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미래 Kong's Garden K-픽션 6
황정은 지음, 전승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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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한국문학을 조금이나마 읽어온 바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한국문학은 역사적으로 장편보다 단편이 훨씬, 정말 훨씬 우세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대소설의 효시라고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이 장편소설이었지만, 이후에 발표된 작품들을 생각하면 역시 단편이다. 100년에 가까운 근현대 문학사에서 황석영은 101편을 집어냈지만, 이 목록에는 '이건 왜 빠졌지?'하는 의문이 남는 단편도 몇 편 있다. 그런데 만약 장편이라면? 카프처럼 사상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고르라고 해도, 50편도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근대문학의 태동기에 소설이라는 것이 신문지상에 게재되는 형식으로 발표되고, 출판사가 존립하기 어려운 시대에, 언제고 붙잡혀 갈 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편을 발표한다는 건 모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어디까지나 사견이다. 오류를 범한 것일지도) 그렇게 불운하게 가꾸어진 문단 시스템이 답습되어 오늘날 단편은 넘쳐나고 장편을 보기 힘든 풍경이 형성된 것이라고 보면 성급한 일반화일까?

 

갑자기 지루한 역사 얘기를 한 건, 이 'K-픽션' 시리즈가 단편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들어서다. 번역의 부담이라는 문제도 있겠으나, 장편으로 하더라도, 세계에 당당히 소개할 수 있을 만한 보편성을 갖춘 장편소설이 많이 있을까...하는 회의가 들어서다. 단편은 삶의 한 단면을 구체적으로 포착하고, 장편은 삶의 총체적인 양상을 다룬다는 일반론적인 정의를 생각했을 때, 한국의 장편소설 중에 정말 그런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장편은 많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게 많지 않다고 대답하면, 한국문학을 무시하는 발언이 될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노블리스트는, 있을까.

 

 

 

 

 

 

 

장편소설에 대한 고민은 잠시 접고, K-픽션 6번째 책인 황정은의 '양의 미래'를 이야기하려 한다. 영어 제목은 'Kong's Garden'인데, 왜 제목이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아예 감도 안 잡힌다. 하지만 디자인은 정말 마음에 쏙 들었는데, 책이 진짜 예쁘고 깔끔하게 나왔다. 예전에 양장본이 한창 유행할 때, 굳이 양장으로 안 해도 될 법한 분량의 책도 양장으로 만들어서 짜증나는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시리즈의 책은 정말 심플하게 나왔다.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을 만큼 아담한 사이즈기도 하고. 다만 아쉬운 건 사진처럼 한글 한 쪽, 영어 한 쪽으로 편집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래 한글본 영어본 다 나온 건 저렇게 되어 있나? 차라리 한글만 쭉 하고 뒤에 영어를 쭉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이 작품은 조금 있다가 읽어야지, 하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충동적으로 구매를 해버렸다... 그리고 오자마자 읽어버렸다... 이 단편에서 황정은은 정말 말도 안되게 쿨한, 아니 쿨하다 못해 차가운 문장을 구사하며 이 세상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걸 드러내는 듯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20대 여자이지만, 대학생이 아닌 고졸 출신이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20대를 다룰 때에는 마치 20대라는 단어에 함의된 의미 자질인 양 대학생 혹은 대졸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데, 황정은은 20대 중에서도 소수인, 해설을 빌리자면 '프레카리아트'를 화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 사람들, 심지어 같은 나이의 청년들마저도 그들에게 편견의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재는 포기했던 학위를 받으려고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적어도 학사인 나라에서 학사도 받지 못한 남자는 곤란하다, 라는 것을 절감했다, 라고 호재는 말했는데 어떤 상황에서 그런 것을 절감했는지는 끝까지 말하려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나는 다만 그렇게 생각했고 호재 때문에 조금 마음이 아팠다.  (24쪽)

 

그렇다고 학위를 받은 자는 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가. 그것은 현실에서도, 이 소설 안에서도 아니다. 더욱이 화자의 눈에 비친 그들은, 같은 운명에 속해 있는지도 모르지만 결국 자신과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에 불과하다. 그들은 '아무것도 주의 깊게 듣지 않'으므로.

 

재오는 나보다 다섯 살이 어렸는데 명문대를 졸업한 고시생이었다. 본격적으로 국가고시를 준비하기 전에 용돈이나 벌려고 서점에 들어왔다고 그는 말했다. (...) 쾌활한 편이었는데 말하다 보면 이상한 방식으로 대화가 꼬였다. 재오는 아무것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하지 않은 걸 했다고 대답하거나 한 것을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일도 많았다. 자기가 모르는 것에 관해서도 안다고, 자기가 아는 것이 옳다고 무섭게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은 몰랐고 틀렸다는 게 증명되면 여태까지의 고집이 다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그런가 보네, 하고 말았다.   (36쪽)

 

재오의 '그런가 보네' 인식은 어쩌면 '난 곧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야'라는, 학위를 가진 자의 현실도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에게 재오는, 바쁜 시기에 통보도 없이 알바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달라고 협박하는 재오는 자신을 생각해주지 않는 타인에 불과하다.

 

소설의 가장 큰 사건인 소녀의 실종은 소설의 후반부나 되어서야 나온다. 해설에서는 이 실종 사건을 통해 '나'로 대표되는 '비인들에게 타인에 대한 윤리나 책임 등을 묻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묻고 있다고 했으나, 내 생각에는 소녀의 실종 역시 '나'에게는 별다를 게 없는 일로 비쳐진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사건 이후 온갖 질문의 대상이 된 '나'의 문장은 여전히 차갑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터널이라는 것이 있든 없든,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낙하하다'보다 더한, 염세적 세계관의 정점을 찍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는 없고, 지금과 다를 것 없는 삶만이 있을 뿐이라는 메시지를 이렇게 담담하게, 그리고 무심하게 전달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더 안타까운 건 너무 허무주의 아니냐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만드는, 한숨부터 나오는 뉴스가 넘치는 현실일 것이다. 문득 박솔뫼의 '우리는 매일 오후에'의 그 문장이 생각난다. '우리에게 예언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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