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08)

폭력은 타인을 침묵시키고, 타인의 목소리와 신뢰성을 부정하고, 내게 타인이 존재할 권리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방법이다. 미국에서는 매일 약 세명의 여자가 배우자나 옛 배우자에게 살해당한다. 미국에서 임신부의 주요한 사망 원인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것이다.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가정폭력, 직장 내 성희롱을 법적 범죄로 규정하려고 애써온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18-19쪽)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전선이다. (24-25쪽)


<가장 긴 전쟁>(2013)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떤 남성이 성적 접근을 거부한 여성을 칼로 찌른 사건)

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하는 셈이다. 이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궁극의 수단이다. 설령 당신이 고분고분하게 굴더라도 아무 소용없을지 모르는데, 통제의 욕망은 순종으로는 좀처럼 달래기 힘든 격렬한 분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행위의 이면에 모종의 두려움과 취약함이 깔려 있을지라도, 아무튼 그런 행위는 타인에게 괴로움을, 더 나아가 죽음을 부여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식이 범인도 피해자도 비참하게 만든다. (45-46쪽) 


강간을 비롯한 폭력적 행동들, 극단적으로는 살인에까지 이르며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까지 포함하는 이 모든 행동은 일부 남자들이 일부 여자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펼치는 방어막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약하며, 그러다보면 자신도 익숙해져서 그런 상황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50쪽)


<거미 할머니>(2014)

어머니들이 사라지고, 그 어머니들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사라진다. 점점 더 많은 삶들이 세상에 살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면서 숲이 나무로, 그물이 직선으로 다듬어진다. 혈통이나 영향이나 의미의 내러티브를 단선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예술사에서도 그런 일을 줄기차게 보았다. 삐까소(Pablo Picasso)가 폴록(Jackson Pollock)을 낳고 폴록이 워홀(Andy Warhol)을 낳는 식으로, 예술가는 반드시 다른 예술가에게서만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듯한 설명이다. (104쪽)


<울프의 어둠>(2009)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 선언은 예사롭지 않다. 이 선언은 우리가 거짓된 점괘를 믿거나 울적한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내러티브를 미래로 투사함으로써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 선언은 어둠을 칭송하며─'나는 ... 생각한다' 부분이 암시하듯이─스스로의 선언에 대해서조차 기꺼이 불확실함을 인정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둠을 두려워한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캄캄한 것을 두려워하고, 어른들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르는 것, 못 보는 것, 모호한 것이라는 어둠을 겁낸다. 그러나 무언가를 구별하고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 (122-123쪽)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후자의 언어에서라면 울프는 달리 비길 상대가 없었다. (125쪽)


<#여자들은다겪는다>(2014)

T. M. 루어먼(Luhrmann)은 지난해(2013) 신문에 실은 멋진 기고문에서, 인도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환청을 들을 때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집 청소를 하라고 말하곤 하는 데 비해 미국 환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하라는 말을 듣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는 중요하다. 형사사건의 피고 측 조사관으로 일하기 때문에 정신이상과 폭력에 관해서라면 속속들이 잘 아는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현실과의 접촉을 잃기 시작하면, 병든 뇌는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집착적으로, 망상적으로 매달리기 마련이야. 주변 문화의 질병에." (178-179쪽)


내가 최근에 읽은 글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1964년에 뉴욕 퀸스의 주택가에서 살해된 그 유명한 캐서린 '키티' 제노비스(Catherine Kitty Genovese) 사건을 이야기한 『네이션』 기사였다. 기사를 쓴 피터 베이커(Peter Baker)가 우리에게 환기해준바, 제노비스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광경을 자기 집 창문으로 목격한 이웃들 중 일부는 낯선 남자가 저지른 야만적인 폭행을 남편이 '자기' 여자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장면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남자가 아내나 연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대체로 사적인 일로 치부되었던 것, 그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1964년의 법률적 시각에서 남자가 아내를 강간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따는 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같은 용어들은 만들어지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188-189쪽)


