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읽기 정신분석과 미학총서 2
숀 호머 지음, 김서영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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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실 라캉에 대한 단행본이 그리 적은 것도 아니지만, 어지간한 철학 개론서를 읽으면서 그를 조금이라도 접하지 않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도 철굴이나 현대철학의 흐름, 혹은 전경갑씨의 저작을 통해서 라캉을 몇번씩 마주쳤던 기억이 있는데, 희한하게도 다른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에 비한다손 치더라도 좀 심하게 그에 대한 인상은 항상 뿌연 상태로 남아있었다. 이는 아마도 후기 구조주의 사상가들의 파편적 경향성이랄까 그런것 보다는 라캉의 '전공(?)'인 정신분석학의 학문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인 듯 싶은데, 정신분석이라는 학문 자체가 카를 포퍼 말마따나 '과학이 아니다'라고 공격받을 수 있을 정도로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의적이고 폐쇄적인 논리적 기반에 의지해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단세포적으로(?) 집착하는 기존의 아주 원시적(?)인 정신분석학적 설명은 정신분석학 자체에 대한 나의 편견을 강화시켰고, 결국 라캉의 이야기들마저도 근거없는 말장난이라거나 맥락을 잃은 지적 묘기대행진 정도로 치부하게 만들었다. 이런 편견에 작지 않은 균열을 가져다 준 것이 다름아닌 지젝이었는데, 앨피에서 나온 지젝에 대한 개론서(루틀리지 시리즈를 번역한 것으로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참고로 본서도 루틀리지에서 나온 시리즈 물의 하나인데, 판권 계약이 어떻게 된 것인지, 하여간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라캉과 들뢰즈만 앨피가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있다.)는 라캉이 단순히 무의식을 핑계로 인간의 소소한 행동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사상가는 아님을, 외려 세상을 조금 더 참신하고 날카롭게 보는 시각을 마련해줄 도구를 마련해준 사상가임을 일깨워주는 듯 했다.

그럼에도 라캉을 건너뛰고 지젝을 읽지 못한 것은-사실 지젝이야말로 라캉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설가라고는 하지만-라캉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인식없이 그의 지독하게도 난해한 저작을 읽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지젝에 대한 개론서 또한 완독 후에도 그 이해에 있어 무언가 나 자신에게 석연찮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라캉에 대한 이런저런 개론서를 들춰보던 중 처음으로 완독하게 된 것이 본서이다.

본서는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개론서가 흔히 빠지게 되는 난점-통시적 맥락이랄까, 그런것들을 잃고 중언부언하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몇가지 개념들을 중심으로 서술해 나가는데, 너무도 유명한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세가지 개념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팔루스의 의미, 주체의 개념과 성차에 대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설명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라캉에 대한 어느정도 '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말미의 '라캉이후'라는 꼭지에서는 정치, 사회, 문화적 부문에 있어서의 후대 철학자들의 논쟁을 소개하며 우회적이지만 어찌보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라캉 철학의 문제의식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라캉의 사상이 단순히 지적 놀음이 아닌 현실적 문제들을 고민하는 데 요긴한 도구임을 방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격이 그렇듯 라캉은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명하고자 한, 철학자이기 이전에 정신분석학자이다. 뿐만 아니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단선적인 해석과 협애한 적용으로 인해 완전히 한물간 이론으로 치부되고 있었던 당대 정신분석학의 부활을 위해 프로이트를 '다시 읽으며' 강력한 사상적 뒤집기(?)를 도모한 그의 철학은 수많은 역설과 난해함으로 점철되어있다. 때문에 저자는 라캉을 쉽게 쓰고자 노력했고 그런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본서는 여전히 쉽지않은 책이다. 하지만 오늘의 인간을 이해하고 그들이 모여 이룬 사회를 이해함에 있어 '무의식'이 차지하는 부분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며, 이를 분석함에 있어 라캉의 기여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상당하다. 때문에 라캉에 대한 이해는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것이며(언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타자의 것이기에,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우리가 라캉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영원히 충족하지 못할 '욕망'(라캉은 욕구와 욕망을 구분하며 전자는 충족될 수 있는 것, 후자는 충족될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한다)일지라도 본서는 우리의 그러한 욕망을 향한 첫걸음에 충분한 도움이 될 수 있을만큼 잘 쓰여진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ps.'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이랄까, 물론 그가 맑시스트라는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의 사상 또한 서구의 그러한 사상적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해서 그런건지, 뭐든 결국엔 '실패할 수밖에 없는것', 혹은 '불가능한 것'투성이다. 때문에 책을 읽으며 그의 사상 전반에 대해 느낄수 있는 색체랄까, 그런것은 기본적으로 어둡고 혼란스러운 것이었지만, 이처럼 그의 묵시론적(?)시각-대표적으로 주체는 '진정한'의식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 급진적 민주주의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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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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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책보다는 TV나 영화가 투자대비 효용상(?!)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편인지라 좀처럼 베르베르의 소설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중학생 때 막 센세이션이 일어서 엉겁결에 휩쓸려 읽었던 '개미'의 인상부터 그랬지만, 뭐랄까, 화려한 외양(?)과 달리 메시지는 텅비어 보였다고나 할까. 아무튼 개인적으로 베르베르는 메시지보다는 '재미'나 '정보'를 추구하는 작가라는 인상이 강했고, 이는 곧 '소설로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것을 굳이 소설로 표현하려는 작가'라는 인상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개미'이후 숱한 베스트셀러를 냈음에도 굳이 베르베르의 소설을 읽지 않았던 개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베르베르의 소설을 읽게 된건, 공교롭게도 그 '재미'때문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간간히 움직이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재미'가 필요했고 그 와중에 짧은 단편의 모음인 이 소설은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저자도 서문에서 제대로 된(?!) 소설을 쓰던 와중에 재미삼아,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쓴 소설들의 모음집이라 하고 있지 않은가.(놀라운 것은, 그렇다면 이 작가는 여가 수단마저 '소설을 쓰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될 터인데, 사실이라면 그는 말그대로 '작가가 천직'인 사람이리라) 헌데 이 소설, 쉽게 읽히는 것 만큼 간단치 않더라는 거다.

