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신문을 보니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판결을 내렸던 이정렬 판사가 이번에는 성매매에 대한 재판을 다뤘는데, 17살짜리 학생이 20대 남성과 성관계를 맺은 것에 대해 해당 남성에 무죄를 선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17살짜리 여학생은 당시 본인의 자발적인 의지로 아무런 대가 없이 남성과 성관계를 맺었고 돈은 오가지 않았지만 남성으로부터 단순 편의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이는 합법적인 남녀간의 관계인가 아니면 원조교제로 봐야하는가?

 해당 남성의 도덕성을 묻지 않는다면 이 재판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는 것 또한 무리이지 싶다. 하지만 무죄를 선고하자니 해당 남성이 괴씸하다. 오로지 법적인 차원이라면 이정렬 판사의 판결은 맞지 싶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성우월주의 혹은 마초도 아니다. 남자는 누구나 조금씩 마초다 라는 명제에서의 '마초'개념이 아닌 흔히 지나친 남성우월주의적 시각을 지칭하는 '마초'로 볼 때 말이다. 17세 여학생은 분명 대가를 받지 않았고 본인의 자발적인 의지로 관계를 맺은 것이니 이건 본인의 책임이지 그 책임을 남성에게만 부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모두 무죄이거나 모두 유죄이거나 해야 옳다. 17세 여학생이 미성년이기 때문에 봐줘야한다는 것은 지나친 보호주의다. 누구로부터도 강제에 의해서, 협박에 의해서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닌 본인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서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면 나는 이런 행동을 해도 미성년자이니까 무죄야 라는 인식이 확산돼 오히려 '막가는 여학생'의 숫자를 늘리는데 기여할 뿐이다. 그녀 역시 잘못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줘야한다. 그런점에서 이번 판결에 무죄를 내린 것은 남성의 파렴치함이 꾀씸하면서도 해당 여학생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선 옳다. 물론 이정렬 판사는 여학생에게 경각심을 주기위해서라기보다는 법률적 해석에 따라 그런 판결을 내렸겠지만 말이다.

  나는 결코 해당 남성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자 모두를 처벌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양자 모두 무죄다. 하지만 이 무죄는 오로지 법률적 무죄일뿐 도덕적 무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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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관에 대한 관심도 변화'는 일부러 뭔가 있어보이게 쓴 제목이다. 사실 이 글의 내용은 나의 외모에 대한 관심이 바뀌어온 과정, 계기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과거-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불과 일년도 안되는 시기까지를 지칭한다- 나는 내 외모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운동이라고는 2004년 3월부터 시작한 헬쓰클럽의 운동말고는 전혀 해본 기억이 없으며, 그럼 농구 축구도 안해봤냐는 의문스러운 당신의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중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시험을 보기 위해서 몇번 해본 기억은 있소 라고 말이다. 그리고 군대에서 오로지 타의에 의해서 억지로 몇번 해봤소 라고 말이다. 이렇듯 나는 운동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나의 몸에 대해서 무신경했다.

 또, 나는 얼굴에, 손에, 몸에 땀이 많이 나는 편 정도가 아니라 매우 심하게 나기 때문에 화장품같은 것을 바르기를 싫어했다. 왜냐면 바르고 나면 번들거리고 갑갑하고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면 어차피 또 땀이 줄줄 흘러 다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럴바에야 아예 바르지 말자는 생각으로 임했고 매번 스킨 로션 바르고 나가라는 엄마의 성화를 들어야했고 억지로 몇번을 발랐다. 그래서 나는 스킨 로션 값이 들지 않았다. 한번 사면 일년은 가니까.

 한가지 더. 나는 머리 스타일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요전까지 스트레이트 파마를 한번 한적은 있다. 염색도 한번 한적 있다. 하지만 그저 머리를 기르고 싶은데 자꾸 옆으로 삐치는 머리카락을 잡아주기 위해 스트레이트 파마를 했던 것이고 그냥 위로 쓸어넘긴 머리만을 하고 다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은 그에 대한 관심도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추가로, 나는 옷을 입는데 있어서도 그냥 집히는 옷 아무거나 입고 다니기 일쑤였다. 한번 입고 괜찮은 옷은 계속 그것만 입고다녀 다른 옷들이 있음에도 난 단벌신사가 되곤 했다. 물론 이런 성향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여러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나는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건 크지 않지만 관심도는 확실히 달라졌다.