우리는 폭력과 권력 남용이 성희롱, 협박, 위협, 구타, 강간, 살인 같은 범주들로 서로 깔끔하게 분류되는 것처럼 다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이해하겠다. 나는 그것이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우리가 여성 혐오의 다양한 양태들을 구획하여 각각 별도로 다루기보다 그 비탈 전체를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다. 구획화란 큰 그림을 조각냄으로써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보게 하는 것이다. (197-198쪽)


<판도라의 상자와 자원경찰들>(2014)

혁명은 사실 특정 체제에서 권력을 확보하는 일이 주가 되는 사건이 아니고, 그보다는 파열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과 제도가 탄생하고 그 충격이 퍼지는 사건이었다. 그레이버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소련 공산주의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뉴딜 정책과 유럽 복지국가들을 낳았다는 점에서 세계적 혁명이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인즉 러시아혁명이 재앙만을 낳았다는 종래의 가설을 뒤집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대열의 맨 마지막은 1968년 세계혁명이었다. 1848년 혁명과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1968년 혁명은 중국에서 멕시코까지 거의 모든 곳에서 터졌고, 그 어디에서도 권력을 잡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것은 국가관료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이었고, 개인적 해방과 정치적 해방을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혁명이었으며, 그 혁명이 남긴 가장 영속적인 유산은 현대 페미니즘의 탄생일 것이다." (213-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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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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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권력이 군림하던 시대가 지나고 규율 권력의 시대가 왔다. 규율 권력을 기반으로 한 생정치는 개인의 몸을 정형하고, 인간을 규범 체계 속에 묶어두며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리고 새롭게 도래한 신자유주의의 권력은 빅데이터를 통해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고 심지어 예측하는 심리정치의 시대를 알린다. 그것은 더이상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사라고, 더 하라고 부추길 따름이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야말로 신자유주의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권력의 차별성이다.


투명성이 강조되고, 개인은 이제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해져 있다(SNS에 한번만 들어가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심리 지도를 구축한 빅데이터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인간을 끊임없이 자아의 최적화를 욕망하는 경영자로, 자기 착취자로 만들었다. 빅데이터는 더이상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투명성이 강조되면서 만인에 의한 만인의 감시 체제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빅데이터는 우리의 모든 것, '좋아요'를 통해 표현되는 심리 상태까지 모두 기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예측할 따름이다. 근대의 빅브라더는 빅데이터로 전환된 것이다.


문제는, 이 책의 서술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일치하는지 여부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리고 내면의 기록이 범람하는 디지털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라고 쓰고 착취라 읽는다)과 최적화(힐링으로 대표되는 세태)를 추구하는 분위기를 보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빅데이터의 손길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돌려보면, 여전히 한국 사회는 빅브라더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회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잦아진 "2분 증오"의 편린들, 전혀 투명해지지 않고 감춰지는 정보들은 우리가 여전히 규율 권력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한없이 투명해지는 것은 소비자일 뿐, 우리에게 소비재를 제공하는 대상은 전혀 투명하지 않다. 신자유주의가 노동자를 자기 경영자로 탈바꿈시켜 자신의 자유를 착취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친절해진 빅브라더/빅데이터는 여전히 베일에 감춰져 있다. 우리의 욕구를 우리 자신이 인식하기도 전에 그것을 예측해 눈앞에 내놓을 따름이다.


한병철의 책을 처음 읽었는데, 다른 작품인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도 이 책의 연장선상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심리정치』가 셋 중에 가장 나중에 나온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결국 피로는 자기 착취가 진행 중임을 나타내는 표지일 것이고, 투명사회는 디지털 심리정치를 가능하게 한, 빅데이터의 탄생을 초래한 원인일 것이다. 저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날카롭게 벼려져 현대 사회의 이면을 찌르고 있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생각이 언어화되어 있었다. 다만 한국 사회가 규율 권력의 시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에 잘 적용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빅브라더와 빅데이터가 뒤섞인 이곳은 아직 권력이 '스마트'해지진 않았다.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바보"가 되는 것,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상상을 초월하는 외부 공간"에 거주하는 것, 그로 인해 주체로부터 해방되고 탈예속화·탈심리화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바보가 되는 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은 결국 개인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어떤 흐름을 형성해서 신자유주의 질서에 반하는 새로운 변혁을 창조할 수 있을까? 이미 자본이 부여한 자유의 착각에 깊이 얽혀버린 현대인에게, "바보"가 되는 길은 새로운 인간형의 등장뿐인가? 내가 이토록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보"가 되는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이미 견고해진 구조에 맞설 수 있는 개인의 의지를 신뢰할 수 없게 되어서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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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04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병철의 책을 출간 순서대로 읽어보면 전작에 언급했던 주제를 무한 루트로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도돌이표인거죠. ㅎㅎㅎ

