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부터 로스쿨 제도가 우리나라에도 도입된다고 한다. 로스쿨 제도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사람이 로스쿨에 입학해 3년간 공부를 하고 그중 80% 정도의 사람들이 변호사 자격을 얻어 사회로 나가 변호사로서 활동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로스쿨 제도의 도입으로 인해 대학 4년, 이후 로스쿨 3년 동안의 만만치 않은 학비 문제가 걸려있고, 그동안의 생활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신문보도내용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년 평균 등록금이 1인당 천오백만원에서 이천만원에 이른다고 하니 가히 어마어마한 돈이다. 물론 일본의 학비보다야 우리나라학비가 좀더 덜 들긴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장장 7년간의 공부를 하기위해서는 돈 없는 자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수치일 것이다. 또 200명 가량으로 정원을 제한하겠다는 것은 많은 법률가를 배출해 서비스의 질을 높이겠다는 애초의 취지는 고사하고 오히려 귀족 법조인을 양산해내 하나의 권력집단으로 만드는데 일조할 것이다.

이렇게 로스쿨을 나온 사람들은 당연히 본래부터 부를 축적하고 있던 집안에서 나올 수 밖에 없으며 당연히 그들 대다수는 그들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서민을 위한 법조인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렵게 어렵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공부해서 법조인이 된 박원순 변호사나 노무현 대통령 같은 사람들은 더이상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을 겪은 자만이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그들을 위한 희생을 할 수가 있다. 돈과 힘을 갖춘 집단에서 나온 이들은 그들의 발밑에 깔린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을 도울 수 없다. 일부 정신이 제대로 박힌 부유층 집안에서 간혹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대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 아닌가? 부는 세습되는 것이다. 이제 부와 더불어 법과 관련된 권력 또한 세습되는 것이다.

책세상에서 나온 문고판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해제편을 보면 역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자들은 법률과 경찰력에 의해 처방되는 치안질서 유지를 강력하게 희망하게 되었고 반면 빈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부자들의 재산을 공유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다. 그리하여 재주 많고 웅변 잘하는 자들이 '교묘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바꾸어놓은 기만을 통해 부자의 특권은 확고해지고 불평등은 제도적 가치로 바뀌게 된다. 가난한 자들은 영원한 노동과 비참과 예속으로 몰리게 되었고, 소유와 권력으로부터 추방당했다."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도 딱 들어맞지 않는가!? 18세기를 살았던 루소조차도 지금의 우리네 현실을 잘 알고 있는데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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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자 신문 1면을 보자니 광화문에서 시위가 있었단다. 탄핵반대집회이후로 최대규모라고 하는데 수치상 10만여명이라 한다. 재향군인회, 한나라당 지지자, 자민련 등 온갖 보수주의 시민단체와 시민들이 모여서 노무현 대통령 사퇴를 위해 시위를 벌였다는데 난 이  사진을 보고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이들이 어제 벌인 시위가 굉장히 과격했다는 것이다. 탄핵반대집회의 경우-내가 직접 해본 경험에 비추어 보아- 수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한손에 촛불을 들고 질서정연하게 시위를 벌인데 비해 이들의 시위는 너무나 과격했다. 따라서 이러한 보수주의자들의 과격함이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고, 이는 탄핵반대집회 때의 평화로운 광화문 촛불시위와 대조되게 마련이다.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보수주의자들의 과격함이 드러난 것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대한민국에서의 '보수주의'에 한정된 것이다. 다른 국가-가령 유럽계통-에서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우리네와는 다르게 쓰인다. 사실 '보수'는 그다지 나쁜 말이 아니다. 그냥 옛것을 보존하고 정체되어 있음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수구보수', '꼴통보수'에서 볼 수 있듯이 '보수'는 나쁜 뜻으로 쓰인다. 내가 위에서 사용한 '보수'라는 단어 역시 저들 모두를 지칭할 마땅한 단어가 없어 사용한 말이다.

