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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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이자 활동가가 쓴 본서는 세계 곳곳의 기아에 대한 현실을 아들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사실 굉장히 쉽게 쓰여진 책이고 내용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본서를 읽으면서 외려 놀라웠던 것은 책을 읽고 놀라고 있는 내 모습 그 자체였다. 세계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소위 '문명사회'(?!)에 살고 있다손 치더라도 모르고 있는 사실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영화를 비롯한 여러 매체들을 통해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고,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었다면 적어도 본서를 읽고 있는 동안 '놀랄'정도의 충격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본서를 읽으며 개인적으로 느낀것은 지구촌의 심각한 기아 실태에 대한 '충격'이었고, 이와 함께 그 사실에 새삼스럽게 충격받고 있다는 점 그 자체에 대한 또다른 '충격'이었다.

세계화란 단어, 지구촌이란 단어가 진부하게 느껴진지도 한참이 된 것 같다. 모두들 넓게 보자고, 세계를 향해 뛰자고 이야기한다. 글로벌 인재 양성이니 글로벌한 기업이니 하는 이야기들도 너무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러한 '글로벌'한 세계를 살고 있기는 한건가? 우리가 글로벌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만큼 세상 곳곳의 사람들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가?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정보를 취합해가며 모두가 전문가가 된 것 같은 시대, 이 땅은 좁다하며 제국주의적 담론과 사해동포주의적 담론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시대에 우리는 세상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2005년 유엔은 밀레니엄 목표로 '기아문제 해결'을 내세웠다. 한쪽에선 음식이 남아돌아 비만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다른 한쪽에선 천재지변에 의해, 혹은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해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기술발전으로 인해 곡물생산은 지구 전체 인구의 두배를 먹여살릴만큼 향상되었다지만, 그 와중에도 기아에 노출된 인구의 비율은 단 1%줄었고, 절대수치로는 외려 늘어난 것이 지난 10년간의 현실이다.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환경문제나 정치문제, 잘못된 유통구조 등의 사회구조적 문제 등을 꼽았지만, 이는 결국 궁극적으로-해제와 부록의 글에서 알 수 있듯-신자유주의의 문제로 귀결되는 듯 싶다. 우리가 '세계화'를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조직으로서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따진 세계, 그 속에서 아프리카라는 대륙은, 그리고 전 세계 모든 제3세계 국가들은 미국의 한 기업만도 못하는 가치를 지닌 인간들의 모임으로 나가떨어진다. 세계화 운운하면서 인구의 대부분이 몰려사는 다른 대륙은 제쳐놓고 미국으로 미국으로 모이는 이유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곳에 돈이 있기에, 그 곳에 '세계'를 뒤덮을만한 자본이 있기에 우리는 그곳으로 모이고 그것이 곧 세계화라고 이야기 한다. 해서, 어쩌면 우리는 '자본'이라는 특수한 체계의 세계화를 일반적인 세계화 담론으로 전화시켜 우리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점에서 과연 우리가 이야기하는 '세계화'가 그렇게 아름답고 멋진 이야기일지 다시 되물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우리는 분명 지구 어딘가에 수많은 아이들이 기아로 굶어죽고 있다는 사실들을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다)을 잊기 위해, 그래서 조금이나마 양심의 가책을 덜기위해 그러한 담론들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많은 이들이 이 비참한 기아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무어냐고 이야기하고 결국 어쩔수 없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가 말하는 '세계화'를 통해 한몫크게 건저보고자 그 대안을 찾는 노력의 1/10만 투자하더라도 기아에 대한 대안은 손쉽게 마련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안이 무어냐, 어쩔수 없는것 아니냐라는 이야기들은 자신의 위선적인 행동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끔찍한 결의일런지도 모르겠다) 환경파괴, 국제정치적 난맥상, 그 속에서 인류는 어느덧 꿈을 잃은 것 같다. 지젝 말마따나 사람들은 이 파국적 상황이 해결되어 나은방향으로 변화되기보단 세상이 결국엔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판단이 더 '현실적'이랍시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 같다. 이것이 과연 이성적이고 올바른 판단인가.

