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 시간에 선생님께서 예전에 가르쳤던 한 고등학생이 이번에 수능을 봤다고 한다. 그 학생이 수능이 끝난 뒤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고민을 털어놨다는데, 시험을 잘 보지 못했으며, 자신이 삶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시험과 삶의 불행은 연관관계는 없다. 부모님의 기대가 너무나 크고 자신이 그 기대를 채워야만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괴롭고, 할 수만 있다면 독립해서 따로 살고 싶다고 했단다.

 그리고 이는 이 날 아침에 우리집에서 발행했던 잠깐동안의 사건- 엄마와 나 사이의- 과도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부모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자식은 당연히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리고 오랜시간 부모의 보호와 관심 아래서 자라난다. 한국의 '자식'들은 대개 아무리 빨라도 20살, 늦으면 30살정도까지도 부모의 도움을 받고 산다. 물론 나이를 먹을수록 그 도움의 정도가 미미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완전히 독립할 수 없다는 면에서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의존 관계는 해체되지 않는다.

 또, 부모가 자식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기대를 하고 자식이 자신의 기대를 채워주기를 바라는 것은 대개의 부모들의 특징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관심과 기대의 정도가 너무 지나치면 부작용을 일으킨다는데 있다. 또한 부작용을 넘어서 그것은 한 개인으로서의 인격체에 대한 권리침해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부작용이라는 것은 대개는 10대 사춘기에 발생한다. 부모의 지나친 보호와 관심과 기대, 그리고 간섭, 강요 등은 아이로 하여금 심한 압박감, 즉 정신적  스트레스를 일으키게 하고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이 아이들은 때로는 이로인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대개는 가출이나 다툼, 신경질 등으로 이어지지만, 어쨌든 자살이 아니어도 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임은 틀림없다.

 개인으로서의 인격체에 대한 권리침해라는 것은, 자의식이 성숙한 상태인 10대후반에서부터 20대후반까지에 해당한다. 이 나이대의 자식들은 이미 성인에 가깝거나, 성인이 된 상태이고, 이들은 이제 누군가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주체적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하는 상태에 놓여있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한없이 소유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영역 아래에 두고 싶어한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자식이 자신의 기대에 응해주기를 바라고, 자신의 지시대로 행동하기를 바란다. 이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주체적인 상태에 놓여있음에도 말이다.

 나는 부모의 역할은 자식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돼, 자식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선택을 하건 스스로에게 맡겨야한다고 생각한다. 권유, 조언을 할 수 있지만 강요, 지시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미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해 자기주체성이 확립된 이들에게 외부로부터의 강요나 간섭, 지시는 당연히 자기주체성을 박탈하는 행위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자기주체성이 박탈당한 인간은 이미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개인이라 볼 수 없으며, 그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강요, 간섭, 지시는 자식을 하나의 성숙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외국의 부모들은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성인이 된 후의 자식들을 해방시켜주는 반면,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자식을 소유하고 놔주지 않는 경우가 대개이다. 20살을 넘어 성인이 된 후에도, 사회적으로 독립한 후에도, 결혼을 한 후에도, 우리나라의 부모들에겐 자식은 자신의 소유물이다. 따라서 자신이 투자한 만큼의 결과를 얻기를 바라고, 끊임없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기를 바란다.
 
 자동차를 구입한 뒤 수리하고 정비하고 세차하고 가꾸는 데에는 돈이 많이 든다. 그리고 투자자는 돈이 든 만큼 자동차가 제 값을 해주기를 바란다. 이는 당연하다. 소유물이니까. 하지만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기에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투자하더라도 투자한만큼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질책해서는 안된다. 투자하고 기회를 주는 것은 부모의 자유지만, 기회를 활용해서 어떤 결과물을 산출하는 것은 자식의 몫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방치하는 것은 좋지 않다. 방치하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이며,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정서적으로 엇나갈 가능성이 크고, 사회적으로 문제있는 사람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자식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식을 올가매서는 안된다. 방치된 자녀는 생명은 보존할 수 있지만, 강요와 심한 압박감 속에서 자란 자녀는 최악의 경우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살이 아니더라도 이 또한 정서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자랄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있어서는 믿음이 필요하며, 1차적 관계인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믿음과 사랑을 잃어버린 자녀는 타인을 사랑하기 힘들다.

