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란 누구나 이야기하지만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책, 또는 시대를 막론하고 그 의미가 바래지 않는 책을 말하기도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너무나 당연한 말들로 남은 책을 가리키기도 한다. 내가 처음 『자기만의 방』을 읽을 때의 감상은 그랬다. 하지만 읽을수록 현대 사회는 울프가 살았던 사회에서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씁쓸해졌다. 비단 한국 사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울프나 밀이 말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주제들은 제도적으로 이미 해결된 문제처럼 보이지만, 제도 아래 감춰진 허상을 생각하면, 갈 길이 너무나도 멀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민음사에서 나온 『자기만의 방』은 「자기만의 방」과 「3기니」를 한 권으로 묶었다. 「자기만의 방」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책을 읽지 않아도 워낙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고정된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강연문에서 저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누이, 주디스 이야기가 나온다. 주디스를 통해 울프가 말하려는 바는 결국, 남자들의 질타와 억압이 여성의 재능을 가로막고, 이런 배경에서는 어떤 여성도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어떤 여성이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 같은 천재는 교육받지 못하고 노동하며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천재는 영국의 색슨족이나 브리튼족에서 태어난 적이 없으며 오늘날 노동 계층에서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천재가 어떻게 여성들 가운데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트리벨리언 교수에 의하면 여성들은 아이 방에서 나올 나이가 되기 이전부터 가사를 시작해야 했으며, 그렇게 하도록 부모들에게 강요받고 법과 관습의 강제력에 의해 억눌렸던 것입니다. (75-76쪽)


굉장히 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 전체로 보았을 때 울프가 지향하는 바는 저 멀리에 있다.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성에 구애받지 않는 문학, 남성들에게 받았던 억압에 대한 반발심이 전혀 티가 나지 않는 문학, 양성성을 갖춘 문학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기본적인 조건도 보장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녀는 고정된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라는, 대단히 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미 제도상으로는 울프가 말하는 두 가지가 모두 가능했다는 점이다. 울프가 이 강연문을 썼을 때는 이미 기혼 여성의 재산 소유가 법으로 허용되었고, 1차 대전 이후 여성의 참정권 역시 보장되었다. 전문직에 나아갈 수도 있었다(성직은 제외하고). 그러나 남녀 간의 임금 격차는 어마어마했고(요즘도 자주 듣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여성이 글을 쓴다거나 교육을 받는 일은 사회적인 멸시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울프는 여성이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이 되지 못하도록 막는 모든 억압과 차별에 맞서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자기만의 방을 내세웠을 것이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세계는 얼마나 바뀌었나.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원인 중 첫번째다. 질병통제센터에 따르면, 매년 발생하는 그런 부상자 200만명 가운데 50만명 이상은 의료 처치를 받아야 하고 145,000명 가량은 입원해야 한다. 사후에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다. 미국 임신부의 사망원인 중 수위에 꼽히는 것 또한 배우자 폭행이다.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2015, 49-50쪽)


울프의 시대에는 언급되지 않던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뿐, 차별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듯 보인다. 의식의 변화는 미세하게나마 보이는 듯해도, 그것이 평등으로의 진일보를 보여주진 못한다. 이 에세이는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울프의 주장과 문학관을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지만, 울프의 연인이었던 비타 새크빌-웨스트도 "이 책의 거슬리는 점들을 싫어"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니, 주류 남성 사회에서 보였을 반응은 무관심 또는 멸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은 그녀가「3기니」를 쓰게 된 배경이 된다.


