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08)

폭력은 타인을 침묵시키고, 타인의 목소리와 신뢰성을 부정하고, 내게 타인이 존재할 권리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방법이다. 미국에서는 매일 약 세명의 여자가 배우자나 옛 배우자에게 살해당한다. 미국에서 임신부의 주요한 사망 원인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것이다.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가정폭력, 직장 내 성희롱을 법적 범죄로 규정하려고 애써온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18-19쪽)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전선이다. (24-25쪽)


<가장 긴 전쟁>(2013)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떤 남성이 성적 접근을 거부한 여성을 칼로 찌른 사건)

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하는 셈이다. 이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궁극의 수단이다. 설령 당신이 고분고분하게 굴더라도 아무 소용없을지 모르는데, 통제의 욕망은 순종으로는 좀처럼 달래기 힘든 격렬한 분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행위의 이면에 모종의 두려움과 취약함이 깔려 있을지라도, 아무튼 그런 행위는 타인에게 괴로움을, 더 나아가 죽음을 부여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식이 범인도 피해자도 비참하게 만든다. (45-46쪽) 


강간을 비롯한 폭력적 행동들, 극단적으로는 살인에까지 이르며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까지 포함하는 이 모든 행동은 일부 남자들이 일부 여자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펼치는 방어막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약하며, 그러다보면 자신도 익숙해져서 그런 상황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50쪽)


<거미 할머니>(2014)

어머니들이 사라지고, 그 어머니들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사라진다. 점점 더 많은 삶들이 세상에 살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면서 숲이 나무로, 그물이 직선으로 다듬어진다. 혈통이나 영향이나 의미의 내러티브를 단선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예술사에서도 그런 일을 줄기차게 보았다. 삐까소(Pablo Picasso)가 폴록(Jackson Pollock)을 낳고 폴록이 워홀(Andy Warhol)을 낳는 식으로, 예술가는 반드시 다른 예술가에게서만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듯한 설명이다. (104쪽)


<울프의 어둠>(2009)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 선언은 예사롭지 않다. 이 선언은 우리가 거짓된 점괘를 믿거나 울적한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내러티브를 미래로 투사함으로써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 선언은 어둠을 칭송하며─'나는 ... 생각한다' 부분이 암시하듯이─스스로의 선언에 대해서조차 기꺼이 불확실함을 인정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둠을 두려워한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캄캄한 것을 두려워하고, 어른들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르는 것, 못 보는 것, 모호한 것이라는 어둠을 겁낸다. 그러나 무언가를 구별하고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 (122-123쪽)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후자의 언어에서라면 울프는 달리 비길 상대가 없었다. (125쪽)


<#여자들은다겪는다>(2014)

T. M. 루어먼(Luhrmann)은 지난해(2013) 신문에 실은 멋진 기고문에서, 인도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환청을 들을 때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집 청소를 하라고 말하곤 하는 데 비해 미국 환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하라는 말을 듣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는 중요하다. 형사사건의 피고 측 조사관으로 일하기 때문에 정신이상과 폭력에 관해서라면 속속들이 잘 아는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현실과의 접촉을 잃기 시작하면, 병든 뇌는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집착적으로, 망상적으로 매달리기 마련이야. 주변 문화의 질병에." (178-179쪽)


내가 최근에 읽은 글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1964년에 뉴욕 퀸스의 주택가에서 살해된 그 유명한 캐서린 '키티' 제노비스(Catherine Kitty Genovese) 사건을 이야기한 『네이션』 기사였다. 기사를 쓴 피터 베이커(Peter Baker)가 우리에게 환기해준바, 제노비스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광경을 자기 집 창문으로 목격한 이웃들 중 일부는 낯선 남자가 저지른 야만적인 폭행을 남편이 '자기' 여자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장면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남자가 아내나 연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대체로 사적인 일로 치부되었던 것, 그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1964년의 법률적 시각에서 남자가 아내를 강간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따는 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같은 용어들은 만들어지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188-189쪽)


우리는 폭력과 권력 남용이 성희롱, 협박, 위협, 구타, 강간, 살인 같은 범주들로 서로 깔끔하게 분류되는 것처럼 다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이해하겠다. 나는 그것이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우리가 여성 혐오의 다양한 양태들을 구획하여 각각 별도로 다루기보다 그 비탈 전체를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다. 구획화란 큰 그림을 조각냄으로써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보게 하는 것이다. (197-198쪽)


<판도라의 상자와 자원경찰들>(2014)

혁명은 사실 특정 체제에서 권력을 확보하는 일이 주가 되는 사건이 아니고, 그보다는 파열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과 제도가 탄생하고 그 충격이 퍼지는 사건이었다. 그레이버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소련 공산주의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뉴딜 정책과 유럽 복지국가들을 낳았다는 점에서 세계적 혁명이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인즉 러시아혁명이 재앙만을 낳았다는 종래의 가설을 뒤집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대열의 맨 마지막은 1968년 세계혁명이었다. 1848년 혁명과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1968년 혁명은 중국에서 멕시코까지 거의 모든 곳에서 터졌고, 그 어디에서도 권력을 잡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것은 국가관료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이었고, 개인적 해방과 정치적 해방을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혁명이었으며, 그 혁명이 남긴 가장 영속적인 유산은 현대 페미니즘의 탄생일 것이다." (213-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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