만, 언어를 말할 수 없는 바벨의 세계에서 언어는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펠릿으로 변한다. 처음에 펠릿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사전을 검색했을 때는 우라늄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이런 건가 했는데,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언어를 내뱉는 순간 언어는 펠릿이 되어 악취를 풍기며 인간의 주위에 고이고, 계속 말을 하는 인간은 펠릿에 둘러싸여 그 냄새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노아는, 베일에 둘러싸여 있다.

 

이야기는 정부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잡지 <횃불>의 편집장인 요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요나가 실제로 이 소설에서 취하는 액션은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 디스토피아를 다룬 여러 소설과는 달리, 그는 그저 사태를 관망하거나 서술할 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소설은 인류에게 닥친 재앙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보다 재앙과 대면한 인간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초점을 둔다. (근데 오늘날 현실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자꾸 겹쳐지는 건 왜일까?) 책을 읽는 독자는 요나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노아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하며 책을 읽어 나가지만(내가 책장을 넘기게 하는 동력이기도 했다), 소설은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내주지 않는다.

 

소설은 요나가 정부에 의해 수배되면서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듯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요나와 마리의 언어를 둘러싼 논쟁은 흥미로웠다.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서로가 보이는 의견의 대립점이 분명함에도 편안함을 느끼면서 가까워지는 지점에 눈길이 갔다. 물론 이 둘의 관계가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랬다. 특히나 두 인물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그들이 나누는 언어의 모습은, 해설의 한 꼭지 제목처럼 '언어를 만지는 언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나>에서 보여주었던 정용준의 문체, 너무나 아름답지만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그 문장은, <바벨>에 이르러서 그 완급이 어느 정도 조절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번에는 읽으면서 너무 지나친 비유다, 라는 불편함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역시 작가는 장편소설에서 빛을 발한다는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서사 역시 다음 내용을 확인하고 싶게끔 유혹하면서, 언어가 사라진 세계의 비극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아쉬운 건 '갑툭튀'한 마리와 요나의 관계 발전의 작위성과, 요나의 동생 룸의 역할이 잘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왜 룸이 노아에게 필요한 인물이었나 하는 점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사소하지만, 노아가 펠릿 실험에 실패한 것이 어떻게 세계에 여파를 끼치고 전 인류가 말을 할 때마다 펠릿이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계속 궁금증이 남아있다. 전체적인 내용과는 별로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정용준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의 결말은 암울하기도 하고, 허무주의적이기도 하다. 요나는 결국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끝까지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시민들의 저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고 요나를 둘러싼 사건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도 못한다. 이렇게 무력한 주인공, 아니 주인공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를 설정한 건 암울한 세계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을까.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처음으로 노아의 언어가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장이 반드시 있어야 했을까하는 의문이 많이 든다. 작가는 비극과 허무만이 존재할 뿐인 결말에서 '차가운 북풍을 뚫고 바다를 건너 기어이 고래의 배 속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을까.(고래의 배 속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는 '요나'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에필로그로 제시된 장은, 바벨의 세계와 격리되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인물이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말은, 왜 노아가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말을 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날 잡고 소설을 종일 읽은 것도 되게 오랜만인데, 역시 소설은(특히 장편은) 하루 날을 잡고 흐름의 끊김 없이 쭉 읽어내려가서 한 호흡에 끝내야 제격인 것 같다.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어 즐거웠고, <바벨>의 서사는 단편에서 보여주었던 위태위태함을 어느 정도 해소한 것 같아 좋다. 아무래도 언어가 물질화된다는 상상력이 나를 자극한 것이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