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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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 (12p)


'우리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다.'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관성의 법칙 때문일 것이다.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냥 불평만 할 뿐, 하루하루를 관성처럼 살아가는 것. <한국이 싫어서>는 그런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다.


<표백>이 '못 살겠다. 갈아보자.'의 소설 버전이라면, <한국이 싫어서>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의 소설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꾸준히 이야기를 전하는 인물은 계나이고, 소설은 계나가 겪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말해주는 고백체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과 사건들은 계나의 시선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지고, 책을 읽다보면 헬조선이나 N포 세대와 같은 말들이 머리에 맴돌면서 계나에게 동조하고, 그녀를 부러워하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정말 냉철한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정말 싫은 한국 사회가 아닌 계나다.


중년 남자들이 「빙고」를 부르는 이유는 다들 너무 힘들어서 아닐까. 다들 이 땅이 너무 싫어서 몰래 이민을 고민하는 거지. 그걸 억지로 부정하고 자기 자신한테 최면을 걸고 싶은 거야.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어."라고,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라고. 그런데 이민을 가면 왜 안 되지?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25p)


자신이 치열한 한국 사회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계나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주로 떠난다. 여기까지는 '헬조선을 뜨고 싶다.'는 사람들의 푸념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소설은 계나가 호주에 가서 잘 살았습니다라는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 호주로 떠난다고 인생이 만만해지거나 살기가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허희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자본과 달리 사람이 월경할 때는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비행기 운항 요금 따위가 아니라, 자기 신체를 둘러싼 법적 자장, 권리와 의무를 모조리 내놓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래, 한국 정말 싫지. 이 나라는 정말 잘못됐어. 차라리 다른 나라로 뜨는 게 낫지.'라며 요즘 풍토에 동조하는 소설이 아니다. 물론 이 책이 열광적인 반응을 얻은 것에는 '맞아, 한국 정말 싫어.'라며 공감하게 되는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묻고 싶다. 그렇게 한국을 떠난 계나는 정말 한국 사회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것 말고는 잘못이 없는 사람인가?


모르겠어. 그냥 걔가 결혼을 가볍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이슬람 국가 남자잖아. 연애용 아내, 사업용 아내, 자식을 낳기 위한 아내, 이렇게 아내를 여러 명 둘 참이었는지 누가 알아. (93p)

 

내가 보기에는 계나야말로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맞는 한국적인 인물의 전형이다. 호주나라 게시판에서 열폭하는 사람들을 보며 충고하는 그녀의 말에는 '나는 당신들과 달라.'라는 생각이 깔려있지만, 그런 그녀가 인도네시아 남자친구를 보는 시선이나, 동생의 베이스 치는 남자친구를 보는 시선은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의 시선과 뭐가 다른가. 행복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으로 구분하는 모습 역시 효율성과 경제성에만 눈길을 보내는 시선과 전혀 다르지 않다. 호주를 떠나 시민권까지 얻은 그녀에겐 여전히 한국적인 관성의 흐름이 존재한다. 여기서 결국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한국적인 관성이 사실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관성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내가 형편이 어려워서 사람 도리를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국가의 명예를 걱정해야 한다는 식이지. 내가 외국인을 밀치고 허둥지둥 지하철 빈자리로 달려가면, 내가 왜 지하철에서 그렇게 절박하게 빈자리를 찾는지 그 이유를 이 나라가 궁금해할까? 아닐걸? 그냥 국격이 어쩌고 하는 얘기나 하겠지. 그런 주제에 이 나라는 우리한테 은근히 협박도 많이 했어. 폭탄을 가슴에 품고 북한군 탱크 아래로 들어간 학도병이나, 중동전쟁 나니까 이스라엘로 모인 유대인 이야기를 하면서, 여차하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눈치를 줬지.

