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케케묵은 가산점 논란을 이렇게 다시 꺼내는 이유는, 필자의 글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  에 대한 독자들의 여러 글들에서 필자의 주장에 대해 적잖은 오해를 하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필자의 기본적인 주장은 변함이 없는 상태에서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 과는 외견상 전혀 달라보이는 한 가지 입장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은 '징병제의 폐해'를 지적하는 필자의 기본적인 입장과 '군 가산점 논란'에 대한 여성주의의 잘못된 시각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에 보인 많은 이들의 반응이 자신의 군대생활은 뭘로든 보상받아야함을 말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서는 필자 또한 그들과 견해를 달리 하지 않는다. '군가산점 논쟁'은 이화여대의 몇몇 여학생들이 공무원 시험과 교사임용고시에서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으로 헌법소원을 낸 것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후 시험에서 군가산점은 더이상 적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들을 비롯한 남성들은 집단적으로 반발하였고 인터넷상에서 치열한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사이버 마초들의 집단 테러(욕설, 비방)가 있기도 하였지만 여기서 이 점을 지적하진 않겠다. 논점이 흐려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필자의 의견을 말하자면, 필자는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 군가산점을 부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소원을 제기한 몇몇 여성들을 비롯한 군가산점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진보주의,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본 옳은 판단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문제의 근본을 제대로 보지 못한, 자기들만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앞세우고 남성들을 희생량으로 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주장이었다.

교사임용고시에서 남성들은 자기들과 같은 조건(완전히 100% 평등한?)에서
임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2년 2개월, 2년 6개월의 지적활동을 강제적으로 금지당한 남성들은 그들과 평등한 조건이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네들이 외치는 정말 평등한 조건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네들도 똑같이 2년 2개월, 2년 6개월의 군복무를 행하고 돌아와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봐야한다. 남성들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생산성이 높은 시기에 군대에서 최소 2년 2개월의 기간을 소비하기 때문에 제대 후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기도 힘들다. 여기에 시험까지 보려면 그만큼 떨어진 지적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엄청난 노력이 든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군의 징병제를 타파하고 모병제로 바꾸는 것이며, 이는 남성들만이 아닌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여성들을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모병제를 시행해서도 여성들은 지금과 같이 선택적으로 군에 갈수도 안갈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징병제의 타파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그것을 별도로 하고, 남성과 여성의 진정한 평등이란 무엇인가? 를 따져봐야 한다.

당시 군가산점 논란은 냄비 끓듯 논란이 커지다가 금새 사그라들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이미 군에서 권력과 억압의 문화, 규율과 복종의 문화를 익힌 남성들이 헌법에 의거한 판결에 자발적 복종한 것이라 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국가가 남성을 지배하는 방법이다. 이에 대해 꼭 그러한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전혀 상관이 없다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국가는 '군대' 라는 조직을 통해 남성들을 사회조직 일원으로서 훈육시켰으며, 과거에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지배받는 문화가 팽배했던 만큼, 남성을 지배하면 해당 남성에 귀속된 가정의 일원(여성을 포함하여)을 모두 복종하도록 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 그것은 군대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유교식 교육의 문제다 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도록 하자. 현재의 사태에 영향을 끼친 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그 중 '군대'에 그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의 말을 무조건 듣는 그런 시대는 지났으며, 여성의 권익이 어느 정도는 남성과 대등하게 보장받고 있다. 그런 여성권익의 수호차원에서 군가산점 폐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결국 희생량은 군대에서 권력과 억압, 명령과 복종의 문화를 습득하고 재사회화된 남성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타당하고 합당한 주장을 외치는 방법을 잃었으며(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그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남들과 다른, 사회에서 벗어난 주장을 일삼는 자는 반드시 국가의 보복조치를 당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과거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부터 우리네 사회는 그러한 국가적 차원의 보복조치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일종의 후유증이라고 보면 되겠다. 근원적인 문제해결은 징병제의 타파이며, 그 이전에 여성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진정 남성과 여성의 평등의 실현차원에서 타당하고 합당한 것인지를 판단해야한다. 모병제의 실시는 앞서 지적한 그러한 '가능성'으로부터 많은 남성들이 벗어날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오히려 여성들이 진정한 남여평등을 외치고자 한다면 남성들의 가산점을 빼앗을 것이 아니라 징병제 타파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 자는 얼마되지않으며, 깨닫는다 할지라도 징병제 타파를 외치기보다 군가산점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있어 쉽기 때문에 그들은 남성을 희생량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필자의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을 통해 마치 필자가 남성들의 군대기간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반응을 보인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됐으리라 본다. 필자는 그들의 군대에 빼앗긴 기간을 사회적 제도를 통해 충분히 보상해야한다고 보며 그 점에서 '군가산점'을 되살릴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군가산점 논쟁'이 일어난 배경에는 '징병제'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여교수 채용에 대한 단상'과 이 글은 어떻게 보면 정면으로 충돌하는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글 같지만 결국에는 조직사회에 뿌리박은 군대문화에 대한 지적이 공통적으로 들어있다. 어떤 이는 '군대식 사고' '군사문화' 만이 그 원인은 아니며 다른 원인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필자는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필자가 여기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 다른 원인들이 아닌 '군대'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또한 한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을 통해 필자는 그 어떤 현상에 대한 원인으로서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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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 같은 일을 하게 되면 조직내에 있는 이들의 친목을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술자리를 갖기 마련이다. 꼭 모르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회식'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달리하기도 한다. 또한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과 자리를 할 때도 그곳은 술자리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술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이 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있어 술자리는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다.