 이 땅의 부모들이 제발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았으면 한다. 더불어 수능이 끝난 이후 부모의 기대치에 못미쳤다는 스스로의 비관으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는 이가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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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간지를 보니 교육인적자원부가 '교원 양성체제 개편 종합방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교사의 자질과 능력을 높이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내놓은 거이라 하는데,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지금의 교원자격 취득을 위한 교육과정 및 자격검정 기준이 너무 느슨하고 교원양성기관 또한 별도 운영기준 없이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어 이를 고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생실습기간을 중등교육 4주에서 8주로, 초등교육은 8-11주에서 15주 이상으로 늘린다고 한다. 또, 시도교육청에 '교육실습지원센터'를 설치해 초중고와 연계해 지원하고, 실습지도 교사에게는 승진 가산점을 부여하기로 했단다. 사대는 최근 4년간 임용률이 10%미만일 경우 비사범계 학과 전환을 유도하고 교사자격 기준에 미달하는 학생은 졸업 시키되 자격증을 주지 않기로 했단다. 또 교사 선발 기준은 면점과 실기위주로 변경된다. 2008년도 임용시험부터 지필고사를 35%로 낮추고, 심층면접과 실기능력 위주로 뽑는단다.

가장 민감한 사안인 교사자격증 수여조건을 보자면, 현재 일반대에서도 교직과정을 이수한 뒤 평균 80점이상이 되고, 일정 필수 과목을 이수했다면 교사 자격증을 주고 있으며, 사범대 또한 성적에 관계없이 졸업학점만 따면 교사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대를 졸업하고 교육대학원에 진학하면 교사자격증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사범대라 할지라도 평균학점 C미만이거나 실습성적이 B미만이면 자격을 주지 않으며, 일반대의 경우에는 교직과목이수 20학점에서 33학점으로 늘린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문제 없어 보인다. 교총과 전교조의 반응과도 같이 방향은 맞아보이는데 내용이 부실하다. 그런데 교사의 실질적인 질을 높이기 위한 이러한 시도들이 뭔가 하나를 빼놓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교사의 교육관과 교육학에 대한 기초지식, 그리고 실습이 중요하긴 하지만, 여기에 한가지 빠진 것이 있다면 전공에 대한 심도있는 지식이다. 자신이 가르칠 과목에 대해서 깊이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고려하는 항목은 빠져있다. 오히려 임용시험에서 전공의 비중이 줄어듦으로써 전공을 소홀히 할 가능성마저 엿보인다.

대학원 입학 시험을 치루는데 한 초등학교 교사가 함께 응시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교대'나왔더니 배운 건 없고 머리에 똥만차서 머리 좀 채워보려고 왔다" 라고 했다. 초등교사가 되기 위한 교대의 교과과정들이 현장에서 가르칠 만한 뭔가를 배우기에는 부족함이 없어보이지만 교사를 빈 깡통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자기발전에 소홀히 해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다. 물론 개개인에 따라서 스스로 알아서 학습을 할 수는 있겠지만, 학문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사범대는 교대와는 좀 다르지만, 이 역시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에 한하여 일반대의 전공학과보다 수박겉핥기식의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고 본다.

내가 말하고픈 것은 그것이다. 물론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가르치면서 대단한 학문적인 내용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가르칠 내용만을 알고 있는 것은 가르치는 교사로서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윤리학을 가르친다 그러면 교과서에는 공자는 뭐라 했다, 플라톤은 뭐라 했다 정도의 기술만 되어있고, 물론 그것만 가르쳐도 무방하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내용들에 대한 심도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가르침에 깊이가 생길 것이라고 본다. 교사는 단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연구하고 끊임없는 공부를 해야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교대와 사범대의 과정이나 개편안의 내용에서 볼 때 이 점이 무시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서 일반대에서 깊이있는 배움을 한 이들에게 교사자격증 부여하기를 꺼려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20학점에서 33학점 이수해야 준다는 것은 사실상 일반대의 교직이수자들의 발을 묶어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대학에서 대처해서 33학점 이수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면 그저 말없이 따르겠다. 더 배우는 것은 문제삼을 바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조처들이 일반대생의 교직진출을 막는 행위라면 이를 묵과 할 수는 없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전공에 대해 깊이있게 배운 이들이기 때문이다. 단지 이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가르침에 대한 지식인데, 이는 교육대학원을 통해 공부할 수 있다. 좀더 나은 방향으로 개편안을 잡자면 일반대의 교직이수자들을 대상으로 '교육학'에 대한 좀더 다양한 과정을 보충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전공을 깊이있게 공부한 이들이 교육학도 더불어 익힌다면 실습이전에는 가장 바람직한 교사준비생이 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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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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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간지 서평란에 소개된 글을 보고 점찍어놨다 구입하게 된 책이다. 구입한지는 한달도 더 됐지만 이제서야 보게됐다.