가족 중심의 사회에서 국민국가중심의 사회로 발전하면서 '우리'의 개념은 가족이나 친지에서 한단계 진화하여 '국민'까지 포함하는 개념이 되었다. 세계화가 운위되는 시대, 이러한 '우리'의 개념은 또 한번의 진화를 요구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어쩌면, 기아문제의 대안은 이미 우리가 기아문제를 대면하지 못하도록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랄법한 우리의 그 '양심의 가책'에서 이미 그 가능성이 담지되어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는 것, 그래서 그 문제와 대면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뒤집어보면 우리들이 어느덧 세계화 속에서 전 인류를 '우리'의 개념 안 에 포함시키려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본서는 우리가 알고있지만 알고있다는 사실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들을 일깨워주며 우리의 새로운 인간성을 향한 진보를 도모하고 있는 듯 하다. 당신이 만약 '인간'이라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바로 그 '인간'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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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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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상징의 동물이다. 매주 주말마다 종교집회에 참석한다던가, 쾌락을 거부하고 금주나 금연을 한다던가, 아침마다 꾸준히 운동을 하는 행위는, 그 실용적인 의미 이상의 상징적인 무언가를 담지한 행위이다. 그 상징 행위는 단순히 무엇을 한다 안한다의 규범적 성격을 뛰어넘어 행위 자체의 의미로서 한사람의 인생에 작지 않은 상징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그런것일까? 그러한 상징적인 행위에 예외가 발생했을 경우, 멀쩡한 사람이 의외로 속절없이 무너지는 경우를 우리는 어렵잖게 볼 수 있는데, 때문에 인간은 주변에서보기 참 쓸데없는 행위라도 종종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생활을 상징화하고 조직화하려는 시도를 하곤한다.

소설 속 주인공의 상징적인 행동은 '나무위에 올라가서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그는 열두살때 자신이 먹고싶지 않은 요리를 강제로 먹이려는 아버지에 반발해 나무위에 올라간다. 이 단순한 어린아이의 음식 투정은 주인공이 나무위에서 평생 절대 내려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내비치는 순간 단순한 음식투정 이상의 상징적인 행위로 넘어간다. 이후 소설의 에피소드 속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가족에 대한 사려깊은 언행을 보면 이러한 음식투정이 단순한 '이유없는 반항'이 아닌 기존의 보수적인 관습과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정말 죽을 때까지, 아니 심지어 죽음 이후까지도 단 한번 나무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과 그가 살아가는 사회를 불굴의 의지로 조직해나간다. 물론 나무에 올라가 세상을 좀더 잘 볼 수 있게 된 대신, 평생 안고 가야할 고독은 그가 감내하여야 할 쓰디쓴 댓가가 되지만.

역자의 말마따나 칼비노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식인 상을 소설 속 주인공에 투사하려고 시도한 부분이 없진 않다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소설속 주인공인 '코지모'를 이상적인 인물로 만들기엔 저자의 애정이 주인공에게 너무 많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심지어 '혁명'의 와중에서도 군대라는 '집단'이 아닌 '개별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을 고수하던 코지모가 '황제군'이 되어버린 프랑스군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과 맞부딪히지 않았던 것은, 분명 스탈린주의의 폐해를 알면서도 공산당을 탈당하지 못한 칼비노 본인의 사정이 주인공에 투사되었기 때문이리라) 때문에 코지모는 이상적인만큼 그 한계도 온전히 담지하고 있으며 실수와 갈등속에 성장하기도 후퇴하기도 한다. 차라리 칼비노는 코지모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인간상과 사회상을 이야기하려는 듯 한데, 그것은 결국 한마디로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사회'로 귀결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상이나 사회상은 소설 그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 독자는 그저 코지모의 몇번의 실패와 몇번의 영웅적인 성공담 속에서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즉 코지모조차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임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비올라와의 연애가 결국 자신의 부자연스런?! '이성'때문에 실패하게 된 것이 이를 암시한다) 결국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칼비노 본인조차도 당위는 있지만 그 실천적인 얼개조차도 기획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인데, 그러한 솔직함 속에 이 소설의 위대함이 존재하는 듯 싶다. 코지모가 마치 슈퍼맨처럼 언제나 진보와 성공만 거듭했다면, 이 소설은 그저그런 영웅담정도로 끝났을 것이다.(운이 좋았다면 '허풍선이 남작' 정도는 되었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소설이 그러한 영웅담을 뛰어넘은 데에는 나름대로 판타지적 경향을 보이면서도 내면의 솔직함이 깔려있다는 점에 있는 듯 하다. 차라리 코지모는 '슈퍼맨'같은 비현실적 영웅보다는 현실에 존재했던 한 인물을 떠오르게 한다. 생애동안 치명적인 실수도 많았고, 오판도 많았지만, '죄많은 존재'로서의 지식인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언제나 정의의 편에서 정열적인 활동을 했기에 역설적으로 '신화'로 남아버린 장 폴 사르트르, 바로 그이다.

