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법칙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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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무수히 많은 점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을 인생에 비유할 때, 점은 인생에서의 걸음 혹은 자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편혜영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선의 법칙, 삶의 법칙은 무엇일까.

 

이 소설은 지금껏 작가가 썼던 그로테스크한 작품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핍진하게 보여주는, 그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생의 파국에 현재의 점을 찍은 인물들을 제시한다. 윤세오, 신하정, 이수호. 삶의 극한 중 한 부분에 도달한 그들의 인생은 어느 막다른 곳에 막혀 더이상 그려질 수 없는 선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윤세오와 이수호는 어느 방향을 향해 다시 점을 찍어 나가고 있나. 어떤 선을 그리고 있나. 사실 그것이 잘 보이지 않아 안타까우면서도 어렵기도 했다.

 

작품은 윤세오와 신기정, 그리고 중반부터는 이수호의 모습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면서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그려지던 그들의 선이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아버지를 잃은 윤세오는 이수호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삶을 버텨나가는, 가까스로 그려지는 점을 찍고 있다. 이 복수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를 응징하겠다는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런 목표라도 갖지 않고서는 도저히 선을 이어나갈 수 없는 그의 몸부림이다. 그래서 더 애잔하고, 비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윤세오가 복수하려는 이수호 역시 윤세오가 생각하는 '갑'은 아니었다. 생의 조건, 자신에게 부여된 길을 따라 점을 찍다보니 방향을 돌릴 수 없는 선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삶은 직선의 모습을 닮았다. 다른 방향에는 눈조차 돌릴 수 없는 외길을 걷는 직선.

 

신기정은 이들과 다르다. 학교에서 원도준과의 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지만, 그녀의 삶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처절하지도 절박하지도 않은 선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녀가 그리는 선보다, 그녀의 동생인 신하정이 그려왔던 선이 중요하다. 신기정이 등장하는 장면 역시 본인의 삶보다 동생이 어떤 선을 그렸는지 추적하는 것에 서사가 집중되어 있다. 자신의 가족이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윤세오와 닮았지만, 굳이 필요한 인물이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그리고 있는 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는 것 같다. 다단계에 대한 서술은 실제 경험이 반영된 건가 싶을 만큼 생생하고, 그 과정에서 교차하는 윤세오와 조미연, 부이, 신하정의 선은 불안하다. 어떻게 그어야 할지 몰라 삐뚤삐뚤해진 선처럼. 그렇지만 윤세오의 다단계 체험과 현재는 한데 엮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아쉬웠다. 신기정 역시 마찬가지. 선이 품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하는 의문도 해결되지 않아서(실제 작품에는 선에 대한 얘기가 없다), 왜 제목을 '선의 법칙'이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선의 법칙은 무엇이었을까. 어디로 갈지 모르는, 방향성을 상실한 젊은이들의 선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문학동네 여름호에 실린 인터뷰를 하루빨리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집에 내려가서 보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덧) 원래 소설을 읽을 때 인물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물론 한계가 있다. 일곱 명 이상으로 넘어가면 계속 찾아봐야 한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읽을 때 힘들었나... 아냐 그건 애칭이 하도 많아서 그랬지), 이 소설에서는 인물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지금 이 글을 쓸 때도 순간 신하정의 이름을 잊어버려서 책을 다시 봤다. 왜 이리도 이름이 안 들어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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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려는지 습기 찬 바람이 불어 재가 날았다. 상자를 들고 검은 집을 천천히 돌아봤다. 이곳에는 지난 시간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불에 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많은 날이 여기에 있었다. 그것들도 불에 탔다. (64p)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 벗어나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던, 벗어나 도달한 곳이 다시 벗어나야 할 곳이 되던 시절, 밤과 낮이 같고 여름과 겨울이 같고 오늘과 내일이 같은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과 별다르지 않았다. 당시는 그걸 몰랐다. 생의 가장 참혹한 시기를 지나는 줄 알았다. 그 시절을 건너고 나면 또다른 시절을 건너기 위해 발목을 적셔야 한다는 걸 알 수 없었다. (136p)

그 눈빛을 품고 지낸 사 년간, 시간은 참으로 울퉁불퉁하게 흘러갔다. 시간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었다. 그때도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뭉텅 잘려나가게 될 것을, 그 삶이 버려지는 게 아니라 나머지 삶에 영영 덧씌워지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174p)

그곳에 있을 때는 실패가 분명함에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그럭저럭 유지하는 게 더 실패하지 않는 일인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성공이라고 여겨온 것도 보잘것없었다. 표면장력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무지개 빛깔의 얇은 막과도 같았다. 그때는 아무리 얇을 지라도 그것을 유지하고 싶어 여러모로 애썼다. (2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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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강화> 제4강 중 서간문 꼭지에서..