(170-171p)


한창 이 작품이 인기가 있을 때 SNS에도 많이 떠돌았던 문구인데, 책을 읽고나서 다시 보니 '대한민국'에 다른 나라 이름을 붙이면 그들의 푸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한국 사회의 문제가 세계 보편적인 것이라고만 치부할 문제는 아니지만(주로 여당에선 세계적으로 이렇지만 우리는 선방하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이라는 이름의 세계만 폭력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는, 원래가 폭력적이다. 다만 그것이 옷을 바꿔 입었을 뿐. 폭력의 강도나 모양새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 그렇기에 나는 작가가 계나의 손을 들어주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별로 통쾌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은, 이 소설이 보여주는 소재나 형식이 결국 '푸념'의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백>은 '반항'의 방식을('저항'이 아니다) 취했기 때문에 그 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통쾌함을 느꼈다면, <한국이 싫어서>가 보여주는 '푸념'의 방식은 한숨만 깊어지게 한다. 푸념하는 건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여전히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헬조선' 열풍을 이런 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에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도서관에 예약신청을 한 지 두 달만에 받은 책이었는데, 2주 내내 펴고 있지 않다가 반납 안내 문자를 받고 부랴부랴 읽었다. 다른 그의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문장이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긋지긋해서 눈을 돌리려 했던 한국 사회의 현실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점에서 한숨만 늘어가는, 고민들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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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1-17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칙 책 보고 왔더니 ˝관성의 법칙˝ 얘길ㅎ;;....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관련된 ˝붉은 여왕의 법칙˝이란 게 있더군요. 치타를 피하려면 영양이나 얼룩말은 그 2배로 빨리 달려야 한다는. 살아남기 위해서. 이민은 그런 달리기 같은 방법이기도 했을 겁니다.
모두가 달리고 있는 세계.
미셸 우엘벡 <복종>을 다시 훑어보다가 그나마 한국에서는 장강명 작가가 비슷한 스탠스이지 않나 싶었습니다. 우엘벡보다 장강명 작가가 적을 두지 않는 처세도 있는 것 같고요. 기자 출신이라 그런가a;
우엘벡이 유럽의 허위를 찍어대듯이 장강명은 한국의 부조리함들을 씹어주죠.
딱한 것은 쓰는 자도, 읽는 자도 후련하지 않다는...세상이 그래서 그런가...

아무 2015-11-17 07:55   좋아요 0 | URL
붉은 여왕의 법칙은 이 책 앞부분에 나오는 톰슨가젤 이야기와 연결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허희 평론가는 해설에서 톰슨가젤이 사자와 연대해서 우리를 부숴야한다고 말하지만, 그게 가능하긴 한 건지...
우엘벡의 소설은 아직 <소립자>밖에 못 읽었지만 장강명 소설과의 비슷함이 많이 느껴지네요. 후련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눈과 귀를 닫는 게 속 편하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 요즘입니다. 맘대로 닫지 못해 뉴스를 보며 시름하는....
 

고시생의 하루하루는 쳇바퀴처럼 무료하다. 뭔가 일이라도 생겼으면 싶지만 그런 사소한 일도 없이 굴러가는 일상. 이런 일상에서 좋은 소식이라도 들렸으면 좋으련만, 최근 들어 듣게 되는 뉴스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국정화 문제, 표절 문제... 등등. 하나같이 염세적인 눈을 들이대게 되는 사건들이다. 요즘 들어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의 대부분은, 문제가 원래 갖고 있던 본질이 흐려지고, 본질이 아닌 엉뚱한 것들만 붙잡고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정화 문제가 가지고 있던(혹은 가졌어야 할) 본질은 가려지고 이념 대립을 통해 편 가르기에 열중하는 여야 세력과 같이.


 















표절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면 신경숙 작품의 표절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일단락되고, 그동안 소홀했던 표절에 대한 깊은 논의가 이루어져야 되는데, 그들은 여전히 표절이냐 아니냐를 놓고 왈가왈부한다. 문자적 유사성이 어떻네 하면서.

 

'창비 라디오 책다방 시즌 2'를 3회까지 들었다. 원래 1, 2회를 들은 뒤 짜증나서 듣지 않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3회에 나오는 게스트가 시즌 1의 진행자였던 김두식 교수와 황정은 작가였기 때문에 3회도 들어보기로 했다. 3회 동안 표절 문제를 다루기로 한 것은 진행자인 박혜진 아나운서가 강하게 주장을 피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표절 문제를 제대로 다루겠다면서 보여주는 모습은, 누가 봐도 이게 제대로 다루겠다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김두식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책다방은 표절 문제를 다루면서 1회에는 공동 진행자이자 창비 편집위원인 송종원 평론가의 설명과 변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고(도대체 왜 그는 끊임없이 김슬기 기자에게 언론에도 잘못이 있다며 그를 꾸짖는가), 2회에는 오랫동안 창비의 편집위원이었던 최원식 평론가를 게스트로 불렀으며, 3회에는 전 시즌의 진행자를 불렀다. 이런 모양새를 보면 제대로 다루겠다는 말의 진의가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 1, 2회를 통틀어서 제대로 말했던 사람은, 1회에 게스트로 나온 김슬기 기자와 박혜진 아나운서뿐이다.