술이 한 두잔 들어가고 이야기 꽃이 피면서 서로 술을 따라주기도 하고, 건배를 하기도 한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예의상(?)이라도 잔에 술을 따라놓고 건배를 하고 술잔을 내려놓기도 한다. 그런데 왜 이것이 '예의'라는 이름으로 술을 못하는 이들을 구속해야하는가? 술 대신 음료를 시켜 음료수 잔으로 건배를 하면 안되는 것인가? 심지어는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어떤 사람은 술을 못하는 사람에게 자꾸 술을 마시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는 취했는데 남이 안취하니까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술 예찬론자들은 술이란 취하라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반드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취할 필요는 없다. 취하고 싶은 사람은 취하고, 취하기 싫은 사람은 안마시거나 자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술 취한 자들은 '자기'를 넘어 '타인'까지도 간섭하려든다.

얼마 전 한 일간지 오피니언 란에 게재된 글을 통해 소설가 공지영씨는 이런 말을 했다.

"모임이 끝난 후 2차를 가야 하고, 돌리는 폭탄주를 빠짐 없이 마셔야 하고 그런 대열에서 이탈해 혼자 집에 가야한다거나 혼자만 음료수를 마시겠다거나를 고집할 때 쏟아지는 눈총에, 정말 내가 너무 까탈스러운가,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싫다"

"그것이 공익을 해치지 않는 한, 그것이 비윤리적이거나 범죄적이지 않는 한 사람의 특성이 그 자체의 다양성으로 존중되는 것이 무어 그리 나쁜가. -중략- 갈비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혼자 피자를 한쪽 싸들고 가서 먹을 수도 있고, 생맥주 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는 사람이 있어도 모두가 즐거운 모임..."

그렇다. 술을 안마시는 사람은 술을 마시고 술을 강요하는 그들에게 일말의 죄책감 내지는 미안함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죄책감 내지 미안함을 느껴야하는가? 오히려 술을 강요하는 그들이 술을 안마시는 이들에게 미안해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뭔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의 취향마저도 '예의'라는 이름으로 억압하고 강요하려고 한다. 술자리에서의 '예의'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 술을 마시는 사람에 대해서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는 사람이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 대해서 지켜야 할 것이다. 더이상 술자리에서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사람에 대해서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말자. 술을 안마시는 것은 당신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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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너는 왜 군대를 거부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에 대해 한 가지 만으로 대답할 수 없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뒤섞여있기 때문이다.

첫째, 나는 국제사회에서 우리군이 미국의 편에 서서 줏대없이 놀아나는 꼴을 볼 수 없다. 지난날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우리군은 비록 무장군을 보내지 않고 의무병 등을 비롯한 비무장 병력을 파견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미국을 도운 꼴이 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에게 처절하게 당해야만 했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미국은 당시 그들이 생화학무기를 사용할 것이고, 핵무기가 있다고 했지만 그 전쟁에서 생화학무기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고, 핵무기 또한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했다. 설사 그 무기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유로(물론 이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지만) 그들을 억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 논리대로라면 미국은 온갖 무기들을 갖고 있으니까 다른 국가들로부터 공격을 당해도 이를 정당하지 못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패권주의에 한 몫을 덧붙여준 우리 국군에 나는 동의할 수 없고, 동참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군대를 거부한다.

