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의 의로운 혈육들 경기문학 26
성해나 지음 / 청색종이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전에 안준원의 소설집 곰곰 무슨 곰으로 경기문학驚記文學시리즈를 소개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읽흔 성해나의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은 그 시리즈의 스물여섯 번째 책이다. 생소한 이들을 위해(생소하긴 나도 마찬가지) 성해나 작가를 소개하자면,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오즈로 등단한 신예 중의 신예이다. 정초에 등단하여 여름에 작은 소설집을 출간했으니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읽고 난 뒤의 소감을 간략히 말해보자면, 따라 읽어야 할 작가가 또 한명 추가되었다는 것.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엔 표제작과 June.mp3, 이렇게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표제작이 몹시 재밌었다. 문중門中을 쫓아다니며 집안일에 몰두하는 조부와 그런 조부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가족서사 예술을 실현하려는 영상학과 재학생 의 이야기. 조부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가보의 비밀과, 그의 마지막 발화인 부끄럽다.”의 의미 등, 생각해볼 여지가 곳곳에 있는 소설이었다. 졸업작품의 주제를 고민하던 에게 선배들은 무조건 가족 서사를 밀어붙이라고 권한다.

 

[핍진성. 모로 가도 그건 먹히거든.]

 

핍진성이란 무엇인가(알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니 오해 말길).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지긋지긋한 단어가 뭐냐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핍진성이라 답하겠지만, 정작 그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아닌가, 나만 모르는 건가). 소설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학과 선배들에 의해 개연성 혹은 디테일과 맞물리는 의미로 남용되고 마는 핍진성의 작업에서 어떤 식으로 확보되는 것일까. 가족서사의 핍진성이란 게 어느 인물의, 어떤 행동의 기원을 인과적이고 논리적으로 통찰할 수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다면, 그렇다면, 캠코더를 들고 종친회를 따라가는 것은 핍진성을 확보하는 일이었을까.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의 싸움질이? 핍진성, 핍진성, 하고 중얼거리는 는 과연 그것을 찾아냈나.


어쩌면 불타버린 도시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은 조부의 죽음에 가서야 비로소 핍진성의 실마리를 찾아냈는지도 모른다. 조부는 종친회에 가야만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의 아버지 어머니는 조부를 그 자체가 아닌 노인들의 경향성으로만 이해하던 사람들이었으니까. 다시 말해 생전의 그들은 몰이해의 평행선을 달렸으니까. 캠코더를 든 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조부의 죽음과, 조부의 마지막 말인 부끄럽다.”를 통해 그를 이해하려는 의 시도는 핍진성 찾기의 첫 발짝에 불과하다. 불합리로 느꼈던 면모까지 한데 모아 그들의 삶을 재구축하는 과정에서 핍진성은 마침내 찾아질 것이고, 그게 바로 예술의 역할이겠지. 어쨌거나 가족 서사가 핍진의 보고寶庫라는 말은 틀린 것이 아니게 되는 셈인가. 내가 쓰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좋은 소설가의 큰 자질 중 하나는 유머가 아닐까, 라고 종종 생각한다. 모처럼 좋으면서 재밌는소설을, 그런 소설을 쓰는 소설가를 발견했다. 계속 따라 읽어야지. 룰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발코니에 선 남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3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사실 작년) 미스테리아25호에서 수록된 헨닝 망켈의 쿠르트 발란데르시리즈 프리퀄을 읽었다(그런데 그 독후감은 아직 쓰지 않았다). 2화로 분재되었는데 몹시 재미지게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얘기를 왜 하냐면, 헨닝 망켈을 비롯한 유수의 북유럽 스릴러 작가들(요 네스뵈 등등)이 가장 사랑하는 시리즈가 바로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시리즈이기 때문이다. 헨닝 망켈에게 직접 들은 얘기는 아니지만 출판사에서 그리 말하며 홍보했으니 그런 줄로 알고 인용하겠다. 어쨌거나 무지 재밌는 것은 사실이니까. 누가 내게 작년 최고의 발견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꼽겠다.


발코니에 선 남자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스톡홀름의 여러 공원에서 잇달아 발생하는 두 종류의 강력범죄를 스웨덴 국가범죄수사국의 형사인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이 해결하는 내용이다. 두 종류의 범죄는 각각 노약자를 대상으로 한 퍽치기, 그리고 소녀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납치와 살해이다.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사건 때문에 경찰은 시간에 쫓기고, 마르틴 베크는 점차 두 사건의 연관성을 의심한다. 그리고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발코니에 선 남자의 존재.