 과거 진보세력은-더이상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에 대해 딴지를 걸지는 말길 바란다. 언론에서 사용하는 뜻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으니까- 군사정권 하에서 짓밟힘을 당하며 간신히 생명의 맥만을 이어오고 있다가 김영삼, 김대중 정부이 들어서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드디어 세력을 확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반면 요근래 들어 보수세력들이 위축됨을 보였는데 어제의 광화문 격렬 시위는 이런 보수세력들이 다시 응집, 결속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해석해도 될 듯 싶다. 진보언론, 진보시민단체 못지 않게 최근 들어 보수언론, 보수시민단체가 득세하고 있고, 양자대결의 양상으로 번져가고 있다. 양쪽 모두 네트워크화 되면서 대단한 결속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상의 김영상,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진실한 의미에서의 '보수'이다. 유럽의 사상 스펙트럼에 비추어 본다면 이들 정부는 극우는 아니더라도 우익적, 보수적 색깔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들 정부가 대단한 친북용공세력이 되어버린다. 무슨 마르크스 혁명을 재현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내가 보기엔 아직 이 나라는 진보로 가기에는 갈길이 멀다. 하지만 극우에서 왼쪽으로, 즉 극우->우익 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극우, 보수 세력들이 난리를 치니 할 말을 잃어버린다. 나는 극좌로 가길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유럽과 같이 그냥 중도까지만이라도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야 어느정도 사상의 스펙트럼 위에 균형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보수집단의 광화문 시위의 격렬함은 그들이 얼마나 미성숙한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확실한 징표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어제 시위가 불쾌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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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자 신문을 보니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판결을 내렸던 이정렬 판사가 이번에는 성매매에 대한 재판을 다뤘는데, 17살짜리 학생이 20대 남성과 성관계를 맺은 것에 대해 해당 남성에 무죄를 선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17살짜리 여학생은 당시 본인의 자발적인 의지로 아무런 대가 없이 남성과 성관계를 맺었고 돈은 오가지 않았지만 남성으로부터 단순 편의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이는 합법적인 남녀간의 관계인가 아니면 원조교제로 봐야하는가?

 해당 남성의 도덕성을 묻지 않는다면 이 재판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는 것 또한 무리이지 싶다. 하지만 무죄를 선고하자니 해당 남성이 괴씸하다. 오로지 법적인 차원이라면 이정렬 판사의 판결은 맞지 싶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성우월주의 혹은 마초도 아니다. 남자는 누구나 조금씩 마초다 라는 명제에서의 '마초'개념이 아닌 흔히 지나친 남성우월주의적 시각을 지칭하는 '마초'로 볼 때 말이다. 17세 여학생은 분명 대가를 받지 않았고 본인의 자발적인 의지로 관계를 맺은 것이니 이건 본인의 책임이지 그 책임을 남성에게만 부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모두 무죄이거나 모두 유죄이거나 해야 옳다. 17세 여학생이 미성년이기 때문에 봐줘야한다는 것은 지나친 보호주의다. 누구로부터도 강제에 의해서, 협박에 의해서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닌 본인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서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면 나는 이런 행동을 해도 미성년자이니까 무죄야 라는 인식이 확산돼 오히려 '막가는 여학생'의 숫자를 늘리는데 기여할 뿐이다. 그녀 역시 잘못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줘야한다. 그런점에서 이번 판결에 무죄를 내린 것은 남성의 파렴치함이 꾀씸하면서도 해당 여학생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선 옳다. 물론 이정렬 판사는 여학생에게 경각심을 주기위해서라기보다는 법률적 해석에 따라 그런 판결을 내렸겠지만 말이다.

  나는 결코 해당 남성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자 모두를 처벌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양자 모두 무죄다. 하지만 이 무죄는 오로지 법률적 무죄일뿐 도덕적 무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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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관에 대한 관심도 변화'는 일부러 뭔가 있어보이게 쓴 제목이다. 사실 이 글의 내용은 나의 외모에 대한 관심이 바뀌어온 과정, 계기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과거-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불과 일년도 안되는 시기까지를 지칭한다- 나는 내 외모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운동이라고는 2004년 3월부터 시작한 헬쓰클럽의 운동말고는 전혀 해본 기억이 없으며, 그럼 농구 축구도 안해봤냐는 의문스러운 당신의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중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시험을 보기 위해서 몇번 해본 기억은 있소 라고 말이다. 그리고 군대에서 오로지 타의에 의해서 억지로 몇번 해봤소 라고 말이다. 이렇듯 나는 운동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나의 몸에 대해서 무신경했다.

 또, 나는 얼굴에, 손에, 몸에 땀이 많이 나는 편 정도가 아니라 매우 심하게 나기 때문에 화장품같은 것을 바르기를 싫어했다. 왜냐면 바르고 나면 번들거리고 갑갑하고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면 어차피 또 땀이 줄줄 흘러 다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럴바에야 아예 바르지 말자는 생각으로 임했고 매번 스킨 로션 바르고 나가라는 엄마의 성화를 들어야했고 억지로 몇번을 발랐다. 그래서 나는 스킨 로션 값이 들지 않았다. 한번 사면 일년은 가니까.