황정은 작가가 나왔으니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들은 3회에서는 김두식 교수와 황정은 작가의 말들이 독자들을 어느 정도 대변하고 있고, 그나마 날선 비판을 하고 있어서 속이 조금 시원했다. 그나저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황정은 작가가 이렇게 목소리에 힘을 주고, 이렇게나 길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 봤다...


제가 송종원 선생님의 이야기를 1회 때도 듣고 지금 방송으로도 또 듣고 있는데, 제가 정말 불편한 지점이 뭐냐하면, 왜 이렇게 자꾸, 창비 쪽에서 자꾸 이렇게 ‘하지만’을 붙여서 얘기를 하는지... 그러니까 대중이 정말 궁금해 하는 것하고, 창비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내용하고 괴리가 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 창비의 가을호를 기다렸는데, 저는 다양한 형태의 성찰과 논의가 실릴 거라고 예상을 했는데, 예상하고 거리가 상당히 멀었어요. 그리고 책다방 이번 시즌의 앞선 내용들도 계간지 내용하고 별로 다르지 않았고.. 백낙청 선생님이나 송종원 선생님이나, 그게 실은 옳은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작가로서, 그리고 일개의 독자로서, 저는 계속 허탈한 거죠, 이 상황이.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는데, 비유를 좀 해보자면, 최근에 영화 <베테랑>에서 유아인의 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면서요. 맷돌 손잡이를 ‘어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라졌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했더라구요. 그런데 이 경우에도 그게 사라진 거예요. 갑자기. 작가는 열심히 쓰고 독자는 읽고 있는데, 각자의 맷돌을 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이가 사라졌어. 뺏긴 거예요. 어디 갔는지 없어져 버린 거야. 근데 그걸 가져간 측이, 사과를 하는데, ‘어, 미안하다’, 근데 여기에 자꾸 '하지만'을 붙여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러면서 자꾸 뭘 붙이는데, 이게 그것도 대단히 어렵고 단호한 어휘로, 점점 더 많이 뭔가를 계속 붙이고 있는데.. 또 이 사태에 가장 어이가 없는 건 한국문학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들일 테고. 그런데 이 독자들한테 자꾸 뭔가 삿대질하는 느낌이 있다는 거죠. ‘미안해. 근데 하지만 당신들이 몰라서 이러는데..’ 이러면서 뭘 자꾸 덧붙여요. 그래서 저는 창비가 ‘하지만’이라는 것을 바깥에 호소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해 물을 수 있는 집단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 현재까지는 그걸 볼 수가 없었어요. 제가 좀 이 상황이 답답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한테는 충분하지 않고, 창비 내부에서도 다른 목소리들이 분명 있을 텐데 큰 선생님들 목소리만 들린다는 거죠. 이 상황이 대단히 한국적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맥빠지기도 하고. 문제가 터지고, 비난과 비아냥은 압도적으로 쏟아지는데, 이것에 관한 지속적인 논의나 성찰의 장은 대단히 드물고, 그리고 관심은 속된 말로 짜게 식어버리고, 그 와중에 당사자들, 한국문학의 작가들하고 독자들은 찐빵처럼 벙쪄가지고 무기력과 이런 걸 경험하면서 이러고 있는 상황이란 말이죠. 특히 한국문학의 젊은 작가들, 저보다 더 젊은 작가들, 이 사람들은 그냥 바바파파가 돼버렸어요. 이게 사람들 사이에 있는데 그 사람들이 그게 안 보이는 존재들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있는데 없는 거야. 이런 존재가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저는 사태가 이렇게 되어버린 데 창비의 태도가 한몫을 크게 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창비가 이런 점은 간과를 하고,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들을, '만약에 아니라면?' 이걸 붙들고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황정은 작가와 김두식 교수의 말들은 문학동네 좌담에서의 손아람 작가만큼 날선 발언들은 아니다. 하지만 처음 두 회를 듣고 이걸 들어서인지 표절 사태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것, 허탈함을 이야기하고 있어 속이 시원했던 것 같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창비의 태도는 한국문학을 읽어왔던 독자들을 봉으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표절의 본질을 의도성이라는 단어로 자꾸만 흐리게 하고, 감춘다. 표절 문제의 본질이 의식적이냐 무의식적이냐는 전혀 상관없는 주제다. 하지만 송종원 평론가는 3회에서도 그 전과 다름 없는 모습을 보인다. 김두식 교수가 나와서 했던 말들은, 문학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훅 들어오는 면들이 있었다. 차마 다 받아적을 자신이 없어, 일부분만을 인용한다.