아무 2016-05-04 17:14   좋아요 0 | URL
어쩐지.. 분명 심리정치를 읽고 있는데 투명성이 자주 나와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군요 ㅎㅎ 이 책 먼저 읽고 다른 책도 읽어보려 했는데 고민이 됩니다..^^;;
 

고전이란 누구나 이야기하지만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책, 또는 시대를 막론하고 그 의미가 바래지 않는 책을 말하기도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너무나 당연한 말들로 남은 책을 가리키기도 한다. 내가 처음 『자기만의 방』을 읽을 때의 감상은 그랬다. 하지만 읽을수록 현대 사회는 울프가 살았던 사회에서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씁쓸해졌다. 비단 한국 사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울프나 밀이 말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주제들은 제도적으로 이미 해결된 문제처럼 보이지만, 제도 아래 감춰진 허상을 생각하면, 갈 길이 너무나도 멀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민음사에서 나온 『자기만의 방』은 「자기만의 방」과 「3기니」를 한 권으로 묶었다. 「자기만의 방」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책을 읽지 않아도 워낙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고정된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강연문에서 저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누이, 주디스 이야기가 나온다. 주디스를 통해 울프가 말하려는 바는 결국, 남자들의 질타와 억압이 여성의 재능을 가로막고, 이런 배경에서는 어떤 여성도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어떤 여성이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 같은 천재는 교육받지 못하고 노동하며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천재는 영국의 색슨족이나 브리튼족에서 태어난 적이 없으며 오늘날 노동 계층에서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천재가 어떻게 여성들 가운데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트리벨리언 교수에 의하면 여성들은 아이 방에서 나올 나이가 되기 이전부터 가사를 시작해야 했으며, 그렇게 하도록 부모들에게 강요받고 법과 관습의 강제력에 의해 억눌렸던 것입니다. (75-76쪽)


굉장히 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 전체로 보았을 때 울프가 지향하는 바는 저 멀리에 있다.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성에 구애받지 않는 문학, 남성들에게 받았던 억압에 대한 반발심이 전혀 티가 나지 않는 문학, 양성성을 갖춘 문학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기본적인 조건도 보장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녀는 고정된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라는, 대단히 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미 제도상으로는 울프가 말하는 두 가지가 모두 가능했다는 점이다. 울프가 이 강연문을 썼을 때는 이미 기혼 여성의 재산 소유가 법으로 허용되었고, 1차 대전 이후 여성의 참정권 역시 보장되었다. 전문직에 나아갈 수도 있었다(성직은 제외하고). 그러나 남녀 간의 임금 격차는 어마어마했고(요즘도 자주 듣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여성이 글을 쓴다거나 교육을 받는 일은 사회적인 멸시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울프는 여성이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이 되지 못하도록 막는 모든 억압과 차별에 맞서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자기만의 방을 내세웠을 것이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세계는 얼마나 바뀌었나.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원인 중 첫번째다. 질병통제센터에 따르면, 매년 발생하는 그런 부상자 200만명 가운데 50만명 이상은 의료 처치를 받아야 하고 145,000명 가량은 입원해야 한다. 사후에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다. 미국 임신부의 사망원인 중 수위에 꼽히는 것 또한 배우자 폭행이다.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2015, 49-50쪽)


울프의 시대에는 언급되지 않던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뿐, 차별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듯 보인다. 의식의 변화는 미세하게나마 보이는 듯해도, 그것이 평등으로의 진일보를 보여주진 못한다. 이 에세이는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울프의 주장과 문학관을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지만, 울프의 연인이었던 비타 새크빌-웨스트도 "이 책의 거슬리는 점들을 싫어"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니, 주류 남성 사회에서 보였을 반응은 무관심 또는 멸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은 그녀가「3기니」를 쓰게 된 배경이 된다.