「3기니」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세 통의 편지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피력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통의 편지는 '문화와 지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방법을 문의한 중년 변호사의 편지, 여자대학 재건 기금을 요청하는 편지, 여성의 전문직 진출을 원조하려는 협회의 기금 요청 편지다. 각 장은 울프가 이들에게 1기니를 동봉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어떤 숙고의 과정을 거치는지를 보여주는데, 「자기만의 방」과 달리 이 작품에는 울프의 분노가 어려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끝에는 전쟁의 시발점이 된 파시즘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부장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솔닛의 태도와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지금 남성들을 빈둥거리도록 내몰고 있는 여성들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다. 더 많은 남성들에게 일거리를 주도록, 그리하여 그들이 지금은 접근할 수도 없는 여성들과 결혼할 수 있도록, 정부가 고용주들에게 압력을 넣을 때가 되었다." 이 옆에 다른 문장을 인용해 봅시다. "국가의 삶에는 두 가지 세계, 즉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세계가 있다. 자연은 현명하게도 남성에게 그의 가족과 국가를 보살피도록 위탁했다. 여성의 세계는 그녀의 가족과 남편, 아이들과 가정이다." 전자는 영어로 기록되었고 후자는 독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이 두 가지가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어로 말하건 독일어로 말하건 간에, 이것은 둘 다 독재자의 목소리가 아닙니까? (259-260쪽)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IMF였다. 그는 그녀에게 올가미를 걸어 약탈당하게 했고, 보건 써비스를 폐지하게 했고, 굶주리게 했다. 자신의 친구들을 배불리기 위해서 그녀에게 쓰레기를 투척했다. 그녀의 이름은 남반구였다. 그의 이름은 워싱턴 컨센서스였다. (...) IMF는 포식세력이었다. 개발도상국들의 문호를 열어젖혀 부유한 북반구와 강력한 초국적기업들의 경제공세를 겪게끔 만들었다. IMF는 포주였다. 어쩌면 지금도 그렇다.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72-73쪽)


현대 사회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젠더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나에게 생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3기니」를 함께 놓고 보면 솔닛의 관점이 울프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울프는 남성성이 갖는 특질 자체에 더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가부장제 역시 폭력이나 잔인함 등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의 발현으로 파악한다는 이야기다.


「3기니」에서 세 편지들에 대한 답변은 교육, 전문직, 문화와 지적 자유에 대한 의문 제기로부터 시작한다. 울프는 '교육받은 남성의 딸'이 전쟁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데,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웃사이더'로서의 여성의 역할이다. 당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제도(교육과 전문직, 문화 등을 모두 포함해서)는 냉혹함과 폭력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제도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여성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의 교사 역할을 해온 '가난, 순결, 조롱, 비실재적 충성심으로부터의 자유'는 여성을 무급 직업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전쟁을 야기한 제도와 문화에 물들지 않게 해주기도 한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울프의 주장은 폭력성, 잔혹함이 내재된 남성성과 대비되는 여성성의 긍정적 측면을 전제하고 있으며, '비실재적 충성심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국적성으로 확대되는 주장은 세계보편주의 같다는 느낌도 준다.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이 울프가 말한 것처럼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하지만 솔닛의 책을 읽다보면 왜 폭력성이 남성에게만 현저하게 나타나는지 고민하게 된다...), 교육받은 여성으로 범위를 한정하여 계급적인 측면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견해가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3기니」의 주를 보면, 울프는 교육받은 자가 '노동 계층에 속하는 체하'는 것을 경계했기에 자신이 속한 계층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성적 차이에 있어서는, 그것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흐름의 결과 형성된 것으로 본 것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 시기를 살았던 개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울프가 아웃사이더로서의 여성의 활동을 강조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두려워하는 것은 남성의 강력한 잠재의식적 동기, 즉 지배의 욕구다(울프가 인용한 그렌스테드 교수의 말에 따르면 '유아 집착증'이다). 지배 욕구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남성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귀결되고, 이는 다시 독재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미지화된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 자신이 그 인물과 분리될 수 없고 바로 그 인물 자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의 형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여성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라고 답하며 글은 마무리된다. 그녀의 궁극적인 주장은 사실 이상주의에 가깝고,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두 작품의 문제의식이 유효한 것은 여전히 가부장제의 모순이 유효하고, 여전히 여성에게 실질적인 '자기만의 방'이 제공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쓰다보니 (또다시) 기승전결없이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 되어버린 듯하다. 워낙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핵심만 추려내지 못하는 내 능력 탓이다. 사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따로 있다. 여전히 사회 구조나 관습이 여성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데도, 여성의 평등을 보장하는 정책들이 '지나치다'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여성 혐오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 혐오의 언어와 사고가 다시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미디어가 페미니즘의 자극적인 면모에만 주목하고 부각시킨 것이 한몫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언론만을 탓할 수 있을까? 플랫폼이 바뀌었다. 자극적이어야만 헤드라인에 올라가고, 그것은 더 자극적인 내용에 의해 지워진다). 다시 돌아와서, 여전히 혐오의 언어가 난무하는 사회에 '자기만의 방'은 진짜 있는 것인가. 혹, 아웃사이더(outsider)였던 여성이 권리를 보장받으면서 내부(inside)로 들어와 다시 그 체제에 종속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젠더가 해결되지 않는 이슈라는 점에서, 『자기만의 방』이 갖는 가치는 아직 유효하다. 울프의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