 실제 <생각의 지도>라는 이 책의 제목은 그럴 듯한 대단한 뭔가를 담고 있지는 않다. 마치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을 꿰뚫는 어떤 성찰을 담아내고 있을 것 같은 책의 제목은, 그러나 사실상 책을 열어보면 그다지 기대했던 바에 못미침을 알게 된다. 한마디로 책에 실망했다. 그것은 책 제목을 통한 나의 기대감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나쁜 책'이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나의 기대에 못미쳤다는 것 뿐이다.

 <생각의 지도>는 미국의 심리학자인 리처드 니스벳이 쓰고, 그의 제자인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가 번역했다. 아무래도 저자의 밑에서 공부한 사람의 번역이라 저자를 오해했을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는 안심해도 좋다. 대개의 '번역'이란 저자의 실제 의도와 번역자의 해석간의 차이를 항상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간극을 줄여 저자의 말을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했다면 잘된 번역이지만,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면 좋은 번역이라 할 수 없다. 일단 번역은 믿고 가자.

 동양의 사고 방식과 서양의 사고 방식.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그리 말한다. 다른 이들은 모두가 누가 알려준 것은 아니지만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고 대강의 차이점을 감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바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은 채 어떤 '감'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저자와 그의 연구진들은 이러한 차이를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각종 실험을 한다. 그리고 실험결과를 통해 동서양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도출한다.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의 기준은 문명과 문화다.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각기 그 사람이 발붙여 사는 땅의 문명과 문화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 혹은 애초 미국에서 태어나 계속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의 경우에는 동서양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서양의 문명이라는 것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되며, 동양은 중국에서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어떤 단체와 조직보다 개인의 행복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졌으며, 따라서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리고 행복이란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탁월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 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탁월성에 도달하고자 했다. 

  반면, 동양의 문명의 시점인 중국에서는 '행복'이란 '화목한 인간관계를 맺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개인의 탁월성을 추구하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의 우애와 관계를 중시했고 튀지 않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로부터 서양에서의 권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권 리'이지만, 동양에서으 권리는 '공동체 전체의 권리 중 자신의 몫을 담당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확립된다.

 대략적인 동서양의 차이점을 말해보자면 이렇다.

 동양인은 사물을 볼 때 전체 속에서 조화를 중시하며, 서양인은 각 사물의 개별성을 중시한다. 따라서 어떤 풍경을 보여줬을 때 동양인은  풍경의 전체적인 구성을 쉽게 기억하지만 서양인은 특별한 사물 하나에 집착한다.

 또, 교실에서 동양에서는 '왜'라는 질문보다 '어떻게'라는 질문이 더 많이 오가며, 서양에서는 '어떻게'라는 질문보다 '왜'라는 질문이 더 많이 오간다. 이는 서양인들이 사건을 인과관계에서 보기 때문이다. 목표지향적 사고를 하는 이들에게는 결과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사건속의 인물과 사건정황과의 관계적 맥락을 중시하기에 그러한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진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실생활의 부분의 경험을 통해 동서양의 차이를 도출해내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양인은 꼭 그러한 사고를 하고, 서양인은 꼭 이러한 사고를 한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지 동서양인의 '경향성'을 도출한 것이지 어떤 특정 개인의 성향을 가리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양인이면서 서양인보다 더 서양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의 결과를 통해 나는 동양인이니까 이런 거구나 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한가지 덧붙이지만 저자 역시 책 뒤에서 잠깐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섀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과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문명의 종말>과 함께 읽으면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세계정세와 연관지어 보는 시각이 생길 수도 있겠다. 더불어 내가 한가지 더 추천하고자 한다면, 나 역시 읽지 않은 책이지만 하랄드 뮐러의 <문명의 공존>도 함께 읽으면 <문명의 충돌>에 맞서는 다른 견해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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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엇? 지킬박사 하네? 하고 케이블 티비를 한동안 응시하고 있었는데 이상하다. 내가 알고 있던 영화랑 틀린 것이다. 제목만 같고 내용은 다른 하지만 역시 이 영화에서도 지킬박사는 등장하는 홍콩액션영화였다. 하필 제목을 똑같이 할 건 뭐람 하면서 계속 보긴 했지만, 그래도 원작을 보지 못한 아쉬움만 커졌다.

 이 홍콩액션영화에서의 지킬박사는 아내와 함께 홍콩에 신혼여행을 왔다가 홍콩 갱단에게 장기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관광가이드를 가장한 한의사이자 무술가인 할아비의 도움으로 지킬박사만 살아나고 폭발로 손상된 얼굴을 새로이 성형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게 만든다. 지킬은 할아비에게 한의학과 무술을 배우면서 복수를 하게 되는데...