「3기니」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세 통의 편지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피력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통의 편지는 '문화와 지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방법을 문의한 중년 변호사의 편지, 여자대학 재건 기금을 요청하는 편지, 여성의 전문직 진출을 원조하려는 협회의 기금 요청 편지다. 각 장은 울프가 이들에게 1기니를 동봉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어떤 숙고의 과정을 거치는지를 보여주는데, 「자기만의 방」과 달리 이 작품에는 울프의 분노가 어려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끝에는 전쟁의 시발점이 된 파시즘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부장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솔닛의 태도와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지금 남성들을 빈둥거리도록 내몰고 있는 여성들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다. 더 많은 남성들에게 일거리를 주도록, 그리하여 그들이 지금은 접근할 수도 없는 여성들과 결혼할 수 있도록, 정부가 고용주들에게 압력을 넣을 때가 되었다." 이 옆에 다른 문장을 인용해 봅시다. "국가의 삶에는 두 가지 세계, 즉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세계가 있다. 자연은 현명하게도 남성에게 그의 가족과 국가를 보살피도록 위탁했다. 여성의 세계는 그녀의 가족과 남편, 아이들과 가정이다." 전자는 영어로 기록되었고 후자는 독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이 두 가지가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어로 말하건 독일어로 말하건 간에, 이것은 둘 다 독재자의 목소리가 아닙니까? (259-260쪽)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IMF였다. 그는 그녀에게 올가미를 걸어 약탈당하게 했고, 보건 써비스를 폐지하게 했고, 굶주리게 했다. 자신의 친구들을 배불리기 위해서 그녀에게 쓰레기를 투척했다. 그녀의 이름은 남반구였다. 그의 이름은 워싱턴 컨센서스였다. (...) IMF는 포식세력이었다. 개발도상국들의 문호를 열어젖혀 부유한 북반구와 강력한 초국적기업들의 경제공세를 겪게끔 만들었다. IMF는 포주였다. 어쩌면 지금도 그렇다.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72-73쪽)


현대 사회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젠더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나에게 생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3기니」를 함께 놓고 보면 솔닛의 관점이 울프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울프는 남성성이 갖는 특질 자체에 더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가부장제 역시 폭력이나 잔인함 등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의 발현으로 파악한다는 이야기다.