근데 의도성을 단정할 수 없는 거는요,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 있어서. 의도성을 단정할 수 없다라고 하는 표현을 자꾸 쓰는 거 자체에 이미 어떤 의도가 담겨있다고 보이는 거죠. 그래서 대중들이 아마 분노하는 걸 거구요.


창비의 태도는 그의 말처럼 표절 문제에 앞장서겠다는, 그리고 객관적으로 파헤쳐보겠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면서 문자적 유사성이니, 의도성이니 하는 단어를 휘두른다. 이런 제스처뿐인 말과 논의 속에 본질은 사라졌고, 관심은 빠르게 식어갔다. 그럼 그렇지, 하면서.


창비가 표절에 대해 취하는 모습은 정치권의 모습과 닮았다. 본질을 흐린다는 점에서. 시간이 약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문제의 본질에 칼을 들이대지 않으면, 한국문학은 계속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곧 내가 받게 될 문학동네 겨울호나 창비 겨울호에 대한 기대가 식어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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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5-11-0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과 전혀 관계없는 잡담: `비밀독서단`이라는 TV 프로에 이동진 작가가 나왔다는데, 황정은 작가의 <百의 그림자>를 추천해서 함께 이야기했다고 한다. 알라딘 검색창에는 `비밀독서단에 나온 최초의 소설` 이런 식으로 나오던데, 이 방송을 한 번도 안 봐서 모르겠으나, 보니까 최제훈의 <퀴르발 남작의 성>도 나온 것 같던데... 아무튼 황정은의 팬인 나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조만간 책을 다시 읽고 여태껏 쓰지 않은 황정은의 장편 3편에 대한 리뷰를 써서 정리를 해야 될 것 같다..

아무 2015-11-17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련기사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32&aid=0002648682&sid1=001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는 겉표지를 벗겨낸 것이 훨씬 깔끔하고 예쁘다.)

 

 

페이스북을 비활성화한 지 이제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물론 그동안 비활성화를 잠시 풀었던 것이 열 번 남짓이나 되니, 완전히 끊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이번 시간 동안 느꼈던 것은, 나는 페이스북에 글이나 사진 같은 걸 열심히 올리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미 거기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바우만이 보기에는, 고독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편지 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31p)

 

바우만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머물러있지 않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과 비판은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들 전체에 걸쳐 있고, 그가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은 2008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하다. 44개의 편지에서 그가 줄곧 말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사회는 과거의 견고했던(Solid) 질서들이 액체처럼 유동하는(Liquid) 사회라는 것이다. 견고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유동한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우리는 유동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을 피하기 위해 그것을 무시하기도 하고, 울타리를 세워 그 안이라도 견고한 질서를 세우려고 하며, (특히 정치인들이) 유동하는 질서를 붙잡으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 어떻게든 불안 요소가 없는 견고함을 찾으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그런 시도들이 오히려 유동하는 근대를 요동치게 만든다. 오늘날 현대 사회가 보여주는 다양한 현상들은, 유동성에 대한 회피와 무시로 인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바우만의 분석은, 7년 전의 분석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예리하고 신랄하다(물론 그의 글과 달리, 트위터는 페이스북에 밀려 사망의 길을 걷는 중이다).

 

44개의 편지가 다루는 현상들이 워낙 다양해서, 혹자는 너무 정신없고 산만하다, 복잡하다라고 불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바우만의 대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새겨들어야 할 만큼 단호하다.

 

몇 년 전에 나는 한 인터뷰에서 "내 관심사들을 단 한 구절로 요약해달라"는 요구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인간이 경험해온 그 대단히 복잡한 길들을 탐사하고 기록하려는 나 같은 사회주의자가 추구하는 목적을 묘사하려 할 때 카뮈에게서 빌려온 다음과 같은 구절들보다 더 짧으면서도 한층 더 잘 묘사해주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명 굴욕적인 것들도 있다. 나는 그 사명이 어떤 어려움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결코 그처럼 굴욕적인 것들이든 아름다움이든 간에 둘 중 그 어느 하나에도 불성실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법들을 전달한다면서 철저한 자기 확신에 차 있는 많은 작가들은 결국 그처럼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는 저 신앙고백이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도발에 불과하다고 매도할 것이다.