물론 저자가 각각의 단편을 어떠한 일관성 있는 주관이나 목적을 갖고 쓴 것 같지는 않다. 저자는 그야말로 '순수하게'(물론 '순수'하다는게 글을 씀에 있어 어떤 방향으로건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별다른 의도없이) 상상력만 남겨 극한으로 몰고 간듯하다. 때문에 소설의 메시지는 각각의 꼭지마다 천차만별이다. 밝기도, 어둡기도, 보수적이기도, 진보적이기도 한 각각의 소설은 그럼에도 공교롭게도 하나의 분위기(?)로 엮이는데 그것은 각각의 소설 모두가 독자로 하여금 굉장히 깊이있는 고민을 추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뚜렷한 색체를 가진 작가라기보다는, 그냥 글을 잘 쓰는 소설가에 가깝고, 에코마냥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상상력을 극한으로 몰고 간 그의 수많은 단편 모음들은 그가 의도하건 하지않았건 말로 할 수없는 우리들의 수많은 고민들과 현대 문명의 난맥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질문하고 있는 듯하다. 더군다나 그러한 질문들이 결코 난해하다거나 부담스러운 형태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로테스크한 묘사와 극한으로 몰고간 상상력 속에서 얻게되는 묘한 쾌감 속에 철학적인 고민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거니와 그만큼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부담없이 한번 읽어볼만한 책인 듯 싶다. 무엇보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하나같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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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08-08-06 08:34   좋아요 0 | URL
이궁..저는 예스24에서 발자국따라 건너왔어요. 알라딘은 회원가입만 해놓은 상태인지라, 포스팅이 없어요. 그치만, 댓글 달려고 간만에 알라딘 로긴합니다.ㅎㅎ. 즐겨찾는 서재 등록하고 갑니다. 진작에 일찍 알았으면 예스24에서 친구님으로 잼나게 지냈을텐데, 아쉽네요~가끔 님글 보러 알라딘 들를것 같네요. //<나무>는 저두 잼나게 읽었던 책이네요. <개미>의 흥분 이후로 전작만한 책이 없어서...특히<파피용>에서 급실망하던중에..건진 잼나는 책이었어요.

率路 2008-08-06 15:25   좋아요 0 | URL
어휴, 괜히 죄송한 맘이(뭐가?ㅋ)

그러고보면 베르베르의 소설은 동생덕에 여기저기 몇권 꽂혀는있는데 제대로 읽은건 개미 이후론 이게 첨인것 같아요.-_-;;;;
 
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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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후-적어도 장편에 있어서 만큼은-박민규에게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박민규의 작품을 찾아 읽게 되는 이유는, 뭐랄까, 예의 그 재기발랄하고 부담없는 문체와 '소수자'라고 칭하기에도 무언가 걸리는 구석이 있는, 해서 역설적으로 대변될 누군가가 더 절실히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는 '찌질한'(?) 인물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내용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그런 면에서 박민규의 소설은 얼핏 주성치의 영화를 닮은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번 소설의 주인공들은 '왕따'다. 본 소설에서 등장하는 왕따라고해서 사회적 견지에서 별 하자 없는 친구들은 아니고, 나름대로 어떠한 하자(?)를 다들 안고 있는 친구들이기에 본 소설의 인간군상들은 더 처절하게 다가온다. 그들의 모습이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러하기에 별 이유없이 맨날 맞고 다니는 등장인물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처음 분노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익숙해진다. 권태로운 우리의 일상에 익숙해지듯이.

