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최근 읽은 황정은의 단편들에 대한 짧은 감상입니다.)
1. 웃는 남자
왜 웃는 남자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빅토르 위고를 떠올렸다. 작년에 사 놓고 여태껏 읽지 않고 있으므로 기형적으로 웃는 얼굴을 가지게 된 남자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다. 무슨 관련이 있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단편은 도도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아무른 장식도 없고, 벽지마저 뜯어낸 단칸방에서 생곡을 씹고 있는 도도. '디디의 우산'에 나오는 도도가 맞다. 여기서도 도도의 연인은 디디니까.
도도는 중간중간에 자꾸 '단순해지'자고 말한다. 어쩌면 단순해져야만 생존할 수 있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 세계는 아버지가 물을 아끼겠다고 변기 손잡이를 떼서 세면대에 남은 물로 오물을 처리하는, 그런 세계다. 그런 곳에서 생각을 자꾸 하면 생각은 '나를 먹고', '나를 짓누르고', '나를 씹는'다(266쪽). 뭔가 말을 하려고 해도 가만히 있으라는 일갈만 남는, 그리고 혁명, 이라고 말하는 게 새삼스러운 세계.
구급차를 타고 가는데,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놈이 의식은 있는데 머리가 자꾸 부풀더라고. 머리가 이렇게 자꾸 커져. 겁이 더럭 났지. 그런데 이놈이 자꾸 말을 하려고 하는 거야. 가만히 있으래도 말을 해요. 뭐라고 자꾸, 말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야.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그래서 내가 아 닥치라고, 가만히 좀 이렇게 닥치고 있으라고 열불을 냈단 말이지. 그랬더니 나를 한 번 끔벅 보더니 그다음부턴 말을 안 해. 눈을 감아. 그리고 바로 파래졌지. 바로 파래졌어. (273쪽)
디디는 하하, 웃더니 다시 말했다.
일전에 나는 있지, 버스 안에서 혼자 혁명, 하고 말한 적이 있었어. 그냥 책 제목을 읽었을 뿐이었는데 말이야. 나 엄청 놀랐어.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이 말을 하다니, 하고 놀라서 눈치 보고 그랬어. 그런데 그렇게 놀라고 보니까 이상한 거야. 엄청 이상한 거야. 그게 그렇게 놀랄 정도의 일인가? 사람들 많은 곳에서 혁명...... 하고 말하는 것이. 그런데 나는 놀랐다? 되게 놀랐고 그렇게 놀란 게 좀 웃기다고 생각했어. 어머 나 좀 봐...... 하고. (271쪽)
단순해지려는 도도를 막는 것은 죄책감이다. 디디를 붙잡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그 죄책감은 어떤 노인에 대한 기억을 불러온다. 버스 정류장에서 곁에 서 있던 노인이 쓰러졌을 때 도도는 그를 피해 비켜섰고 때마침 버스가 도착해 버스를 탔다. 그를 떠올리며 도도는 '버스가 조금 늦게 당도했더라면,'(268쪽)하고 계속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단순해지자. / 더 단순해지자.'(269쪽)고 말한다. 하지만 디디에 대한 죄책감은 단순해지지 않도록 그를 막는다. 디디가 현실의 무심함에 대한 반성으로 그를 이끈다고 해야 할까. '벽이 이럴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263쪽)는 세계에서, 이런 무심함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것이 현실에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도도는 단순하고 무심한 세계의 표상과 같은 방 안에서 생각한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275쪽)라고. 도도는 그 세계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2. 아무도 아닌, 명실
(소설 전문은 http://webzine.munjang.or.kr/archives/11033)
<한밤의 산행>은 '기억'에 관한 테마 소설집이다. 여기 실린 '아무도 아닌, 명실'은 지금까지 읽은 황정은의 단편 중 두 번째로 어려웠다(첫 번째는 그 다음에 나온다). 명실은 글을 쓰기 위해 노트와 만년필을 찾고 그의(실리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나와있지 않다) 책장을 보며 실리를 생각한다. 하지만 기억은 자꾸 흐려지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마저 자꾸 잊혀진다. 자신을 알아보는 전어 장수나 자신의 조카의 목소리도 못 알아보는 걸 봐서 치매를 앓고 있는 듯 보이는데, 그럼에도 그녀는 실리를 기억하려고 애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
이 소설을 메타소설로 보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끊임없이 책을 쓰려고 하지만 끝을 맺지 못하는 실리, 실리가 죽은 뒤 주인이 없어진 그의 책장과 책들. 그리고 노트에 실리에 대한 글을 쓰려는 명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에 대한 소설로 보기 전에, 이 소설이 말하려는 건 기억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실리가 들려주는 마리코의 이야기에서도 그렇듯,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은 그를 기다리는 방식이 아닐까, 하고.
그게 안 돼. 앉으면 말이야...... 앉으면 되지,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서 앉았는데 벌판 가득 풀이 자라서 그 속에 앉으면 길게 자란 풀에 묻히는 거야. 마리코가 자칫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갈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서서 기다려. (...) 그런데 이 벌판에 온전히 혼자인 것은 아니라서......
누가 있어?
