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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이란 무엇인가
김경용 지음 / 민음사 / 1994년 5월
평점 :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개념 틀 내에 들어올 때에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기호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학문을 요청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한 요청해 조응하여 태동한 것이 바로 기호학이다.
소쉬르 혁명의 여파로 등장하게 된 기호학은 세상만사 존재의 필연에 의해서라 해야할지, 아무튼 너무나 당연하게도 수많은 인접분야로 응용되어 어느덧 '기호학이란 모든 것이다'(U.에코)라는 이야기가 운위될 정도에 이르렀다. 하지만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지난한 일이듯, 기호학을 살짝이나마 이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기호학적 견지에 얼추 서보기라도 할 수 있으려면 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는 물론이거니와 우선적으로 제반 학문에 대한 적지않은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레 기호학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도 석연찮은 일, 해서 이런저런 입문서를 들춰보다 최종적으로 접하게 된 것이 본서이다.
본서는 학설 나열식의 일반적인 입문서와는 궤를 다소 달리한다. 차라리 기호학 에세이처럼 보이는데 다양한 기호학자(라고 해야할지 철학자라고 해야할지)들의 입장을 저자 나름대로 소화하여 저자 자신의 입장에서 기호학적으로 이야기를 개진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저자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방브니스트의, 혹은 바르트의 생각인지 등등이 독자로서는 심히 헷갈리고는 하는데 이런 점은 이 책의 단점이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저자 자신이, 기호와 함께 할 수밖에 없기에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난점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 하에 책을 서술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크게 기인하는 듯 싶다.
기호학은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의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목표가 있기에 성공과 실패가 명확하게 갈린다. 즉 인간사회에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미작용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의도한대로건 아니건간에, 우리의 언행은 인식되어 존재하는 순간 어떤식으로건 의미작용을 한다. 심지어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행동(?!)마저도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속에 이런저런 의미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이러한 의미작용은 진리도 표현하지만 거짓도 동시에 표현하고, 기호로 만들어지는 즉시 외곽의 잔여부분을 남겨 언제나 명확한듯 하면서도 모호한 채 남아있다. 이러한 모호함을 제거하기 위한 우리의 시도는 언제나 번번히 새로운 기호의 요구에 직면하며 이러한 기호의 미끄러짐은 한도끝도 없게된다.(즉 기호의 완결성을 도모하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한다!) 문제는 이처럼 불완전한 기호의 세계가, 그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힘을 지닌 채 사회 제분야에서 여러가지 신화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논증도, 그 어떤 이성도 기호와 신화에 의한 은유와 믿음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저자는 주저없이 신화에 대항하는 대항 신화의 구축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담론이 그렇듯, 기호학적 담론 또한 기호의 틀 속에 인간을 가둬놓고 모든 변혁의 시도를 냉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 하다. 반신화의 구축이라는 저자의 기호학적 대안 또한 사실은 포스트모던 담론이 지적하는 한계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것도 사실이다. 반신화 또한-지극히 당연하게도-또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그것의 실제 의도가 어떠했건 간에-진보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된 포스트모던적 담론이 인간 변혁에 대한 의지를 좌절시키는 변명꺼리로 쓰여진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해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기호를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된 만큼, 필연적으로 우리와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허무주의적 신화와 상대주의적 함정을 극복하여 희망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해 나가자는, 그리하여 이러한 변혁-후회의 싸이클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혁시켜나가는 그것이 바로 곧 인생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더욱 호소력 있게 들렸다.
아직도 입문서 인생을 벗어나지 못한 개인적인 생각으론, 입문서가 가져야 할 가장 필수적인 덕목은 다양한 학설의 나열도, 공평무사한 서술태도도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 입문서는 그 학문분과의 존립 목적을-어떤 학문이건 매우 다양한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는 상황을 감안한다손 치더라도-어느정도 명료하게 제시하여 그 학문에 대한 독자의 지속적인 관심을 추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러한 개인적인 생각에 비추어 본다면 본서는 충분히 괜찮은 입문서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대한 입체적이고 풍요로운 시각을 갖고자하는 독자라면, 기호학은 충분히 탐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학문이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