「3기니」에서 세 편지들에 대한 답변은 교육, 전문직, 문화와 지적 자유에 대한 의문 제기로부터 시작한다. 울프는 '교육받은 남성의 딸'이 전쟁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데,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웃사이더'로서의 여성의 역할이다. 당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제도(교육과 전문직, 문화 등을 모두 포함해서)는 냉혹함과 폭력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제도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여성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의 교사 역할을 해온 '가난, 순결, 조롱, 비실재적 충성심으로부터의 자유'는 여성을 무급 직업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전쟁을 야기한 제도와 문화에 물들지 않게 해주기도 한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울프의 주장은 폭력성, 잔혹함이 내재된 남성성과 대비되는 여성성의 긍정적 측면을 전제하고 있으며, '비실재적 충성심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국적성으로 확대되는 주장은 세계보편주의 같다는 느낌도 준다.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이 울프가 말한 것처럼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하지만 솔닛의 책을 읽다보면 왜 폭력성이 남성에게만 현저하게 나타나는지 고민하게 된다...), 교육받은 여성으로 범위를 한정하여 계급적인 측면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견해가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3기니」의 주를 보면, 울프는 교육받은 자가 '노동 계층에 속하는 체하'는 것을 경계했기에 자신이 속한 계층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성적 차이에 있어서는, 그것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흐름의 결과 형성된 것으로 본 것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 시기를 살았던 개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울프가 아웃사이더로서의 여성의 활동을 강조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두려워하는 것은 남성의 강력한 잠재의식적 동기, 즉 지배의 욕구다(울프가 인용한 그렌스테드 교수의 말에 따르면 '유아 집착증'이다). 지배 욕구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남성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귀결되고, 이는 다시 독재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미지화된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 자신이 그 인물과 분리될 수 없고 바로 그 인물 자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의 형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여성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라고 답하며 글은 마무리된다. 그녀의 궁극적인 주장은 사실 이상주의에 가깝고,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두 작품의 문제의식이 유효한 것은 여전히 가부장제의 모순이 유효하고, 여전히 여성에게 실질적인 '자기만의 방'이 제공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쓰다보니 (또다시) 기승전결없이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 되어버린 듯하다. 워낙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핵심만 추려내지 못하는 내 능력 탓이다. 사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따로 있다. 여전히 사회 구조나 관습이 여성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데도, 여성의 평등을 보장하는 정책들이 '지나치다'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여성 혐오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 혐오의 언어와 사고가 다시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미디어가 페미니즘의 자극적인 면모에만 주목하고 부각시킨 것이 한몫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언론만을 탓할 수 있을까? 플랫폼이 바뀌었다. 자극적이어야만 헤드라인에 올라가고, 그것은 더 자극적인 내용에 의해 지워진다). 다시 돌아와서, 여전히 혐오의 언어가 난무하는 사회에 '자기만의 방'은 진짜 있는 것인가. 혹, 아웃사이더(outsider)였던 여성이 권리를 보장받으면서 내부(inside)로 들어와 다시 그 체제에 종속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젠더가 해결되지 않는 이슈라는 점에서, 『자기만의 방』이 갖는 가치는 아직 유효하다. 울프의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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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언제, 어디서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소만 적절하다면 언제라도 괜찮죠. 잠자는 시간 빼고는.. 사실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소파인데, 등을 푹 기대고 다리를 쭉 편 채로 책을 읽을 때 가장 잘 읽힙니다. 여기에 커피 한 잔만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까페나 도서관 등에서도 자주 책을 읽지만 저에게 책을 읽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주변의 소리이기 때문에, 시끌벅적한 공간에서는 잘 읽지 않습니다. 조용하기만 하면 지하철 안에서 서 있는 동안에도 책은 읽을 수 있죠. 그래도 소파가 제일 낫습니다.

Q2. 독서 습관이 궁금합니다. 종이책을 읽으시나요? 전자책을 읽으시나요? 읽으면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접거나 하시나요?

거의 종이책을 읽습니다. 전자책보다 더 집중이 잘 되고, 전자책은 책의 형태가 아니라 텍스트 파일 같이 변형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라서.. 움베르토 에코의 퍼포먼스가 보여주듯, 시간이 지나도 종이책이 전자책을 넘어서지는 못할 겁니다. 책의 존재 자체가 없어지지 않는다면야..

독서 습관은.. 예전에는 책을 굉장히 깨끗하게 읽었는데, 문득 '어차피 이 책들을 내가 팔지도 않을 거고, 누구한테 주지도 않아 온전히 내 책이 될 텐데 이렇게 애지중지 하듯 모실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더불어 점점 기억력이 나빠지고 집중력도 떨어지기 시작해서, 책장을 접고 밑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치기 시작하니까 거침없이 긋게 되더라구요.. 밑줄은, 일단 문장이 마음에 들면 치고, 책을 읽으면서 기억해야 할 부분이면 치고, 나중에 따로 정리할 때 참고해야 할 부분에 칩니다. 그리고 밑줄을 친 페이지는 항상 접죠. 보통 밑줄 친 페이지의 아랫부분을 접는데, 읽으면서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거나, 윤문이 제대로 안 되어 있는 부분은 윗부분을 접습니다. 이렇게 접고 밑줄을 쳐도 나중에 보면 '내가 여기에 왜 밑줄을 쳤지..?'하고 고민할 때가 많아서 이따금 포스트잇(그 뭐냐.. 큰 거 말고 책갈피처럼 표시할 수 있는 그거요)에 핵심어만 적어놓고 붙여놓기도 하죠. 나중에 그걸 보고도 기억나지 않을 때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Q3. 지금 침대 머리 맡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나요? 