 과거에는 헤어스타일이 어떤 종류가 있나 관심조차 갖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연예인들이 티비에 모습을 비추면 쟤 머리는 어떻고 또 쟤 머리는 어떻고 관심이 간다. 물론 관심이 가는 것으로 그뿐이지만 말이다. 그 관심이 최근 내가 파마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파마의 종류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그냥 가서 추천해달라고 한 뒤 파마를 하긴 했지만 내가 파마를 했다는 것은 대단한 관심의 변화가 행동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은 스킨 로션을 쓰고 에센스를 쓰고 밖에 나갈 땐 썬크림도 바르는 편이다. 다한증 수술을 해서 얼굴과 손에 땀이 줄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냥 맨 얼굴을 내놓고 다니니 겨울에서 허옇게 트기 일쑤였고 세월이 일년, 이년 지나다보니 내 얼굴이 노화가 빠르게 진행된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다지 나이를 많이 먹은 것은 아니지만 그대로 계속 가다가는 안되겠다 싶어 이제 화장품을 바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생긴 여드름을 치료하기 위해 피부과를 들락날락 하게 된 것도 나에게는 참으로 신선한 사실이다.

 옷차림에 있어서도 지금도 물론 마음에 드는 옷 몇가지만 돌려가면서 입는 성향은 바뀌지 않았지만 과거에는 옷사러 가자고 하면 내 옷을 사는데도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쇼핑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리고 가서도 내 옷을 고르는데 있어 소극적이었다. 그냥 골라주고 맘에 들면 사는 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속에 옷을 사고싶은 욕구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냥 사주는 옷만 입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런 옷은 어떨까 저런 옷은 어떨까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큰 차이점이다.

 운동도 3월부터 헬스클럽을 다니며 공을 가지고 하는 구기운동은 아니지만 러닝머신이나 기타 몇개 기구운동을 통해 살을 빼고 있다. 살을 뺀다고 단번에 몸짱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내 몸 관리를 하고 싶었다. 권상우의 몸짱 열풍 때문은 아닌 듯 하고, 제대이후로 많이 쪄버린 살들이 싫어졌다고나 할까. 요즘은 하도 몸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운동 좀 한다고 그들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몸을 방관하고 싶지는 않았다. 운동은 어떤 결정적 계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도 실감했다. 헬스를 하는 중에도 나의 목표의식이 떨어지면 운동을 하는데도 살이 다시 붙기 일쑤였다. 백날 운동해봐야 그런 소극적인 자세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난 목표치를 정하고 운동을 하고 있다.

 지나친 외모에 대한 관심은 성형수술이나 지방제거술 등으로까지 이르러 사고를 초래할 수도 있고, 외모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된 나머지 나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작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정도의 외모에 대한 관심은 쏟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 과정에서 나의 내면에 대한 성찰이 약간 소홀해진 것은 무시할 수 없으나 외면과 내면을 모두 가꿀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지나치게 외모만을 중시하거나 지나치게 내면만을 중시해, 한쪽은 텅텅 머리가 빈 채 이쁘기만 하고, 다른 한쪽은 머리는 꽉 찼는데 영 모양새가 아니다 싶다면 그 어느쪽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과거에는 나는 후자의 유형을 따라가는 편이었다. 외모는 상관없다. 내면을 가꾸자. 하지만 지금은 내면을 가꾸는 것은 지금도 중시하고 있고, 거기에 외면을 가꾸는 것 또한 추가되었을 뿐이다. 사유하는 인간인 동시에 외면에서도 쳐지지는 않는 사람이고자 한다. 타고난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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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철학에는 정답이 없다. 하지만 어떤 철학을 정답을 찾아 끊임없이 헤맨다. 가령 형이상학이 그러하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형이상학은 끊임없이 정답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정답이 찾아지지는 않는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형이상학은 시작되어 왔지만 아직까지도 여기에 정답이란 없다. 반면 어떤 철학은 애초 정답을 찾아 헤매지는 않는다. 형이상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철학의 분과가 그러한 듯 하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이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하다.