 그런데 홍콩에 전설로만 알려졌던 미국의 배트맨이나 슈퍼맨과 같은 정의의 사도인 '호랑이'가 할아비였던 것이고, 이후의 호랑이는 바로 지킬이었던 것이다. 지킬은 그렇게 복수를 함과 동시에 홍콩의 호랑이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다지 별 볼 것 없는 액션영화이고, 본래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영화에서의 그런 이중적인 인간상을 보여주기보다는 오락적인 액션에 치중함으로써 단지 유명 영화의 제목을 따왔다는 인상을 풍기기만 했다. 그냥 오락용 영화로 애써 찾아보진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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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대학 4년동안 배운 바를 토대로 논문을 써서 제출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졸업과정이다. 그리고 이는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최근 경기침체, 취업률 하락과 관련해 취업을 위해서는 어차피 공부해야할 영어를 학사 학위 취득의 필수조건으로 논문 대신 걸고 있는 대학들이 많아졌다.

학과의 특성상, 논문을 내지 않더라도 작품발표나 실습보고 등으로도 졸업자격조건으로 내거는 것은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오로지 졸업을 위해 영어점수만을 요구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잘못되었지 싶다. 취업안되고, 어차피 취업을 위해 공부해야할 영어를 학생들의 편의를 봐준다는 핑계로 대신한 것인데, 이는 대학의 설립이유에도 맞지 않는다.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다 라는 구태의연한 문구를 반복 사용하며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대학이 학문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는 대학의 전공교수님의 말은 이와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다.

"요즘 대학원생들은 대학원생 같지가 않아. 우리때는 말이야. 순전히 학문하겠다는 목적으로 대학원을 진학했는데, 요즘 대학원생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취업 잘해볼까 하는 마음에 진학하는 거 같애. 오히려 대학원생들이 학부생들보다 더 공부안해"

취업이 중요하긴 하다. 자기자신의 생존의 문제가 달린 것이므로. 그래서 난 취업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고, 취업을 위해 학과공부보다 영어공부에 몰두하는 이들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렇게 만들어버린 우리사회가 문제있음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한국대학신문의 논설위원 김우종씨는 "한국형 학벌주의는 다음 세가지이다. 동문끼리만의 배타적 파벌주의, 그리고 수능고사 성적표가 만들어 내는 대학 서열주의, 그리고 학문적 지위에 의한 권위주의 등 세가지가 모두 학벌주의에 해당된다. 이 중 앞의 두 가지가 저지르는 횡포는 흔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세번째 학벌주의가 지니는 횡포에 대해서는 별로 눈여겨 보지 않는 것 같다." 라고 말하면서, 최근에 학벌을 지닌 이들이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있지 않고 자꾸만 그들보다 못한 학벌을 지닌 이들이 가져야 할 파이를 떼어먹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자면, 예전같으면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은행창구업무를 맡았는데 요즘은 괜찮은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이 그 일을 하고 있고, 9급 공무원도 고졸출신들이 했는데 요즘은 4년제 대학 출신들이 가져가고 있으며, 심지어는 청소부를 모집하는데 박사출신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공부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만큼 공부한 것을 사회에 써먹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자꾸만 다른 사람들이 먹을 파이를 가져간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예들은 모두 오로지 '취업'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취업하기 위해 대학에 가고, 취업하기 위해 석사를 따며, 박사를 딴다. 그리고는 자신의 학위와 상관없는 다른 일을 한다. 이는 국가적인 손실이다. 유능한 인재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현실은 확실히 잘못됐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이 역시 학벌주의에 있다. 은행 창구직원을 뽑는데 대학 출신이 오면 뽑지 말아야한다. 그리고 9급 공무원 뽑는데 대학 출신이 오면 뽑지 말아야 한다. 청소부하는데 박사가 오면 뽑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취업을 하기 위해 대학에 가고, 석사, 박사를 따는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다. 사회의 각 위치에서 꼭 필요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을 뽑는다면 '학벌주의의 폭력'은 생기지 않는다. 지금의 현실은 모든 것이 학벌로 이뤄지는 사회시스템이 문제인 것이다.

모두 대학갈 필요없다. 은행 창구직원 하려고 대학 갈 필요 없다. 창구직은 필요한 능력을 갖춘 상업고등학교 출신들에게 넘겨주자. 그리고 당신이 창구직원을 하고 싶거든 대학가지마라. 상업고등학교 나와라. 그리고 인재를 채용하는 권한을 가진 자들은 업무에 비해 과도한 능력을 가진 자를 오히려 서류전형에서 제외시켜야 할 것이다. 그래서 쓸데없이 대학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4년동안 교수는 교수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서로 딴 짓을 하고 있으니 이 어찌 국가적인 낭비가 아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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