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려는지 습기 찬 바람이 불어 재가 날았다. 상자를 들고 검은 집을 천천히 돌아봤다. 이곳에는 지난 시간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불에 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많은 날이 여기에 있었다. 그것들도 불에 탔다. (64p)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 벗어나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던, 벗어나 도달한 곳이 다시 벗어나야 할 곳이 되던 시절, 밤과 낮이 같고 여름과 겨울이 같고 오늘과 내일이 같은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과 별다르지 않았다. 당시는 그걸 몰랐다. 생의 가장 참혹한 시기를 지나는 줄 알았다. 그 시절을 건너고 나면 또다른 시절을 건너기 위해 발목을 적셔야 한다는 걸 알 수 없었다. (136p)
그 눈빛을 품고 지낸 사 년간, 시간은 참으로 울퉁불퉁하게 흘러갔다. 시간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었다. 그때도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뭉텅 잘려나가게 될 것을, 그 삶이 버려지는 게 아니라 나머지 삶에 영영 덧씌워지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174p)
그곳에 있을 때는 실패가 분명함에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그럭저럭 유지하는 게 더 실패하지 않는 일인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성공이라고 여겨온 것도 보잘것없었다. 표면장력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무지개 빛깔의 얇은 막과도 같았다. 그때는 아무리 얇을 지라도 그것을 유지하고 싶어 여러모로 애썼다. (2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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