본서는 칼비노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이도저도 아닌 불확실한 서술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같은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의 하나로 간행된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비하자면 본 소설은 굉장히 잘 읽히는 편이다. 하지만 그만큼 쉬운 책이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꼭 그렇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본서는 기본적으로 동화적 상상력이 가득한 우화이지만 굉장한 사실성을 담고 있다. 그러한 사실성은 인간이 통상 옳다고 생각하는 미덕이나 나쁘다고 전제하는 악덕에 대한 것 마저도 입체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결국 칼비노는 본 소설에서 굳이 '열린형식'으로서의 소설을 도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린내용'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열린형식의 소설을 만들어버린 셈인데, 이러한 지극히 '민주적'형태로서의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고민과 해석을 이끌어내는 듯 하다. 가볍지 않은 고민을 즐거운 내용으로 끌어내는 흔치 않은 소설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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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미학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이가림 옮김 / 문예출판사 / 197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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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를 정의하기 어렵듯(그를 과학철학자로 규정할 것인가, 철학자로 규정할 것인가? 그도 아님 평론가로? 아니면 시인으로? 모두 다 답이 될 수 있으면서도 무엇하나 정답이라 콕찝어 말하기엔 뭔가 석연찮은 것 또한 사실이다.) 본서 또한 규정짓기에 굉장히 당혹스럽다. 바슐라르의 저작을 과학 철학에 관한 것과 문학적 상상력에 관한 것으로 나눈다면 후자에 속할 법하다는 역자의 규정은 그에 관한 가장 최소한의 정도를 이야기한 것 같은데 사실 문학적 상상력에 관한 글로 읽기에도 본서는 그 짧은 내용안에 너무나도 많은 색깔을 담고 있다.

'촛불'이라는 화두를 통해 몽상을 진행하면서, 장광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찌보면 두서없이 그야말로 '썰을 풀고'있는 본서는, 보는 시각에 따라 100여페이지 남짓한 긴 서사시로, 문학 평론으로, 시(詩)에 대한 작법으로, 삶의 태도를 이야기 한 수필집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처럼 짧은 내용에 특별히 메인 플롯(?)이랄것도 없어보이는 본서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당혹스러움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런지도 모르겠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뒤쳐지기 쉽상이라는 세상에서 저자는 줄곳 한가하게 몽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시각적 자극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 시각적 이미지의 조야함을 비웃는다. 모두들 해명과 비교분석을 통한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저자는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이야기하질 않나, 복잡함이 고상함이나 고차원으로 포장되는 세상에서 대상이 단순할수록 몽상이 커진다며 단순함을 예찬하기까지한다. 어디 그뿐이랴. 몽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고독도 되었다가 꿈이 되었다가 생명이 되기도 하는 내용은, 글을 읽고 논점을 파악해서 나머지 잔챙이들은 다 쳐내는 나의 지극히 목적합리적(?)인 독서법과도 영 맞지 않았다.

이처럼 개인적으로 맞지 않는 책을 악으로깡으로(?) 한문장 한문장 읽다보니 필연적으로 '시간'이라는 것이 걸리게 되었고 그 와중에서 무언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뭐 시적 감수성이네 뭐네 하는 것은 일단 개인적으로 원채 훈련이 안 되어있으니 넘어간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사물을 대하는 방법과 우리의 존재론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사리에 맞는 것, 그러한 사리에 맞도록 증명되는 것만이 가치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전제하고 행동한다. 여기에는 분명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러한 가치들과 뗄레야 뗄 수 없다는 존재론적 합의가 기저에 깔려 있을게다. 하지만 인간이란 과연 전적으로 이성적이기만 한(혹은 이성적이어야만 하는) 존재일까? 몽상이나 감성같은 요소는 그저 무시하거나 나아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될만큼 그리 중요하지 않은 부분일까? 자신 외의 사물을 대하는 방법도 그렇다. 우리는 그것이 우선 이성에 의지한 언어를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은유가 아닌 부연설명과 비교는, 그 자체의 이성적 확실성과 직설성을 통해 순간적으로 우리를 이끄는 '힘'은 있지만, 세상 모든 사물들은 그러한 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공백이 존재한다. 이 때 우리는 보통 표피적인-대표적으로 시각적인-이마주를 통해 그 공백을 채우려하는데 여기서도 문제는 존재한다. 그러한 표피적인 이마주로 과연 사물을 올바로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날 우리들의 타자에 대한 이해의 대부분은 그야말로 '겉핥기'로 끝날 따름이다.