이만 총총... 나는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게 얼마 안 된 줄 알았는데 백철이 쓴 걸 보니 유서깊은 표현이었나보다... 근데 자꾸 볼 때마다 실소가 새어 나오는 건 왜일까?

생각해보니, 난 예전에 하성란의 `그 여름의 수사`도 이렇게 끝나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총총총총총총이만총총` 이었던 것 같은데..

오래전 책이라 예상치 못했는데 등장한 귀여운 표현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만 집에 가야겠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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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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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하우스>의 주인공 하우스, 그리고 퀸시 사이의 공통분모는 바로 '마약'이다. 고등학교 화학 교사였던 월터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가족들에게 돈을 남겨주고 떠나기 위해 자신의 옛 제자 제시와 함께 마약 제조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마약을 제조하는 일 자체에 중독되어 버리고, 이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합리화 기제로 전락했고, 그는 마약 제조만이 자신의 실존을 확인시켜 주는 듯 마약 요리(cooking)에 집착했다. 퀸시의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이하 <고백>)을 읽으면서 월터를 떠올린 이유는, 마약 제조에 자부심을 넘어 장인 정신까지 느끼는 월터의 모습이 퀸시와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Breaking Bad Season3 ep4. 'Green Light')

 

 

<고백>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고하는 제1부과 아편을 복용하게 된 시기를 다룬 제2부, 그리고 부록으로 되어 있다. 1장은 아편 복용 이야기를 하기 전 자신이 아편을 복용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기 위한 장인데, 이 부분은 사실 잘 읽히지가 않았다. 퀸시의 어린 시절은 흥미로웠지만... 이 책의 본격적인 정수는 2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1804년 치통을 이겨내기 위해 처음으로 아편을 복용한 퀸시는 아편이 주는 놀라운 쾌감에 반하여 아편쟁이가 되었는데, 여기서 퀸시는 아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아편의 쾌락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그 중에서 내 이목을 끌었던 부분은 음악에 대한 부분이었다.

 

아편은 정신 활동을 크게 증가시키기 때문에, 당연히 음악과 관련된 그 특별한 형태의 정신 활동-우리는 이 활동을 통해 기본적인 소리를 원료로 하여 정교한 지적 쾌락을 만들어낼 수 있다-도 대체로 등장시킨다. (...)

정교한 화음의 코러스가 아름다운 무늬를 넣은 벽걸이처럼 내 모든 과거를 내 앞에 펼쳐놓았다고 말하면 충분하다. 지나온 내 인생은 기억의 작용으로 상기된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떠오른 것처럼 내 앞에 펼쳐졌다. 과거를 곰곰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괴롭지 않았지만, 지난 사건들의 세부는 지워졌거나 몽롱한 추상으로 융합되었고, 과거의 열정은 고양되고 정화되고 승화되었다. 5실링만 내면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98p)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발휘했던 퀸시에게 아편은 자신의 지성을 더욱 자극시키고 그의 열정을 북돋아준 기폭제로 작용한 듯하다. 저 부분을 보면서 어린 시절 한 번뿐인 삶에서 한 번쯤은 마약의 느낌을 경험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일이 다시 떠올랐지만, 이미 <브레이킹 배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기에 나는 얼른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고백>이 당시의 아편 중독을 부추겼다는 비판이 나온 것이 아닐런지. <고백>을 읽고 감명받았다는 보들레르도 아편을 탐닉하는 퀸시의 모습에서 강렬하게 살았던 인생의 아름다움을 본 것이리라. 이런 그의 아편 예찬은 뒤로 갈수록 더욱 강렬하다.

 

오, 공정하고, 교묘하고, 강력한 아편이여!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마음에도, 결코 치유되지 않을 상처에도, "정신을 반역으로 유도하는 고통"에도 위안을 가져다주는 아편이여. 강렬한 설득력을 가진 아편이여! 뛰어난 수사법으로 분노에 찬 결심을 슬며시 훔치는 아편이여. (105p)

 