 한가지 더. 나는 머리 스타일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요전까지 스트레이트 파마를 한번 한적은 있다. 염색도 한번 한적 있다. 하지만 그저 머리를 기르고 싶은데 자꾸 옆으로 삐치는 머리카락을 잡아주기 위해 스트레이트 파마를 했던 것이고 그냥 위로 쓸어넘긴 머리만을 하고 다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은 그에 대한 관심도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추가로, 나는 옷을 입는데 있어서도 그냥 집히는 옷 아무거나 입고 다니기 일쑤였다. 한번 입고 괜찮은 옷은 계속 그것만 입고다녀 다른 옷들이 있음에도 난 단벌신사가 되곤 했다. 물론 이런 성향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여러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나는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건 크지 않지만 관심도는 확실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헤어스타일이 어떤 종류가 있나 관심조차 갖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연예인들이 티비에 모습을 비추면 쟤 머리는 어떻고 또 쟤 머리는 어떻고 관심이 간다. 물론 관심이 가는 것으로 그뿐이지만 말이다. 그 관심이 최근 내가 파마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파마의 종류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그냥 가서 추천해달라고 한 뒤 파마를 하긴 했지만 내가 파마를 했다는 것은 대단한 관심의 변화가 행동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은 스킨 로션을 쓰고 에센스를 쓰고 밖에 나갈 땐 썬크림도 바르는 편이다. 다한증 수술을 해서 얼굴과 손에 땀이 줄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냥 맨 얼굴을 내놓고 다니니 겨울에서 허옇게 트기 일쑤였고 세월이 일년, 이년 지나다보니 내 얼굴이 노화가 빠르게 진행된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다지 나이를 많이 먹은 것은 아니지만 그대로 계속 가다가는 안되겠다 싶어 이제 화장품을 바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생긴 여드름을 치료하기 위해 피부과를 들락날락 하게 된 것도 나에게는 참으로 신선한 사실이다.

 옷차림에 있어서도 지금도 물론 마음에 드는 옷 몇가지만 돌려가면서 입는 성향은 바뀌지 않았지만 과거에는 옷사러 가자고 하면 내 옷을 사는데도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쇼핑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리고 가서도 내 옷을 고르는데 있어 소극적이었다. 그냥 골라주고 맘에 들면 사는 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속에 옷을 사고싶은 욕구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냥 사주는 옷만 입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런 옷은 어떨까 저런 옷은 어떨까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큰 차이점이다.

 운동도 3월부터 헬스클럽을 다니며 공을 가지고 하는 구기운동은 아니지만 러닝머신이나 기타 몇개 기구운동을 통해 살을 빼고 있다. 살을 뺀다고 단번에 몸짱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내 몸 관리를 하고 싶었다. 권상우의 몸짱 열풍 때문은 아닌 듯 하고, 제대이후로 많이 쪄버린 살들이 싫어졌다고나 할까. 요즘은 하도 몸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운동 좀 한다고 그들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몸을 방관하고 싶지는 않았다. 운동은 어떤 결정적 계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도 실감했다. 헬스를 하는 중에도 나의 목표의식이 떨어지면 운동을 하는데도 살이 다시 붙기 일쑤였다. 백날 운동해봐야 그런 소극적인 자세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난 목표치를 정하고 운동을 하고 있다.

 지나친 외모에 대한 관심은 성형수술이나 지방제거술 등으로까지 이르러 사고를 초래할 수도 있고, 외모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된 나머지 나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작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정도의 외모에 대한 관심은 쏟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 과정에서 나의 내면에 대한 성찰이 약간 소홀해진 것은 무시할 수 없으나 외면과 내면을 모두 가꿀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지나치게 외모만을 중시하거나 지나치게 내면만을 중시해, 한쪽은 텅텅 머리가 빈 채 이쁘기만 하고, 다른 한쪽은 머리는 꽉 찼는데 영 모양새가 아니다 싶다면 그 어느쪽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과거에는 나는 후자의 유형을 따라가는 편이었다. 외모는 상관없다. 내면을 가꾸자. 하지만 지금은 내면을 가꾸는 것은 지금도 중시하고 있고, 거기에 외면을 가꾸는 것 또한 추가되었을 뿐이다. 사유하는 인간인 동시에 외면에서도 쳐지지는 않는 사람이고자 한다. 타고난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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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철학에는 정답이 없다. 하지만 어떤 철학을 정답을 찾아 끊임없이 헤맨다. 가령 형이상학이 그러하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형이상학은 끊임없이 정답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정답이 찾아지지는 않는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형이상학은 시작되어 왔지만 아직까지도 여기에 정답이란 없다. 반면 어떤 철학은 애초 정답을 찾아 헤매지는 않는다. 형이상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철학의 분과가 그러한 듯 하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하다.