- 편지 44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385p)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각각의 논의가 길게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바우만이 근대의 견고성을 긍정하는가라는 오해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편지들이 주간지에 실려 분량의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중반부를 넘어갈 때까지 분석과 비판만 있고 대안이 없는 탓에, 나도 읽으면서 '그럼 이 사람은 견고한 근대 사회를 옹호하나?'라는 질문을 품었었다. 후반부로 가면 바우만은 '모두스 비벤디'라는 생활양식의 시도와 실험을 대안으로 세우긴 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후반부에 잠깐 등장할 뿐이어서 아쉬운 면이 있었다. 물론 <액체근대>와 같은 작품들을 읽으면 그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두 번째 문제는, 번역에 대한 것이다. 물론 나는 원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책에 오역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매끄럽지 않은 문장과 직역투의 문장들은 처음 책을 읽을 때 나를 가로막는 진입장벽이었다. 한참 읽다가 답답한 문장에 열이 받은 나머지, 나는 색연필을 들고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단어들에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밑줄은 오류와 상관없이 친 것이다. 오해 없으시길..)

 

표시할 수 있는 것에는 표시를 했지만, 크게 바꿔야 하는 것(이를테면 문장 성분을 이동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들)에는 표시를 못했다. 문제를 먼저 말하자면, 일단 오탈자가 자주 보이고(왜 '끔찍한'을 계속 '끔직한'이라고 쓰는 것인가? 도대체 왜!), 불필요한 지시어와 부사어가 많으며('역시'라는 단어를 썼는데 왜 같은 의미의 보조사 '도'를 또 쓰는가), 쉼표가 부적절하게 찍혀 중의성을 띠는 문장들, 직역투의 표현('그럼에도'를 몇 번이나 표시했는지 모르겠다)이 자주 눈에 띈다. 이러한 문제들이 자꾸 중첩되다 보니 가독성이 떨어지고, 그것이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후반부로 가면 이런 오류들이 많이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정말 오류가 사라진 것인지 내가 이런 문장들에 익숙해진 것인지는 구분할 수 없다. 내가 가진 판본은 초판 13쇄로 2014년에 찍은 것인데, 아마 2판을 찍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나온 <사회학의 쓸모>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별점을 매긴 책인데, 바우만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책인 만큼 개정판이 하루 빨리 나오기를 바란다.

 

바우만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는데, 사회 현상들을 바라보는 그의 비판적인 시선과 근대 질서의 유동성을 문제로 지적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44개의 편지 중에는 별로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피부로 느낄 만큼 그 문제가 확산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의 사상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만간 <액체근대>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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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0-3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요즘은 뭘위해 커버위에 커버를 씌우나 싶어요.광고위해서..자꾸 독자를 바보로 만들어...

아무 2015-10-31 00:34   좋아요 1 | URL
책 10월호에도 띠지에 대한 글이 하나 실렸더라구요 그거 보고 `띠지 극혐`이라는 제목으로 쓰려다가 안 썼..ㅎㅎ 저는 책을 살 때 답정너 식으로 사서 띠지에 영향을 거의 안 받는데, 띠지가 판매 부수에 영향을 주긴 하나 봐요.. 책 살 때마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띠지 버리는 일인데ㅠㅠ

[그장소] 2015-10-31 06:13   좋아요 0 | URL
음..전 띠지도 버리지 않거든요.일단은 기록물이라.
그 시대가 단적으로 보여요.유행이라든지 ..시대상..
이나..디지털의흐름..돌고 도는것이..ㅎㅎㅎ
암튼..그러네요..그런이유로 버리진 못하는데 겹겹 에워싼 표지에 표지..그렇게 자신이 없나..싶은 거죠.
화딱지가 난달까..