사람과 지명이 좀처럼 안 외워진다는 것만 제외하면(하지만 이는 극복 가능한 문제이다, 우리는 스웨덴 국적의 축구스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이름도 외워내었으니까)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완벽하다. 매 편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지점은 바로 세련됨이다. 스마트폰이 없었다는 것, 과학수사와 사무자동화가 덜 발달했다는 것만 빼면 이게 오십 년도 더 된 소설이라는 것을 믿기가 어렵다. 범죄를 통해 낙원으로 일컬어진 복지국가 스웨덴의 이면을 드러내는 방식이나, 범죄 그 자체가 아닌 범죄에 매진하는 경찰이라는 인간을 조명하는 작가의 시선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번역의 힘이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김명남 번역가가 옮긴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아직 출간되지 않은 편까지)절대적으로 신뢰할 생각이다.


범죄는 불행이다. 그리고 우리는 범죄라는 불행을 통해 사회를 읽는다. 그 과정은 불행히도 다소 흥미롭다. 우리는 범죄가 어디까지나 소설 속의 일이기를 바라지만 종종 소설을 압도하는 현실의 범죄를 목도하고, 그것을 통해 작금의 현실을 반추하곤 한다. 누군가는 그것에서 문학적 영감을 받기까지 한다. 불행과 흥미와 문학성이 뒤섞이는 가운데 나는 이따금 막막함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그것이 나의 불행이 아님에 안도한다. 문학은 가끔 나를 비겁하게, 또 비인간적으로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황정은의 두 번째 소설집 파씨의 입문을 읽었다. 옹기전이며 뼈 도둑, 디디의 우산, 양산 펴기등 그간 조각조각 읽었던 단편들이 더러 실려 있었다. 그의 등단이 2005년이고, 첫 소설집인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2008년에, 첫 장편인 의 그림자2010년에 각각 나왔다. 이후로 파씨의 입문,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아무도 아닌, 디디의 우산같은 작품들이 2019년까지 연이어 출간되었고. 그러니까 황정은은 명실상부한 2010년대의 대표작가인 것이다. 작가들이 이렇게 10년 단위로 끊어지는 분류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왜냐면 작가는 10년만 글을 쓰고 마는 존재가 아니니까), 누군가가 2010년대의 한국문학을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황정은의 책을 보게 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기에 명명을 해보았다. 물론 나는 2020년대에도 계속될 황정은의 문학을 기대하고 있다.


두 번째 소설집에서 황정은의 스타일이 보다 선명해지는 것이 보인다. 완성되고 그 완성미를 더해가고 있는(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초기작을 훑는 일은 몹시 즐겁다. 초기의 황정은은 환상성을 종종 도입하곤 하는 작가였나 보다. 연인의 곁에 남아 있는 죽고 남은 원령(대니 드비토)이나 고양이(묘씨생)를 화자로 도입하는 등 다종다양한 시도가 엿보인다. 작가 스스로가 말하길 환상성이라기 보단 비논리적이더라도 정서적으로 밀착하는 표현방식이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표현방식으로서의 환상성에 보다 눈길이 간다. 이런 단계를 거쳐 지금의 황정은은 보편적인 정서를 보편적으로 표현하는 작가가 된 것일까.


특유의 리듬감은 여전하다. 특히 대화에서. 나는 대화를 가장 잘 쓰는 작가 중의 하나로 황정은을 꼽곤 하는데, 파씨의 입문에서도 특유의 말맛은 여전하다. 아니지, 앞뒤가 바뀌었지. 여전한 게 아니지. 황정은은 본래부터 대화를 잘 썼던 것이지.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은 소설은 양산 펴기였다.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으로도 알려진 소설인데, 바자회에서 양산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야기이다. 짧은 분량으로 나오는 바자회 천막 옆의 시위 현장의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릿터 Littor 2019.8.9 - 19호 릿터 Littor
릿터 편집부 지음 / 민음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Littor19호는 8월에 출간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지난달에 읽었는데, 독후감을 이제야 쓴다. 쓰기 귀찮은데, 생각하며 차일피일 미뤄오다가 이제야 쓴다. 읽는 일은 대체로 즐겁지만 언제나 즐거운 편은 아니고, 쓰는 일은 언제나 힘겹다. Littor의 매 호에 쓰는 자와 읽는 자를 나누어 인터뷰하는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하고 가만 생각해본다. 읽는 이의 즐거움을 통해 쓰는 이가 힘을 얻고, 쓰는 이의 힘겨움을 통해 읽는 이가 읽기를 더 소중히 생각하는 것.