둘째, 나는 평화주의자임을 선언했다. 지금의 국제상황에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결정권은 결단코 강대국에 있다. 그들이 더이상의 중동에 대한 차별정책을 쓰지 않고 그들을 돕는다면 평화는 온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평화는 우리에게서 멀어져 갈 것이다. 비폭력을 기반으로 하되, 강자에 대한 약자의 최후의 방법으로서 마지막 남은 '테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단 그 테러는 무고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된다. 마지막 남은 방법인 '테러'라는 수단을 통해서도...

셋째, 징병제 라는 제도를 통해 사회의 각 분야의 젊은 인재들이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깝다. 모든 분야에서 19-24세 라는 시기는 한창 자신의 일을 찾아 그 기반을 닦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시기이다. 그 중에는 군 제대 후 다시 시작하기 힘든 일도 많아 개중에는 자신의 꿈을 접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분야의 후진성이 이와 전혀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터이다.

넷째, 나는 군이 상하의 명령복종체계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기본적인 예의가 있는 조직이었으면 한다. 명령으로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될 사안에 대해 하급자라고 해서 이에 복종해야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그것이 군기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고 해도 합당하고 타당하지 않은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은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거부했을 때 이에 대한 보복조치는 금지되어야한다. 보복조치가 있다면 하급자는 겁을 먹은 채 명령에 복종해야만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비인격적 언어행위 또한 삼가해야한다. 욕설, 인격모독, 인격비하식의 발언은 모두 금지되어야한다. 그것이 각 개개인의 문제라고 둘러댈지 모르나 이러한 행위가 실시되었을 경우 조직은 행위 주체자에 대해 어떤 일련의 조치를 가해야한다.

나는 위와 같은 이유로 군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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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의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바다출판사)를 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랑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바마 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 자매처럼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내가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마틴 루터 킹 그로부터 배울 점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관계없이 그 가장 밑바닥에는 '인간'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를 토대로 하고 있다. 위의 저 글귀들은 그의 포용과 평화, 인류애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휴머니즘이고, 평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평화는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의 실재"다. 평화=정의라는 것이다. 이 땅에 정의를 세우려 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기본적으로 '평화'를 외쳐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정의의 수호자라 칭하는 지금의 미국을 바라보자면 누가 테러리스트인지를 헷갈리게 만든다.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평화를 깨려하는 미국, 평화를 깸으로써 자신들의 전 세계에 대한 패권을 강화하고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현을 앞당기려는 그들. 그들이 진정 정의를 실현하는 자들인지 의심스럽다.

마틴 루터 킹의 평화에 대한 생각은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간디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저항하며 조국을 식민지화한 영국인들에 대해 함께 같이 살자고 외쳤다. 그들을 내쫓으려하기보다 영국인과 인도인이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살기를 바랬다. 간디의 넓은 마음과 평화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스스로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라고 생각한다면 먼저 '평화주의'를 외칠 것을 주장한다. 이 '평화주의'는 모든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어야한다. 폭력과 전쟁이 있고서는 평화란 정착할 수 없다. 나는 나 스스로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라고 규정짓고 싶다. 따라서 나는 평화주의자가 될 것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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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느 글에선가 "지식인이란 늘 불안할 수 밖에 없고 불안한 존재다"라는 문장을 본적이 있다. 항상 끝없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의 영역에 서고자 하며 사회의 잘못된 습관이나 관행, 제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비판을 해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인이 안정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비판적 지식인들이 꽤 있다. 그러나 지식인 그룹에 넣을만한 사람들 중 비판적 지식인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다수의 지식인 그룹이 자신의 위치에서 안정만을 추구하고 있다. 사회는 그들에게 편하게 먹고 살라고 그 자리를 내준 것이 아니다. 사회가 지식인에게 책을 읽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편하게 먹고 사는 권리를 부여해준 것의 이면에는 그 대가로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달라는 요구가 들어있는 것이다. 비판을 게을리하는 지식인은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당신이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생각하고 있고,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은 늘 불안한 존재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당신에 대한 칭찬이다. 상대방이 그것을 욕으로 한 것이든, 칭찬으로 한 것이든 상관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당신은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것은 당신이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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