우리의 인식과 이해는 전적으로 우리의 존재론적 기반에 의지한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몽상하는 존재이고 상상하는 존재이다. 인간 이성의 발전은 그러한 몽상과 상상의 현실화에 기인한다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어찌보면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이성이 아닌 몽상과 상상일런지도 모른다. 존재의 유한성이라는 필연 앞에서 고독을 즐길줄 모르고, 때를 기다릴줄도 모르는 인간은 사물을 빨리 이해하고자 하지만, 이는 그저 표피적인 몰이해를 부를 뿐이다. 우리의 몽상과 상상마저 그저 급하게 외면적 언어로 해명하고 비교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세상과 사물을 냉랭하고 죽은 것으로 만들며, 우리의 상상 그 자체를 왜곡하고 질식시킨다. 인간 이성의 기반이 결국 몽상과 상상이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이러한 태도는 나아가 역설적으로 인간 이성 그 자체마저 말살시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쩌면 바슐라르가 책 속에서 촛불에 대한 몽상을 두서없이 진행한 것은 애초부터 의도된 전략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사실 촛불에 대한 몽상을 읽기 쉽게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책의 내용과 지극히 모순되는 바이기도 하다) 해서, 본서는 결코 긴 분량은 아니지만 한문장 한문장을 곱씹을 수밖에 없는 관계로 그리 짧은 시간 내에 다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뿐만아니라 저자의 굉장히 압축적(혹은 시(詩)적)인 표현은 그러한 읽기의 난해함을 배가한다. 하지만 갈수록 합리화(?!)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왜 여전히 불행해하며 갈길을 모른채 헤매는지, 합리적인 분석과 이성적인 해명 이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책을 '천천히' 읽어나가면서 느껴지는 따뜻함을 통해 그 해답을 조금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촛불에 대한 자신만의 몽상을 진행해가면서 어느 한가한 저녁, 부담없이 편안하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물론 그리 쉽고 편안하게 읽혀지는 내용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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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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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이후 24년'. 출판사의 광고문구만 보면 에코가 장미의 이름 이후 소설은 하나도 쓰지 않았구나라는 인상을 받을수도 있겠지만, 그 사이 에코가 낸 장편만도 세편이다. 하지만 본 소설이 저자가 낸 그간의 작품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어느덧 에코의 전매특허가 되어버린듯한 '중세' 이야기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아울러 무엇보다 소설의 주인공이 에코의 분신임이 공공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숫제 에코의 어린시절 사진까지 등장한다.) 즉, 이전 소설들이 단순한 이론서로 이야기하기 어렵던 것을 소설로 표현한 것이라면, 이번 소설은 자서전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역설적으로 자서전의 형식으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들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하고자 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얌보'는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깨어나 공적인 기억을 제외한 자신과 관련된 모든 기억은 잃고 만다. 즉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기억은 이미지가 아닌 텅 빈, 건조한 기억 그 자체이다. 문학 작품의 구절구절과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들은 줄줄 꿰면서도 자신과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인공이 자신의 어린시절 기억을 찾기위해 '솔라라'에 가서 자신과 관련된 옛 기록을 찾아볼 때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 집에 있는 수집품들을 통해 논리적으로 기표와 기의를 이어맞추는 형식의 기억 자체는 해 내지만, 이러한 기록과 수집품에 대한 자신의 느낌은 구체적으로 기억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서, 주인공은 차라리 자신의 옛 기억이라고 모아놓은 기록을 하나, 둘 연결해가며 바로 그 과정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과거-추억이라고 이야기되는-를 만들어간다고 보일 지경인데, 이는 다분히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쓰게 된 이유-학술서로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소설을 썼다는-를 떠오르게 만든다.