19호는 누가 시를 읽는가특집이다. 플래시픽션을 빼버렸고, 대신 12명의 필진이 시를 읽는 이유에 대해 적은 글로 커버스토리를 풍성하게 채웠다. 이 역시 그 무렵에 김혜순 시인이 캐나다 그리핀 시 문학상을 수상한 것과 연관이 있을까. 누가, 왜 시를 읽을까. 문학의 무쓸모, 영상시대에서 텍스트의 역할 등이 주류 담론이 된 지도 한참인데, 누군가는 왜 굳이 시를 읽고 있을까. 김겨울, 김상훈, 김하나, 손문경, 숙희, 유연지, 요조, 이슬아, 정성은, 정여울, 정진우, 정한글의 글을 읽어보면 조금은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독자 수기 공모를 통해 실린 글도 있으니 더욱 유의미할 듯하다.


매해 신춘문예를 비롯해 문예공모 심사평이 나올 때마다 전년에 비해 응모작이 증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 경향은 특히 시 부문에서 두드러지는데, 매번 신기하다. 문학은 쓰는 이들로 하여금 존재를 증명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과 그들 모두가 쓰기 이전에 읽는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함께 들곤 한다. 그렇구나. 쓰는 이와 읽는 이의 불가분의 관계야말로 문학의 존재 이유일 수 있겠구나. 그렇게 나는 오늘도 읽고, 읽은 것에 대해 쓰고,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며 무언가를 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윤성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하 김승옥문학상)이 출간되었다. 2013부터 KBS 순천방송국이 주관하다가 3회 만에 명맥이 끊긴 것을 문학동네가 이어받아 재정비했다. 등단 10년 이상의 작가들이 한 해 동안 발표한 단편소설을 블라인드 심사하여 7편으로 추리는 방식이며 그 중 1인을 대상으로 선정한다. 블라인드 방식에 약간의 의구심이 있긴 한데, 기발표작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인적정보를 가린다 한들 미리 계간지를 통해 읽은 사람은 그게 누구의 작품인지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이 그리 열심히 문예지를 챙겨 읽지 않는다고 전제한다면야 뭐, 수긍하는 수밖에 없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일곱 편의 작품을 뽑아놓고 봤더니 모두 여성 작가(윤성희, 권여선, 편혜영, 조해진, 황정은, 최은미, 김금희)의 소설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문학의 현재와 첨단을 견인하고 개척하는 존재가 여성이라는 것, 여성 서사야말로 가장 중요한 흐름이라는 것, 이른바 한남문학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 남성인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읽고 배워야 하는지를 많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대상 수상작인 윤성희의 어느 밤도 감탄을 자아냈지만 개인적으로는 황정은의 파묘를 베스트로 꼽고 싶다. 어느 밤이 킥보드를 훔쳐 타다가 넘어진 할머니가 찰나의 순간 동안 여성이자 아내, 엄마로 살아온 세월을 반추하는 소설이라면, 파묘는 엄마 이순일과 함께 외증조부의 무덤을 헐러 가는 한세진네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의 삶을 훑어내린다. 파묘는 한 공간과 에피소드에 국한해 소설을 전개해 나가는 지극히 고전적인 방식의 소설인데, 나는 황정은이 서울이 아닌 곳을 다룬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소설적 지향의 극치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문경을 다룬 上行도 그렇고. 너무 좋아서, 한글을 틀어 소설을 옮겨 적었다. 가장 좋았던, 가장 화가 났던 한 단락을 발췌해 본다.

 

[ 오래전에 네 아버지하고 여기 온 적 있었다고 이순일이 말했다. 버스를 타고, 그때는 도로가 제대로 포장이 안 돼, 차창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흙먼지가 이는 길을 몇 시간이고 왔다고, 지금처럼 여기로 편하게 올라오는 길도 없어서 능선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서 마침내 묘에 다다랐는데, 절할 때 보니 네 아버지가 저만큼 떨어져서 뒷짐을 진 채 굳이 돌아서 있더라, 그래 어처구니가 없어서, 거기서 뭘 하느냐고 이리 와서 절 올리라고 말했더니 처가 쪽 산소엔 벌초도 하지 않는 법이라고 잡소리를 하기에 너무 당혹스럽고 열받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얼른 절 올리라고 역정을 냈는데 그걸 듣고도 뒷짐지고 서 있더라며 그뒤로 야속하고 징그러워 같이 오자고 하지 않았다고, 네 아버지와 동행한 것은 그것 딱 한 번으로 그쳤다고 이순일은 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