찬사는 뒤 페이지까지 이어지지만 생략하기로 하고, 2부의 '아편의 쾌락'이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1813년 그를 덮친 위장염으로 인해 그는 아편 중독에 빠진다. 1804년부터 1812년까지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을 복용하며 그 쾌락을 즐기던 프로페셔널한 마약쟁이는, 궁핍한 어린 시절의 상흔에서 발생한 위장염의 고통으로 인해 마약 중독자가 되어버렸다. '아편의 고통'에서는 아편 중독이 그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아편 중독의 고통에 빠진 퀸시는, 이제 월터의 모습을 잃고 통증을 피하기 위해 바이코딘을 사탕처럼 먹는 괴짜의사 하우스가 되었다.(하우스를 본 사람은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으나, 고통받는 퀸시의 모습에서 나는 모든 통증을 피하기 위해 바이코딘을 복용하는 하우스가 떠오른다)

 

 

(House Season6 ep1. 'Broken')

 

 

'아편의 고통' 장에서 퀸시는 아편 중독으로 인한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자신의 정신이 어떻게 빛을 잃었는지에 초점을 둔다. 통증을 이겨내기 위해 복용하기 시작한 아편은 온갖 망상과 악몽을 낳았고, 그것은 그의 정신을 갉아먹으며 학문적 열정마저 잃게 했다. 악몽을 묘사하는 그의 묘사는 너무나도 생생해서, 지독히도 끔찍한 고통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2부의 마지막에서 그는 아편 중독을 극복한 듯 이야기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부록은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위통으로 인해 오는 고통이 너무나 극심했음을 말해준다. 그가 쓰다가 보내지 못했다는 편지에는 그 고통이 너무나 잘 드러나 있다.

 

아편의 지배 아래에서 꼬박 1년 동안 나에게 유입된 생각보다 지금 한 시간 동안 나에게 흘러들어오는 생각이 훨씬 많다고 나는 단언합니다. 아편 때문에 10년 동안 동결되었던 생각들이 옛날이야기에도 나오듯 이제 단번에 녹아버린 것 같습니다. (...) 나는 육체적 고통과 수면부족으로 지쳐 있지만, 2분도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177p)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고백>은 읽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글의 전개가 정연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고 퀸시가 그때그때 떠올렸던 생각들이 즉흥적으로 개입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콜리지의 말을 빌리자면 '간절하면서도 지지부진하고, 너무나 정확성을 기한 나머지 혼란에 빠지고, 합리적인 동시에 미궁적'인 그의 문체는, 때때로 독자를 미궁 속에 빠져들게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미묘하게 어울리는 것은 그의 문장이 가지고 있는 어떤 힘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낭만파 문인들에게 영향을 받았을 그의 낭만주의적인 색채와(특히 워즈워스에 대한 퀸시의 찬사는 그의 시를 수없이 인용한 것에도 알 수 있다) 표현들은 아편의 환희와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아마도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 책을 남아있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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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서평은 '책의 내용에 대한 평'이라는 뜻이다. 위키백과에는 '일반적으로 간행된 책을 독자에게 소개할 목적으로 논평이나 감상 등을 쓰는 문예 평론의 한 형식'이라고 나온다. 이것만 가지고 보았을 때, 서평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소개'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평과 비평의 차이는 무엇일까. 비평을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찾으면 '문학작품을 정의하고 그 가치를 분석하며 판단하는 것'이라는 정의가 맨 처음 나오는데, 그렇다면 서평과 비평을 구분짓는 기준은 소개 외에는 없는 건가. 그리고, 서평은 어떤 글이어야 할까. 어떤 글이어야 좋은 서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평의 시대가 가고 서평의 시대가 왔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비평이 그만큼 독자들과 유리되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혔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서평은 비평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걸까. 좋은 서평이라 함은 소개하는 책을 읽어보고 싶게끔 하는 매력을 갖춘 글이어야 할 텐데, <악스트>에 실린 서평들은 그런 매력을 가지고 있나. '어려워요!'라고 말하는 독자에게 '그러면 공부를 더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서평의 일인가.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 지식이 부족한 탓인가. 서평을 쓴 평론가, 작가, 번역가들이 서평을 비평처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현재 서평을 다 읽고 천명관의 인터뷰까지 읽었는데, 잡지에 실린 열네 편의 서평 중 내 이목을 끌었던, 그래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서평은 그리 많지 않다. 서평의 내용이 어려워서 따라가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하나를 꼽자면 <구의 증명>을 다룬 송지현의 서평이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최진영이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으므로. 외국문학을 다룬 서평 중에는 정영목 번역가의 서평이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몇몇 서평들은, 서평 자체가 어렵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쉽기도 하고, 서평과 비평을 가르는 경계가 단순히 분량만은 아닐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지돈은 지난 번에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많이 실망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호기심의 영역 안에 있는 작가인데, 이번 서평을 보면서 작가가 지향하는 바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정지돈과 박솔뫼가 같이 서평을 쓴 걸 보니 김태용도 후장사실주의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에서 추상회화의 전통은 너무나 익숙한 형태로 관람객에게 안착했다. 추상뿐 아니라 수많은 형태로 가지를 쳐서 다양하게 변모했다. 그런데 소설은 여전히 구상의 단계를, 그것도 단순하고 선형적인 구상의 우물에 고여 있다. 어떤 소설가들이 어떤 시기 구상을 벗어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독자만 잃었다.