그 속에서 저자는 우리의 일상을 묻는다. 다수에 묻어가며 어느덧 당연하다고 여겨가는 모든 것들의 야만성. 그러려니 하고 묻어묻어가는 속에 하나 둘 적응해가는 우리들의 슬픈군상 속에서 소설은 나아가 우리의 존재 의미마저 묻는다. 세상이 언인스톨된들, 뭐 달라질 꺼 하나 있나? 다수의 폭력에 대한 공범자로 비겁하게 숨어있는 우리들의 분개할것도 없을 정도로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저자는 정말이지 '찌질한'주인공들을 보듬는다.

박민규의 소설을 읽다보면, 저자가 정말 고시원에 입주한 경험이 있는건 아닌지(갑을고시원 체류기), 정말 삼미의 광적인 팬으로 야구장에서 살다시피 한건 아닌지(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정말 지하철 푸쉬맨 알바를 해보지 않았는지(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내용에 있어 굉장히 실감이 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다양한 하위문화를 소설속에 녹여내는 저자 특유의 탁월한 솜씨 때문인 듯 싶은데, 이러한 저자의 재능은 본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탁구라는 소재로 수많은 하위문화들이 나오는데 이러한 소재들을 천박하지 않게 녹여 괜찮은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박민규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쉬운건 역시 다소 매너리즘에 빠진건 아닌가 싶은 느낌이 종종 든다는 것이다. 박민규의 애독자(?)라면 본 소설에 대해 심심찮게 '이제 좀 지겹다'라는 평을 하는걸 보면 나만의 느낌만은 아닌것 같은데 특유의 문체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그런건지, 비슷한 패턴의 내용이 반복되어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본 소설은 박민규의 향후 작품활동에 크나큰 숙제를 안겨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나야 뭐 이렇게 매너리즘 어쩌고 해도 신간나오면 결국 심심할 때 또 사서 읽게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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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하는 진보
지성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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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교수의 신간이 나온지도 몇달이 지났고, 그 사이에 사회적으로 너무도 많은 일들이 터졌기에(물론 일들이 '터졌을' 뿐, 무언가 수습되거나 해결되어 실질적인 변화로까지 이어진 것은 아니다. 아니, 그 수습이나 변화라는게 외려 굉장히 요원해보인다.) 어느덧 철지난 책처럼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좋아하는 학자의 신간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적잖게 신나는 일이다.

'성찰하는 진보'라는 제목의 본 책에는 사실 별반 특별하다고 할만한 내용은 없다. 때로는 정치, 경제, 사회, 통일, 여성부문의 기본 논점에 대한 진보세력의 표준적인 대안(?)으로까지 읽힐 지경인지라, 참신한 무언가를 원하는 독자라면 조금은 실망할 수도 있겠다.(나같은 경우가 그랬다.^^;;;) 외려, 특별히 급진적이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현실 추수적이지도 않은, 이처럼 '좋은 말씀'들을 읽으면서 내 입장을 재확인해보고는 다시금 곱씹어보게 되는 것은 '성찰'이라는 제목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과연 지금 진보에게 부족한 것이 성찰인가?

삼성재벌이나 통일문제 관련한 이야기라거나 소수자 인권문제 등등, 책에서 언급된 부문에 대한 대안과 입장들이 최근들어 급부상한 논의라거나 진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애초에 생각치도 못한 이야기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진보는 틈나는 대로 무엇이 옳은지 논쟁해왔고, 틈나는 대로 반성과 성찰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우리가 보고 있는 그대로이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사회는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해왔고 변화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성찰하는' 진보라는 제목의 책이 다소 진부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 세간에 화제가 될 정도로 '진보의 교착상태(?!)'가 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단순히 진보의 성찰부족으로 야기된 결과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에서 물대포 맞아가며 촛불을 든지도 어느덧 두달이 넘었다. 그럼에도 그러한 정치사회적인 에너지를 결집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놓을 세력은 '아직까지도' 전무해 보인다. 누구나 다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누구나 다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마저도 어느누구하나 '실제로는' 해결해 나가지 못하고 있는, 이러한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메커니즘은 어디에 연원하는 것일까. 단순히 성찰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교착상태를 해결해 나가기위해 진보에게 '정말로'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성찰이라는 제하의 내용속에서 느껴지는 진부함, 그 속에서 어쩌면 저자는 그간 진보에게 부족했던 것이 용기였음을,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는 알았지만, 정작 무엇을 원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태함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더군다나 저자가 학문활동 중에도 정력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행동하는 지성'이었기에 이런 생각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간만에, 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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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이란 무엇인가
김경용 지음 / 민음사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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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개념 틀 내에 들어올 때에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기호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학문을 요청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한 요청해 조응하여 태동한 것이 바로 기호학이다.

