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알고 네게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일방적 생각일 따름이다. 실상, 네가 뭘 원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지레짐작으로 배고프구나 졸립구나 심심하구나 판단해서 내가 필요할 때만 놀아주고 안아주고 바라봐줄 뿐이다. 그래서 네가 잠든 시간이 어쩌면 네게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아기처럼 갸릉갸릉 색색 소리도 요란하게 자는. 네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어떤 잠꼬대를 할지 궁금하다.
샤샤는 전에 살던 곳에서 심한 괴롭힘을 당해 불가피하게 우리집으로 왔다. 구체적으로 어떤 핍박이었는지 듣지는 않았지만 아마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인간이나 고양이나 약한 아이을 보면 포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못된 녀석이 꼭 있다. 샤샤의 성격은 원래 고양이가 이렇게 착하고 온순했나 싶을만큼 얌전하다. 물론 소심하고 겁도 많고 혼자있는 것도 싫어한다. 고양이라면 의례 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고 생각했는데, 고양이도 고양이 나름인가 보다. 샤샤는 안아주고 눈을 맞추고 부드럽게 만져주는 걸 아주 좋아라 한다.
깨물어주고 싶어라.
영화 '허브'에서의 강혜정을 보며 든 생각. 차라리 다른 이름으로 불렸으면. 강혜정이라는 배우는 더 이상 없다. 그녀가 강혜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좀 더 아끼고 사랑했어야 했다. 그녀의 무표정에서 혹은 웃는 얼굴에서 뻗어나오던 그 인상적인 카리스마, 아우라가 다 사라져 버린 강혜정은 정말이지 극과 극이다. 그 강함과 도도를 연약함과 평범과 바꾸다니, 아름다워지는 것이 모든 여자의 바램이고, 콤플렉스에서 해방되었을지는 몰라도 배우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을 한 건 아닌지. 그녀의 변화는 영화에의 몰입조차 방해한다. 비극이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적응이 될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의 이나영을 보며 든 생각. 공지영과 닮았구나. 소설에서 윤수의 회상 장면 빼고는 건질 게 없었던. 영화도 역시 소설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고대로 보였다. 전체적으로는 물 흐르듯 빠르게 막힘없는 듯 보여지지만 가슴을 후려치는 무게감, 공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나영은 예뼜고 강동원은 잘 생겼다. 배우들이 가진 능력의 십분의 일도 뽑아내지 못한 건 원작 탓? 극중 윤수의 사형이 부당하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싸웠어야 하지 않을까. 죽어도 진실 정도는 만천하에 밝히고 죽었어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집행된 사형도 극적이긴 하나 설명이 안 된다.
과연 뚱뚱하다는 것이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자살을 시도할만큼 끔찍한 일인지 생각해 본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과연 김아중은 빛났다. 어떤 영화를 어떻게 만나는가가 배우에게 얼마나한 힘을 실어주는지, 신드롬이라고 불릴만큼 정상에 우뚝 선 김아중을 빼면 영화는 사실 엄청 평범하다. 새로울 것 없고 끝도 뻔하고 감동보다는 일회성 감성을 자극한다. 한나는 천상의 목소리라도 타고났지만 그도 저도 아닌 사람은 어쩌라구? 마치 뚱뚱하다는 것이 천형인양, 예뻐지지 않으면 사랑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인지. 차라리 원작만화는 비틀기라도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