- 정지돈, '리뷰 급구' 중에서

 

 

정지돈과 박솔뫼의 서평을 보면 김태용의 <벌거숭이들> 역시 굉장히 난해하고 접근하기 어려울 작품일 것이 확실한데 이상하게 읽고 싶어지는 이 기분은 뭘까. 고생길이 훤할 것이 보이는데도 묘한 끌림에 한 걸음씩 나아가는 느낌이 들어 뭔가 홀린 기분이 든다.

 

천명관의 인터뷰는 흥미롭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작가 천명관이 어떤 사람인지 단서를 던져주는 것 같아 그랬을 것이다. 프레데리크 시프테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을 인용하며 말했듯이, 철학(문학도 포함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이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저자의 생의 정황까지 드러나야 하는 것이므로. 그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대중의 무분별한 호기심이 아닌, 저자들의 세계를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하나의 창구가 될 것이므로.

 

자신이 문단과 문단 바깥의 경계에 있다고 말하는 천명관의 한국 문단에 대한 분석은 신랄하면서도 시원하다. 그 안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의 글을 쓸 따름이다. 인터뷰를 다 읽고 내가 들었던 생각은, 이 사람은 소설이라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 '프로'구나... 하는 것이었다.

 

문학은 종교가 아니다. 숭고한 신념이 필요한 게 아니라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말 중에 조이스 캐롤 오츠의 말이 있다. 문학에 예술만 있고 기술이 없다면 개인적인 일일 뿐이다. 반면에 기술만 있고 예술이 없다면 그것은 밥벌이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의 신념』에 나오는 말인데 여기서 기술(Craft)은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라 오래 축적된 장인적 기술, 즉 대장장이가 쇠와 불을 다루는 기술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문학에도 그런 기술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한국에서 문학은 종교처럼 숭고한 태도와 정신적 가치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밥벌이는 천한 일이고 예술은 숭고하다는 식의. 이런 분위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 천명관+정용준, '육체소설가의 9라운드' 중에서

 

 

어쩌면 문학을 대하는 이런 태도가 오늘날 독자들에게 천명관하면 기대하게 되는, 하나의 보증수표를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를 이을 보증수표는, 과연 나올까.

 

실려있는 서평에 대한 아쉬움과, 서평이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품으며, 이제 남아있는 소설들을 읽어봐야겠다. 나는 지금껏 글을 쓰면서 서평을 쓴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조금만 다듬으면 '좋은' 서평은 아니더라도, 서평이라고 말할 만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마 안 될 것 같다. 서평은 보여줌과 감춤의 완급 조절이 필요한 것이지만, 나는 못 참고 내가 느낀 바와 나름의 해석을 다 풀어버릴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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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5-07-28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쓰는 것들은 그냥 `리뷰`정도일까요ㅎㅎ 저는 아무님이 쓰시는 글도 좋은 서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평이고 비평이고 그냥 책많이 읽고 많이 씁시다 ㅋㅋㅋ

아무 2015-07-28 10:22   좋아요 0 | URL
정확하게 이거다! 라고 할 기준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ㅎㅎ 이러나저러나 중요한 건 lovelydew님 말대로 많이 읽고 쓰는 거겠죠? 그 와중에 더 나아진 독자가 된다면야..^^

[그장소] 2015-08-26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저는 도무지 어려워요! 리뷰도! 서평도 그 근처도 못 갈 수준이라!!^^
예전엔 독후감상문 쓰기 대회 같은 게 있어서 곧잘 했던것 같은데, 어느 정도 지나선 그 마저
파괴된 것 같아요. 일정 양식이..ㅎㅎㅎ

아무 2015-08-26 07:32   좋아요 0 | URL
어릴 때 독후감상문 쓰라고 할 땐 정말 싫어했는데, 크고 나니까 이렇게 쓰게 되네요 ㅎㅎ 저도 항상 쓰면서 어려워요ㅠㅠ 계속 쓰다보면 조금씩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하며 쓰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