[그장소] 2015-10-31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도 책사는건 답정너 식..띠지와 상관없이..안들어오죠.
예전에 나온책을 다시 꺼내 보면 신기해요.^^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버스를 타면서 읽을 만한 책이 필요해 도서관을 찾았다. 이리저리 돌아보다 읽으려고 벼르던 츠바이크의 책을 빌렸다. 두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어 가볍게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렇게 츠바이크와의 첫만남이 시작되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약간은 복잡한 액자식 구성을 통해 이야기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들은 인물이 책을 통해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식이다. 츠바이크의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문구를 보고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일정 부분은 이해가 되었다. 이 책에 실린 두 단편 모두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거나 본 인물을 통해 그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스 이야기'와 '낯선 여인의 편지'를 다 읽고 났을 때의 느낌은 인간 심리를 잘 묘사한 심리소설이구나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 그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좁은 생각이라는 것을 번역가의 해설을 보고서야 알았다. 혹시나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해설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히려 해설을 먼저 읽고 이야기를 감상하는 것이 좋을 지도...

 

'체스 이야기'에는 B박사와 체스 챔피언 첸토비치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B박사가 나치에게 납치되어 당한 고문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無)의 상태에 가두는 것이 그 어떤 육체적인 고문보다 폭력적이라는 것을 B박사의 고백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까스로 자신이 정신을 쏟을 체스 교습서를 발견한 뒤 그가 보여주는 체스에 대한 집착은 소름이 끼쳤다. 계속해서 집착하기 위해 자아를 분열시켜서 체스를 둘 정도라니..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간다. B박사와 체스를 두게 된 첸토비치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마다 곧바로 대응하지 않고 시간을 계속 끄는데, 이것이 B박사를 점점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B박사는 과거 나치에 의해 독방에 갇혔을 때처럼 신경증적인 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심지어 말을 잘못 두는 실수까지 저지른다. '나'의 저지를 통해 제정신을 겨우 차린 B박사는 게임을 중단한 채 자리를 뜬다. 그렇다. 체스 외에는 일자무식의 면모를 보이는 세계 체스 챔피언 첸토비치를, 작가는 나치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비인간적인 체스기계'로 묘사되는 첸토비치의 비인간성은, 과거 파시스트들의 그 모습에 대응되며 교양인인 B박사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체스에서 첸토비치가 보여주는 심리전은, 처음부터 마수를 드러내지 않고 서서히 세계를 장악했던 나치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낯선 여인의 편지'는 한 여성이 소설가 R에게 보낸 편지가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한다. 열세 살부터 오직 그만을 사랑해왔던 한 여자의 사랑고백은, 너무나 아름답기도 하면서 처연하기도 하다. 어떻게든 그의 모습을 보고 싶어, 그의 눈에 띄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그녀의 심리를 드러내는 작가의 묘사는 무척이나 섬세하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저녁마다 자신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여자를 만났을 때도, 이후에 클럽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도. 그에게 그녀는 그저 성적 탐닉의 대상이었을 따름이었지만, 너무나 그를 사랑했던 그녀는 그의 의지에 순순히 따른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열세 살 때 당신이 살던 마을에 살던 여자아이였다는 것도, 당신 생일 때마다 장미를 보냈다는 것도,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도.

 

사랑에 빠진 한 여자의 심리묘사와 뒤로 갈수록 서서히 그 전모가 밝혀지는 이야기의 전개는 훌륭하지만,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비판할 수 있는 거리가 한둘이 아님은 분명하다. 지나치게 순종적인 여성상, 누구에게도 헌신하지 않고 바람둥이처럼 욕망하고 즐길 뿐인 그의 모습 등등.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뭔가 허전하다. 그러면 왜 편지를 다 읽은 후에야 그는 비로소 그 여자를 정열적으로 사랑하게 되었을까. 이 역시 해설을 읽고 난 뒤에야 실마리가 풀렸는데, 당시의 성도덕은 여성에게 순결을 강요하면서 동시에 매춘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띠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그의 요구에 무작정 따르는 그녀를 보며 당황하면서도, 그녀를 집에 들여 잠자리를 갖는 그의 모습은 이런 이중적인 성도덕의 온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지를 읽은 후에야 그녀에 대해 불멸의 사랑을 느꼈던 것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작품들에서 돋보이는 것은 작가가 섬세한 필치로 묘사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심리다. 작가가 프로이트의 영향을 깊게 받았고 그로 인해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가 소설 곳곳에서 이루어졌다는 해설을 읽은 뒤, 그가 썼다는 <정신의 탐험가들>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프로이트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터라 열린책들에서 나온 프로이트 전집을 읽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가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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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6 0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6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계와 작가

먼댓글이라는 걸 처음 해봐서... ㅎㅎ

 