소쉬르 혁명의 여파로 등장하게 된 기호학은 세상만사 존재의 필연에 의해서라 해야할지, 아무튼 너무나 당연하게도 수많은 인접분야로 응용되어 어느덧 '기호학이란 모든 것이다'(U.에코)라는 이야기가 운위될 정도에 이르렀다. 하지만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지난한 일이듯, 기호학을 살짝이나마 이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기호학적 견지에 얼추 서보기라도 할 수 있으려면 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는 물론이거니와 우선적으로 제반 학문에 대한 적지않은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레 기호학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도 석연찮은 일, 해서 이런저런 입문서를 들춰보다 최종적으로 접하게 된 것이 본서이다.

본서는 학설 나열식의 일반적인 입문서와는 궤를 다소 달리한다. 차라리 기호학 에세이처럼 보이는데 다양한 기호학자(라고 해야할지 철학자라고 해야할지)들의 입장을 저자 나름대로 소화하여 저자 자신의 입장에서 기호학적으로 이야기를 개진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저자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방브니스트의, 혹은 바르트의 생각인지 등등이 독자로서는 심히 헷갈리고는 하는데 이런 점은 이 책의 단점이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저자 자신이, 기호와 함께 할 수밖에 없기에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난점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 하에 책을 서술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크게 기인하는 듯 싶다.

기호학은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의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목표가 있기에 성공과 실패가 명확하게 갈린다. 즉 인간사회에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미작용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의도한대로건 아니건간에, 우리의 언행은 인식되어 존재하는 순간 어떤식으로건 의미작용을 한다. 심지어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행동(?!)마저도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속에 이런저런 의미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이러한 의미작용은 진리도 표현하지만 거짓도 동시에 표현하고, 기호로 만들어지는 즉시 외곽의 잔여부분을 남겨 언제나 명확한듯 하면서도 모호한 채 남아있다. 이러한 모호함을 제거하기 위한 우리의 시도는 언제나 번번히 새로운 기호의 요구에 직면하며 이러한 기호의 미끄러짐은 한도끝도 없게된다.(즉 기호의 완결성을 도모하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한다!) 문제는 이처럼 불완전한 기호의 세계가, 그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힘을 지닌 채 사회 제분야에서 여러가지 신화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논증도, 그 어떤 이성도 기호와 신화에 의한 은유와 믿음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저자는 주저없이 신화에 대항하는 대항 신화의 구축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담론이 그렇듯, 기호학적 담론 또한 기호의 틀 속에 인간을 가둬놓고 모든 변혁의 시도를 냉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 하다. 반신화의 구축이라는 저자의 기호학적 대안 또한 사실은 포스트모던 담론이 지적하는 한계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것도 사실이다. 반신화 또한-지극히 당연하게도-또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그것의 실제 의도가 어떠했건 간에-진보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된 포스트모던적 담론이 인간 변혁에 대한 의지를 좌절시키는 변명꺼리로 쓰여진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해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기호를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된 만큼, 필연적으로 우리와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허무주의적 신화와 상대주의적 함정을 극복하여 희망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해 나가자는, 그리하여 이러한 변혁-후회의 싸이클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혁시켜나가는 그것이 바로 곧 인생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더욱 호소력 있게 들렸다.

아직도 입문서 인생을 벗어나지 못한 개인적인 생각으론, 입문서가 가져야 할 가장 필수적인 덕목은 다양한 학설의 나열도, 공평무사한 서술태도도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 입문서는 그 학문분과의 존립 목적을-어떤 학문이건 매우 다양한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는 상황을 감안한다손 치더라도-어느정도 명료하게 제시하여 그 학문에 대한 독자의 지속적인 관심을 추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러한 개인적인 생각에 비추어 본다면 본서는 충분히 괜찮은 입문서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대한 입체적이고 풍요로운 시각을 갖고자하는 독자라면, 기호학은 충분히 탐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학문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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