누가 있지. 책상과 의자가. (102-103쪽)
기억하지 않으면, 기다리지 않으면 '점차로 없고 점차로 사라져가는 것'(104쪽)이다. 명실은 마리코-실리를 망각으로 잠기지 않게 하기 위해 계속 기다린다. 그 기다리는 방식, 기억하는 방식은 사진이 아니다. 어느 순간 '그냥 밋밋한 종잇장'(104쪽)이 되는 순간이 오므로, 오히려 실리가 이제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만들어 버리므로... 실리를 기억하는 방법은 글을 쓰는 것뿐이다. 실리의 책들, 그 책들이 실리를 죽였다는 생각에 그 책들을 '닥치게 만들었고 죽게 내버려두었'지만(107쪽), 실리를 기억하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그래서 마리코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도 책상과 의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황정은에게 소설은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 기다리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3.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중년 부부의 유럽 여행을 다룬다. 시기는 IMF가 터졌을 때로 나오지만 그 배경이 그렇게 큰 연관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제목을 보았을 때, 이 단편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여행인 듯하다. 14년 전 아이와 함께 갔던 계곡 나들이, 유럽 여행, 그리고 우주선 패스파인더(Pathfinder)의 화성 착륙.
뭘 그렇게 봐.
아니 화성이니까.
뭐 별거 있나.
아니 저렇게 있는데 못 가볼 거니까, 평생.
화성엔 못 가지.
그렇지, 우린.
다른 사람도 못 가.
미국이 갔잖아. 사진도 찍고, 저렇게.
미국이 간 거지. 아무도 없어, 저기엔. 무인(無人)이었으니까. 저기 갈 수 있는 사람은 지금도 없어. (337-338쪽)
소설에는 큰 사건이 두 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14년 전 아이의 죽음. 다른 하나는 여권 분실. 사건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부부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아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인 그는 '조금 더 영어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여행에서 모든 설명과 일을 도맡아 한다. '묻는 일이 피곤했고 나중엔 거의 두려'울 만큼. 반면 아내는 '왕성하게 먹고 호기심도 왕성'해서, 이리저리 쏘다니고 길을 걷다 흥미로운 것이 있으면 그쪽으로 이탈해서 가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아내의 왕성한 호기심에 그는 무뚝뚝하게, 때로는 무관심으로 대응한다. 오히려 그는 그런 활기가 불편하다. '이 도시의 활기가 불편'하듯이. 어쩌면 그는 이 세계의 질서가 체화된 인물, '무심하고 침착한 어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라는 개별자의 호기심에, 상처에 무관심한 것 아닐까, 하고.
안장이 사라진 자전거가 곤혹스러운 세계 자체로 보였다고 그녀는 말했다. 어느 개새끼가 가져갔을까. 안장은 어디에 있을까. 세상이 아이에게서 통째로 들어낸 것, 멋대로 떼어내 자취 없이 감춰버린 것. 이제 시작이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지...... 이렇게 시작되어서 앞으로도 이 아이는 지독한 일들을 겪게 되겠지.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다. 거듭 상처를 받아가며 차츰 무심하고 침착한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지......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였다. (338-339쪽)
이런 그의 불만은 아내가 여권을 잃어버리자 폭발한다. 왜 여기서 그녀에게 뱉는 그의 말이 나는 이렇게 들린걸까. 그러니까 그렇게 질문하고 쏘다니고 호기심 갖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14년 전에 니가 '조금 더 들어가보자'고 하지 않았으면 우리 아이도 안 죽었을 거다. 진작 입 다물고 질서에 맞게, 이 세계의 질서에 맞게 살았으면 되지 않았냐. 내가 언제까지 여기서는 이렇게 해야 해, 저렇게 해야 해라고 말해줘야 돼? 이런 식으로.
내가 그걸 챙기라고 하지 않았어? 그는 말했다.
그 밖에 내가 뭘 더 부탁한 게 있어? 그거 챙기라고...... 가방에 넣으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거 잊지 말라고...... 그냥 그거 하나...... 가방에 다 있잖아. 당신 칫솔, 화장품, 사탕...... 다 있는데 왜 그건 없냐...... (...) 그런데 괜찮을 거라니...... 당신은 괜찮지 걱정이 없지 내가 다 하니까...... 당신은 잘 먹고 잘 자고...... 어디서든...... 호텔에서든 비행기에서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비위가 좋냐 그렇게 멀쩡하게...... 괜찮을 거라고?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쉬워 모든 게......
(...)
그런 식으로 보지 마. 사람 빤히 관찰하지 마. 너는 아무 잘못 없는데 내가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345-346쪽)
그리고 아내는 그를 떠난다. 세계의 질서를 무심하게 따라가기만 했던 결과는, 소중했던 사람들의 상실이다. 그래서 '노, 미스드...... 로스트......'라고 한 것 아닐까. 세계에 대한 의심 없이 무관심하게 모든 질서를 수용했던 그와, 조용히 따라오라는 세계에 호기심을 품고 있던 아내. 그것이 이 소설이 말하려는 바가 아니었을까.
그냥 읽으면 가끔 아내의 행동이 답답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가 마치 해결사인 것 같고...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그렇게 세계에 대한 의심 없이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옳은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런 맹목적으로 따른다고 해서, 세계가 우리의 안전을, 안정을 보장해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IMF 얘기가 나온 것일지도.
가게를 봐주고 있는 처남에게 도착을 알리고 안부를 물었다. 매형, 처남이 말했다. 우리 나라가 망했어요. (336쪽)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세계의 바깥을 말하는 것일까? 패스파인더도, 아이도, 그녀도 불합리한 이 세계의 바깥으로 나간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다. 다 이해한 것처럼 떠들었지만 이건 모두 나만의 독자적인(그래서 오류가 많은) 해석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