장강명 작가의 인기의 시작이 확실히 현재 사람들의 울분과 통했기 때문이라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대표적인 게 <표백>과 <한국이 싫어서>가 되겠죠. 그리고 현재 한국문학의 특징이 말씀하신 세 가지 안에 다 들어간다는 것도 슬프지만 사실이구요. 대표적인 것이 백수죠. 혹자는 2000년대 초까지 한국문학의 지배소가 신경숙의 고백하는 문체였다면, 현재의 지배소는 백수 캐릭터라 말하면서, 한국문학사상 가장 처치곤란한 인물들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한국문학에서 현실성이 강한 소설이 거의 대부분을 이루는 건 리얼리즘이 현실 참여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던 전통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현실이 더 소설같은 상황에 그 이유가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국적인, 혹은 스케일이 큰 문학작품이 나오지 않는 것,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비판을 피할 수 없겠죠(본격문학만을 중시하는 점도 그 이유 중 하나라고 봅니다).

 

운동권 자살을 같이 엮었던 건, <표백>에서 중간중간에 나오는 자살 선언 관련 기사 중 '88만 원 세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이 있어서 떠올렸던 것입니다. 찰스 맨슨에 대한 얘기가 앞부분에 나오는데, 자살 선언은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세계에 대한 복수' 역시 마찬가지로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저 역시 자살이라는 방식이 표백 세계에서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는 있지만, 제대로 된 대안은 아니라고 보구요.

 

장강명 작가의 강점이라면 그동안 굉장히 어렴풋이 에둘러 다루었던 현실을 마치 날것인 듯 독자들에게 들이밀었다는 점이겠죠. 그 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려면 근력을 좀더 키우는 몸 만들기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을 하더라구요. 다양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전략이라고 하고, 방대한 주제를 다룬 소설을 쓰는 것이 야심 중 하나라고 하니, 저는 앞으로의 행보가 좀더 기대됩니다. 현재 작가는 좀비물(...)을 연재하고 있고, 한국전쟁에 대한 스릴러와 문학상 관련 논픽션을(저번 북토크 때 설문조사를 부탁하시더라구요..ㅎㅎ) 준비 중이라고 하네요(http://blog.aladin.co.kr/line/7756829)

 

답이 충분히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한도에서 최대한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횡설수설한 느낌이네요^^;; 그러니 제목도 횡설수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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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0-1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을 바랐다기 보다 장강명 작가 얘기가 나와서 저도 이런저런 생각을 말해본 거였는데, 수고를 끼친 듯해서 죄송한데요^^; 하지만 아무님의 진지한 성찰을 또 읽어 좋네요~

한국 실정상 ˝잉여인간˝은 늘 주요소재였죠. 전쟁으로든, 정치 사회적으로든, 노동으로든 파생될 수밖에 없었죠. <광장>이나 <무진기행>도 본질적으론 그 카테고리라고 저는 생각하고요.
그래서 <잉여인간>이란 제목을 아예 붙이고 나온 손창섭과 장강명을 비교 분석해도 재밌을 것이란 말을 한 것이고요. ˝반사회성˝ 의 발전상까지 비교해 볼 수 있겠죠.

저도 인터뷰 보고 스케일이 큰 작품 구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습니다. 애초에 장강명 작가가 sf에서 소설쓰기를 시작했고, 작품에 과학을 많이 담는 게 보여서 좀 더 확장된 한국문학을 선보여주길 바라죠.

아무 2015-10-17 18:39   좋아요 1 | URL
저도 항상 생각만 했던 이런 얘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좋네요^^
댓글을 읽다가 문득 한국문학에서 `잉여인간`이 그 모습만 바꾸었을 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사회성`의 발전상처럼 그런 인물의 변천사를 다루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러면서도 요즘 다루어지는 `잉여인간`들이 여태껏 보아왔던 인물들 중 가장 무기력한 유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표출하지 않고 꾹 참는 첫 번째 유형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겠지만, 손창섭의 <비 오는 날>이나 <잉여인간> 같은 경우에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배경이 있었던 반면 지금의 작품들에는 그런 것도 부재한 것 같은, 세계 자체에 대한 무력함이 표출되는 것 같다고 할까..(당장은 윤성희의 작품이나 천명관의 `숟가락아, 구부러져라`가 생각나네요)
장강명 작가가 최근의 한국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특이한 면이 많이 있긴 해요. 그래서 제가 계속 기대하며 작품들을 찾아보는 걸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