지금 제 침대에는 골격이 없습니다. 사실 침대가 아니라 그냥 매트리스... 침대에 엎드려서 책을 읽는 시간이 거의 없어지기도 했고, 요즘 아침하고 밤에만 집에 있는 일이 많다보니, 집에서는 책상에서 잠시 읽다가 올려놓고 침대로 가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지금 제 책상에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 페소아의 『불안의 책』, 우석영의 『철학이 있는 도시』, 그리고 『로쟈의 인문학 서재』가 놓여 있네요. 『시지프 신화』를 제외하고는 아직 책갈피가 꽂혀 있습니다. 페소아 책은 읽기 시작한지 세 달이 다 된 거 같은데 아직도 반을 넘기지 못했네요. 『시지프 신화』는 읽으면서 밑줄 친 부분을 정리하려고 놓아둔 건데, 너무 많아서 엄두가 안나요. 아마 오늘도 이 문답 다 적으면 또 미루겠죠...







Q4. 개인 서재의 책들은 어떤 방식으로 배열해두시나요? 모든 책을 다 갖고 계시는 편인가요, 간소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편인가요? 

일단 전집별로 구분을 해놓고, 그다음엔 같은 작가들끼리 구별을 해놓죠. 이렇게 놓다 보면 가끔씩 난감한 경우가 생기는데, 카뮈의 다른 책들은 전부 전집(책세상)으로 사놓고 『페스트』만 민음사본으로 사 놓은 경우라든가, 새로 나온 『이방인』 개정판이 전집과 다르게 양장본이라든가, 아멜리 노통브처럼 문학세계사랑 열린책들 판본이 뒤섞여 있는 경우도 있죠(이건 디자인도 너무 확 달라서 난감합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작가를 1순위에 두고 정리를 합니다. 요즘엔 이런 고민이 적은 편인데, 난감한 일이 생기지 않아서라기보단 책을 꽂을 공간이 점점 줄고 있어요. 책 위에 책을 얹을 수밖에 없는... 정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저는 책을 헌책방에 다시 내놓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간소하게 줄이는 일 같은 건 없을 거 같네요.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책을 딱 한 번 팔아봤습니다. 되게 후회하고 있지만, 다시 사진 않았어요..

Q5.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무엇입니까? 

음... 얼마나 어렸을 때인지.. 어렸을 때 집에 90권짜리 동화책 세트가 있었는데 엄청 많이 읽었죠. 몇 번씩이나 계속.. 그때부터 책 읽기를 취미로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과를 갔을지도...ㅎㅎ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책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인데, 그 당시에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었죠. 자신의 상상력을 이렇게까지 밀고 나가면서 지식이 채워져 있는 소설을 처음 봤으니까.. 그 덕분에 본격적으로 책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고, 독서 경험이 한 단계를 넘어서는 계기가 되었죠. 지금은 더 이상 팬이라고 하기 그렇지만, 그 때 그 경험은 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경험입니다..

Q6. 당신 책장에 있는 책들 가운데 우리가 보면 놀랄 만한 책은 무엇일까요? 

진짜 열심히 찾아봤는데, 없네요.. 너무 뻔한 사람이라 그런가.. 전공서적이나 수험서 아니면 (인)문학 서적밖에 안 보이네요. 그나마 놀랄 만한 건... 고등학교 졸업 앨범? 표지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노려보고 있어요..

Q7. 고인이 되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 중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만나면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전에는 작가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썼을까, 하는 생각이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고 그랬는데, 지금은 별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네요. 물론 가끔 책이 정말 이해가 안될 때면 만나서 묻고 싶을 때가 있긴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따지면서.. 그럴 때를 제외하면 딱히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작가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몰랐던 내용을 이해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셰익스피어는 만나보고 싶네요. 책 내용이 궁금한 건 아니고 그를 둘러싼 논란의 실체를 알고 싶어서.

Q8. 늘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습니까? 