기표는 분명 그 기의와 일치하지 않는다. 아니, 외려 기표는 그 자체에 수많은 왜곡과 공백들을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호의 그러한 트릭을 기호에 대한 담론으로 극복해 내는것, 즉 그 기표가 왜곡하거나 공란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을 까발려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또한 간단한 일은 아니다. 담론 또한 기호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추억은, 그리고 그 추억의 소재가 되는 문화와 예술은 그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기호는 단순히 기호가 아닌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기에, 기호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또다른 이미지이고,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이성적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개개인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추억이라고 일컬어지는)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한 추억을 잃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추억의 복구가 아닌 새로운 추억의 구축 정도일 뿐일런지도 모르겠다. 해서 망각이란 누가 뭐래도 안타까운 것이며, 기억이란-설령 그것이 아무리 아픈 것일지라도-아름다운 것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주인공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편을 되찾지 못하듯, '전날의 섬'에서는 섬에 죽어도 도달하지 못하듯, '바우돌리노'에서는 숫제 진실이라는게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듯,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무언가는(스포일러 같아서 밝히진 않겠지만, 이 정도 써도 스포일러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_-;;;)결국 등장하지 않는것 또한 흥미롭다. 아니, 어쩌면 주인공이 찾고자 하는 무언가는, 그것이 마치 자신이 평생 살아갈 조건처럼 되어버린 무언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와 매한가지인 것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처럼 텅빈 기호라는 것이 무의미한 것일까? 이에 대해 에코는 이렇게 말하려는 듯 하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심술궂은 귀신에게 속아 허깨비를 보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음에도 마치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래야 계속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p.685) 너무 허무주의적이지 않냐고? 꼭 그런것 같지는 않다. 그라뇰라와 주인공의 굉장히 정치적인 신학 논쟁은 그러한 지적에 대한 에코의 답변인듯 하다.  "하느님이 악하다면, 우리라도 선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자....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니 우리끼리라도 서로 도우며 살자."(p.573) 텅빈 기표는 우리의 해석과 태도에 따라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것은 정작 우리가 기호로 표현할 수 없는 것-그것이 바로 '신비한 불꽃'이려나?!-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에코의 소설이 늘상 그렇듯 본 소설 또한 굉장히 다양한 견지에서의 독해가 가능할 듯 싶다. 주인공이 '자신만의' 기억(추억!)을 찾기위해 공적인 기록들을 반추해가며 기억해내는 에피소드들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단편으로 읽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일 뿐더러, 독자들은 본 소설의 내용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로도, 익살 넘치는 재담모음집으로도(여담이지만, 에코의 모든 글들은-그것이 학술서적이건 소설이건간에-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는 점에선 공통적이다. 저 유명한 '장미의 이름'마저 등장인물들은 결국 '웃음'때문에 죽고 죽이지 않는가), 기호학, 철학, 정신분석학적 장치들로 가득한 학술적 소재로도, 혹은 전쟁과 파시즘이라는 인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주제에 관한 역사적, 정치적 성찰로도 읽을 수 있다. 마치 어느 날씨좋은 한가한 날, 발길닿는대로 정처없이 산책하는 느낌이랄까. 이는 에코의 유년시절 기억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80년대-이는 곧 나의 유년시절이기도 하다!-를 연상케 만들기 때문인듯 듯 싶기도 한데, 아무튼 저자의 잡학다식함은 설령 에코보다 더 훌륭한 소설을 쓰는 소설가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에코처럼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는 전무후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자아내게 한다. 즐거우면서도 가슴한켠을 아리게 만드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ps. 출판사의 광고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소설 운운하는 부분도 있나보다.(개인적으로는 확인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작가에게 '마지막 소설'운운하는 것에 다소 호들갑스럽다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이지 에코가 소설의 형식을 빌어 무언가를 말하는건 이것으로 마지막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 이 소설이 소설가로서 그의 은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소설가보다도 계획적이고도 완벽한 은퇴식을 치뤄 낸 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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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08-08-07 15:04   좋아요 0 | URL
다들 로아나 여왕..로아나 여왕..그러기에 판타지소설인가했더니..에코님 소설이군요.
고혈압으로 쓰러져 보지도 않았고, 건조한 기억이 아닌 따뜻한 기억을 가진 저도 애타게 찾는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은데요...아..잼있겠다.

率路 2008-08-07 19:05   좋아요 0 | URL
아마 에코의 다른 소설에 비해 읽기엔 가장 수월할 듯 싶어요.
개인적으론 '중세'얘기 시시콜콜 안나오는 것만해도 대략 감사라ㅋㅎ
 