 철학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철학을 하지 않는 이 시대에서 철학이 살아남기 위해 뻗어나간 분야는 '해석'이다. 그리고 이것은 본래 철학의 성격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만 그 부분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 뿐이다.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의학, 과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여타 학문들이 철학으로부터 가치를 쳐 따로 독립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내용을 잃어버렸다. 이런 시대에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철학의 불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은 방법론적인 면에서 다른 학문들이 수행하는 바를 검토하고 질문하고 고민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개인, 가족, 사회, 국가, 세계 등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철학은 의미를 부여하고 질문을 던진다.

 철학이 방법론적으로 쓰이는 경우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형식과 외관을 가지고 들어가는 분과로 논리학, 기호논리학, 분석철학과 해석학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논리학과 기호논리학, 분석철학은 언어철학과도 연계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대상으로 말의 논리성이나 말 속의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분석하는 역할을 해준다. 해석학은 그야말로 해석이다.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부분의 의미에 대해 해석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해석은 정답이 없고 각자가 해석하기에 따라 모두 다르고 그것이 모두 정답이다.

 우리는 어떤 이가 쓴 책을 읽고 그 책에 담긴 내용들을 음미해보면서 나름대로 내용에 대해 해석을 하고 있다. 책을 읽는 과정은 모두 해석의 과정에 다름아니다. 모두가 같은 책을 읽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은 뒤에 드는 생각이나 느낌이 모두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독서라는 과정 속에서 책 속의 주인공이나 설정된 인물들을 통해 각자가 살아왔던 삶을 반추해보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이라는 것은 모두 다를 수 밖에 없기에 같은 내용을 읽고 있다하더라도 해석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만약 그 책이 소설이 아닌 어려운 독일식 관념론 철학책-예를 들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같은-이라면, 해석은 더욱 어렵다. 이런 경우에 발생하는 해석의 차는 앞의 소설의 예와는 다르다. 어려운 책에서는 문장 한줄한줄 읽어나가는 것조차 고역이다. 읽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읽을 뿐이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칸트나 헤겔의 의도를 '오해'할 소지가 생긴다. 저자의 실제 의도와 다르게 읽은 이에 의해서 '잘못된 해석' 즉 오역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해석학을 학문의 경지에 올려놓은 슐라이허마허는 '우리는 오해를 통해 이해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칸트나 헤겔을 오해했지만, 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혹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결국 칸트나 헤겔을 '이해'하게 된다. '오해'는 '이해'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물론 '오해'가 '오해'로서 그친다면 그것은 문제있지만, '이해'로 도달할 수 있다면 제대로 된 해석이 된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해석하는 과정은 그런면에서 정해진 길이 있는 편이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번역서 중에서 오역이 생기는 이유는, 번역자가 직역을 하지 않고 의역을 하기 때문이다. 직역을 하면 출판사에서 번역문을 읽고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수정할 수 있지만, 애초 번역자가 의역을 해버리면 출판사에서 읽어도 문장이 매끄럽기 때문에 수정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비록 매끄럽게 연결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문장은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역'된 것이다. 그래서 번역을 맡길 때 출판사에서는 '최대한 직역해주세요'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를 나의 경험과 연관지어봤다. 단 번역의 대상이 책이 아닌 곡이라는 점이 다르다. 나는 책을 번역해본적은 없다. 물론 중고등학교 시절 수능문제를 풀면서 독해를 해본적은 있지만 말이다. 책은 글로 쓰여져있고, 곡은 콩나물대가리로 그려져있다. 책은 눈으로 읽지만 곡은 귀로 듣는다. 나는 합주를 할 때 드럼악보를 따로 그리는 편이다. 왜냐하면 내가 곡을 외우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머리가 나쁘기 때문은 아니라고 본다- 연주중 지금 어느부분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악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곡을 귀로 듣고 오선지 위에 손으로 그려넣는다. 이 과정을 '곡을 딴다'라고 말한다. 곡을 따서 악보로 그린 후 실제 합주실에서 연주를 할 때 나는 최대한 직역을 한다. 곧 무슨 말인고 하니, 내 임의대로 연주하기 보다는 그 곡이 실제 연주된 그대로를 가급적 연주하려 한다는 것이다. 곡을 직역해 연주한 뒤에 나는 이제 의역을 한다. 내 스타일에 맞게 약간씩 변형을 가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나 뿐 아니라 다른 드러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문제다. 그들 또한 곡을 여러번 듣고 악보를 그리거나 아니면 머리 속에 외우고 있거나 하면서 실제 연주를 하고 그들의 연주 또한 직역과 의역을 섞고 있다.

 해석학은 우리의 일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단지 인기없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한 분과가 아닌 우리의 일상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고, 또한 우리가 시간시간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고 있는 작업이 해석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삶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우리모두는 해석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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