너무 많은데... 일단 박경리 작가의 『토지』가 있죠. 전권을 사놓고 여태 한 페이지도 안 읽어본... 먼지만 쌓이고 있고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도 있습니다. 여섯 권으로 분권되어 있는 걸 샀는데, 계속 미루고 있어요. 맨날 궁금해하기만 하고... 만약 합본이었으면 엄두도 못냈겠죠? 롤랑 마뉘엘의 『음악의 기쁨』(전 4권)도 계속 미루고 있는 책 중에 하나죠. 전 하루의 절반 이상을 음악을 들으며 보내기도 하고, 클래식 음악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 싶어서 산 책인데, 이것도 계속 미루기만 합니다.. 그리고 『돈키호테』. 고등학교 때 시공사판(그땐 아직 1권밖에 없었어요)으로 3분의 2 정도까지 읽다가 그만 둔 뒤에(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와서..)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열린책들판 두 권을 샀어요. 이미 줄거리도 거의 다 잊어버린 상태라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지 읽어야지 말만 하다가, 정작 책은 펴지도 않고 해설서인 『돈키호테를 읽다』를 사버렸죠. 원작을 읽어야 해설서를 읽든지 말든지 하는데...






Q9. 최근에 끝내지 못하고 내려놓은 책이 있다면요? 

최근은 아니지만, 이태준 작가의 『문장강화』를 다 못 읽고 덮어 두었어요. 내용이 못 읽겠어서는 (절대!!) 아니고, 읽던 중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계속 겹쳐서 몇 달 동안 놓고 있었더니 흐름을 놓쳐버려서... 소설의 줄거리 같은 흐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책을 읽을 때의 흐름을 놓치면 끝까지 못 읽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될 것 같아요. 『문장강화』는 글쓰기를 위한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글쓰기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 책만한 글쓰기 교본을 찾긴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어요. 예문이 워낙 오래 전 것이라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도 다 못 읽고 있는 책이지만 아직 내려놓지는 않았는데, 자꾸 읽어야 할 책이 생기다보니 차일피일 미루고 있네요. 외적인 사정도 있지만, 200개의 조각난 소아르스들을 보고 나서 남은 200여 개의 파편들을 읽어낼 생각을 하니 엄두가 안 나기도 하고.. 소아르스의 일기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가 좌절, 우울함, 절망 같은 것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Q10. 무인도에 세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음... 일단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강의』를 가져가고(안 그러면 계속 안 읽을 것 같은...),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을 가져갈게요. 앞의 두 권은 아직 안 읽은 책이라 그렇고, 최승자 시인의 시집은 위로삼아.. 안 그래도 혼자라서 외로운데 가장 애정하는 시에라도 기대야죠. 이 시집을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외로움의 폭력」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 근데 『마의 산』이 분권되어 있으니까 두 권으로 치는 건가?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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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4-23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의 강요로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안 좋았지만, 다행히 독서의 특별한 재미를 알게 된 덕분에 지금도 책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

아무 2016-04-23 12:03   좋아요 0 | URL
전 강요를 받진 않았지만, 환경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었죠. 집에 장난감이 없었거든요.. 의도하셨던 것 같긴 합니다만.. ㅎㅎ
어릴 때도 활동적이지 않았던 저는 책이랑 티비 보는 걸 제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 덕에 안경을 일곱 살 때부터 끼고 있죠^^;;

2017-12-23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전집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7년 4월
평점 :
절판


카뮈의 글은 항상 읽기가 어렵다. 『이방인』도 그랬고, 『페스트』도 그랬으며 『시지프 신화』도 그랬다.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부조리의 문학이 잘 읽히길 바라는 게 사치인가, 라는 생각도 해 보고, 지시어가 너무 많아서 잘 안 읽히는 건가라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만두었다. 일종의 고행과 같은 독서가 끝나면, 부조리 안에 우뚝 서 있는 카뮈라는 한 인간을 만날 수 있으니.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 반항은 갈망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반항은 짓눌러오는 운명의 확인이다. 그러나 그런 확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한 채의 확인인 것이다. (83-84쪽)


『시지프 신화』는 세 개의 장('부조리의 추론', '부조리한 인간', '부조리한 창조')과 에필로그('시지프 신화'), 그리고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평론이 부록으로 실려있다. '부조리의 추론'은 저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15쪽) 카뮈가 생각하는 세계와 삶의 관계는 '부조리' 그 자체다. '부조리'는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장치 사이의 절연"이다.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직면해 있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습관' 속에서 관성에 젖어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게 바위를 굴리는 것과 같은 '습관' 속에서 부조리를 인지하는 순간은 바위를 올리고 다시 산을 내려오는 순간, '의식'의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다.