직업으로서의 학문
막스 베버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분석함에 있어서, 베버는 끊이지 않고 다시 호출하게 되는 이름인 것 같다. 본서 또한 근대 혹은 근대성에 대한 베버의 담담하지만 날카로운 분석이 기본 전제로 깔려있는데, 이는 외려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나 정치를 논한다는 명목으로 당대의 사회가 처한 일종의 '근대의 역설'을-근대성 그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완벽하진 못하더라도-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안하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제하의 본서는, 분량만 따지자면 이보다 거의 두배에 가까운 '직업으로서의 정치' 또한 수록하고 있다. 각각 1917년과 1919년에 행해졌다는 이 두개의 강연록은 그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이어서 편집한 것이 적절해 보이는데,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일종의 주어로(혹은 문제제기로),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서술어로(혹은 일종의 답변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두개의 글은 형식마저 비슷한데, 초반부에서는 각각의 직업이 존재하게 되는 제도적인 조건 등에 대한 통시적, 공시적 논의에 이어 후반부에 그 직업들이 개개인에게 요구하는 덕목을 논하고 있다. 아울러 베버는 시사성이나 독자의 관심을 일부러 무시한 채 주제에 대한 굉장히 지루한 분석을 신중하게 이어가는데(덕분에 박진감이나 재미는 무척 떨어진다.^^;;;) 이는 역설적으로 저자가 근대의 특성에 대해 더욱 보편적이고 적확하게 분석해 나가는 데에 도움이 된 듯 싶다.

베버의 저술을 읽다보면 무엇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태를 굉장히 '깨끗하게(?)'이해하는 시선이다. 이 시선은 어휘에 대한 어떠한 이념적 뉘앙스라던가 사안에 대한 호오적 구분을 무위로 돌리는데, 이는 사실 굉장히 '정치적'이라 할법한 본서에서 거의 극(?)에 달하는 듯 싶다. 때문에 본서를 읽는 독자라면 우선 자신이 갖고 있는 기호적 편견이나 선악적 판단을 다소 '판단중지'할 필요가 있겠다. 베버는 존재와 당위를 명확히 가르고, 할 수 없는것과 할 수밖에 없는것, 그리고 해야만 하는것들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한 후 학자나 정치가라는 직업에 대해 논한다. 이 속에서 베버가 남긴 유명한 이야기들-이를테면 국가란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한 인간공동체라는 것 등등-이 속출하고 불완전 하더라도 최대한 덜 불완전한 근대성을 확립하기 위한 베버의 대안이 나온다. 학자나 정치가의 덕목(나아가 우회적으로 제시되는 바이지만 관료의 덕목)은 이러한 사회조직적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연유로 사실 학자나 정치가를 꿈꾸는 분들이 본서를 읽으면 다소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물론 본서도 학자나 정치인이 가져야 할 덕목이나 경계할 바를 아주 날카롭고 명료하게 논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책 전체 내용을 놓고 볼때 굉장히 부분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미덕과 악덕은 대부분 '합리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서양의 근대문명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한 악덕을 새로운 근대성의 탐색으로 극복하건, 탈근대적 대안을 통해 극복하건 확실한건, 이 근대성이라는 것마저도 그렇게 확고한 기반하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근대문명의 사상적 기원(?)이랄법한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인식론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는, 서양철학사를 대충 훑어봐도 어렵잖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는 근대성의 극복을 운운하기 이전에, 우리가 근대성을 통해 쟁취해낸 수많은 '미덕'이란 것이-그것이 전근대로의 복고 때문이건 근대 자체가 내재한 야만성 때문이건-대내외적 공격에 얼마나 취약한지도 동시에 설명해준다.

베버는 신념윤리의 과잉과 (전근대에 대한 향수에서 기원한)경험으로 도피하려는 당대의 시류 속에 근대성의 위기를 느꼈다지만, 이는 정치와 윤리의 관계조차 일관되게 확립하지 못한채 오락가락하며 극단적인 논리들이 횡행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 비추어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탈주술화된 현대사회에서 대표적인 정신노동이라 할 수 있는 학문과 정치가 학자다운 학자, 정치인 다운 정치인에게 맡겨지지 못한 현실, 아니 그 이전에 '학자다움', '정치인다움'조차 그 누구도 명확히 해명해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그래서 베버의 이름을 '또다시' 호출하고 있는 듯 싶다. 쉽지 않은 책이고, 무엇보다 목차가 나뉘어 있지 않아서 참 '숨가쁜' 책이지만, 한 번쯤 읽어볼만한 고전이다. 사견을 덧붙이자면, 적어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보다는 베버의 목적의식을 좀 더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으면서도 부가적으로 얻어 낼 수 있는 지식 또한 상당한 듯 싶다.

ps. 본서는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말미에 권위있는 학자의 관련 논문을 이어붙혀 고전의 현대적 이해를 돕고 있는데, 이 책 말미에 있는 슐루흐터의 논문 '가치자유와 책임윤리'는 본문의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창조적 해석까지 도모하고 있다. 솔직히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베버가 근대성을 다소 일의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화용론적 해석의 단초를 찾는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본문을 논외로 고민해봐도 괜찮은 논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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