먼저 카뮈는 합리적이지 않은 부조리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태도 중 자살과 희망에 초점을 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부조리함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행위다. 그는 부조리의 풍토를 발견한 철학자들,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야스퍼스, 체스토프, 후설이 부조리의 의식에서 어떤 귀결을 이끌어내는지 주목하고, 그들이 모두 그 귀결을 '희망'에 두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를 '철학적 자살'이라 지칭한다. 카뮈에게 희망이란 "삶에 어떤 의미를 주며 결국은 삶을 배반하게 되는 거창한 관념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22쪽)일 뿐이기 때문다. 자살 역시 마찬가지다. 자살은 부조리의 문제 자체를 폐기하는 일이기 때문에 부조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다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최극단의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매일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서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85쪽)


희망과 자살이라는 문제를 논한 뒤 카뮈가 제안하는 태도는 바로 '반항'이다. 부조리는 세계와 인간의 관계의 단절이지만, 동시에 그 둘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매듭이기도 하다. 부조리를 인식하는 인간의 정신과 세계는 "서로 힘 겨루듯이 밀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65쪽) 결국 카뮈가 제안하고 있는 반항은 부조리라는 매듭에 매달리는 것이 된다. 합리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 부조리의 세계에서, 인간에게 자명한 것은 부조리뿐이기 때문이다. 이 부조리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하는 명철한 의식이야말로 반항을 지탱하는 요소가 된다. 모든 삶이 곧 반항이어야 한다는 것이 부조리의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조리가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은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므로, 이것은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물론 자유는 영원하지 않다. 인간은 결국 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자유에는 한계가 없다. 두 번째 귀결인 자유의 개념에서 카뮈는 '양(量)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이 논의는 '부조리한 인간'에서 돈 후안의 사례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한계 없는 자유를 책임 없는 방종으로 치부하는 것보다는, 생의 모든 순간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소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 듯하다.


카뮈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단절을 '의식'하는 부조리를 논의하고 있지만, 그의 초점은 부조리한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행복한 시지프'로 표상되는 일련의 태도, 즉 반항, 자유, 열정으로 나타난다. 남은 두 개의 장, '부조리한 인간'과 '부조리한 창조'는 첫 번째 장인 '부조리의 추론'의 부연이다(..라고 마음대로 정의해본다). 부조리를 대하는 인간의 풍토와 부조리한 창조자와 작품의 모습을 통해 부조리와 마주한 인간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조리에 대응하는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은 마치 초인과 같이 느껴지지만, 이를 열렬하게 외치는 카뮈의 글에는 넘치는 열정이 있다. '부조리'에서 출발한 그의 문학적 테마가 '반항'으로 나아가는 것, 즉 『이방인』에서 『페스트』로 나아가는 도정은 당연한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줄거리가 가물가물한 『이방인』을 떠올리며 그 작품은 결국 '부조리의 감수성'의 소설적 재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왜 부조리한 세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은 남는다. 세계는 그 자체로 이미 부조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부조리의 감수성이 갖는 문제들(이러면 결국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이 있지만, 시지프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태도와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카뮈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쉽게 술술 읽히는 문장은 아니었으며, 중간중간 막히는 부분도 꽤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수록된 김화영 평론가의 해설은 『시지프 신화』가 나오게 된 배경과 내용을 잘 정리해주고 있으므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이 글을 쓰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보다 더 간단한 설명을 찾으려면 김용규의 『철학까페에서 문학읽기』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페스트』를 다룬 장에서 『시지프 신화』를 언급하며 '부조리'와 '반항'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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