 철학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철학을 하지 않는 이 시대에서 철학이 살아남기 위해 뻗어나간 분야는 '해석'이다. 그리고 이것은 본래 철학의 성격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만 그 부분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 뿐이다.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의학, 과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여타 학문들이 철학으로부터 가치를 쳐 따로 독립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내용을 잃어버렸다. 이런 시대에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철학의 불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은 방법론적인 면에서 다른 학문들이 수행하는 바를 검토하고 질문하고 고민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개인, 가족, 사회, 국가, 세계 등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철학은 의미를 부여하고 질문을 던진다.

 철학이 방법론적으로 쓰이는 경우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형식과 외관을 가지고 들어가는 분과로 논리학, 기호논리학, 분석철학과 해석학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논리학과 기호논리학, 분석철학은 언어철학과도 연계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대상으로 말의 논리성이나 말 속의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분석하는 역할을 해준다. 해석학은 그야말로 해석이다.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부분의 의미에 대해 해석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해석은 정답이 없고 각자가 해석하기에 따라 모두 다르고 그것이 모두 정답이다.

 우리는 어떤 이가 쓴 책을 읽고 그 책에 담긴 내용들을 음미해보면서 나름대로 내용에 대해 해석을 하고 있다. 책을 읽는 과정은 모두 해석의 과정에 다름아니다. 모두가 같은 책을 읽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은 뒤에 드는 생각이나 느낌이 모두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독서라는 과정 속에서 책 속의 주인공이나 설정된 인물들을 통해 각자가 살아왔던 삶을 반추해보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이라는 것은 모두 다를 수 밖에 없기에 같은 내용을 읽고 있다하더라도 해석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만약 그 책이 소설이 아닌 어려운 독일식 관념론 철학책-예를 들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같은-이라면, 해석은 더욱 어렵다. 이런 경우에 발생하는 해석의 차는 앞의 소설의 예와는 다르다. 어려운 책에서는 문장 한줄한줄 읽어나가는 것조차 고역이다. 읽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읽을 뿐이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칸트나 헤겔의 의도를 '오해'할 소지가 생긴다. 저자의 실제 의도와 다르게 읽은 이에 의해서 '잘못된 해석' 즉 오역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해석학을 학문의 경지에 올려놓은 슐라이허마허는 '우리는 오해를 통해 이해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칸트나 헤겔을 오해했지만, 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혹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결국 칸트나 헤겔을 '이해'하게 된다. '오해'는 '이해'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물론 '오해'가 '오해'로서 그친다면 그것은 문제있지만, '이해'로 도달할 수 있다면 제대로 된 해석이 된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해석하는 과정은 그런면에서 정해진 길이 있는 편이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번역서 중에서 오역이 생기는 이유는, 번역자가 직역을 하지 않고 의역을 하기 때문이다. 직역을 하면 출판사에서 번역문을 읽고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수정할 수 있지만, 애초 번역자가 의역을 해버리면 출판사에서 읽어도 문장이 매끄럽기 때문에 수정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비록 매끄럽게 연결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문장은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역'된 것이다. 그래서 번역을 맡길 때 출판사에서는 '최대한 직역해주세요'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를 나의 경험과 연관지어봤다. 단 번역의 대상이 책이 아닌 곡이라는 점이 다르다. 나는 책을 번역해본적은 없다. 물론 중고등학교 시절 수능문제를 풀면서 독해를 해본적은 있지만 말이다. 책은 글로 쓰여져있고, 곡은 콩나물대가리로 그려져있다. 책은 눈으로 읽지만 곡은 귀로 듣는다. 나는 합주를 할 때 드럼악보를 따로 그리는 편이다. 왜냐하면 내가 곡을 외우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머리가 나쁘기 때문은 아니라고 본다- 연주중 지금 어느부분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악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곡을 귀로 듣고 오선지 위에 손으로 그려넣는다. 이 과정을 '곡을 딴다'라고 말한다. 곡을 따서 악보로 그린 후 실제 합주실에서 연주를 할 때 나는 최대한 직역을 한다. 곧 무슨 말인고 하니, 내 임의대로 연주하기 보다는 그 곡이 실제 연주된 그대로를 가급적 연주하려 한다는 것이다. 곡을 직역해 연주한 뒤에 나는 이제 의역을 한다. 내 스타일에 맞게 약간씩 변형을 가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나 뿐 아니라 다른 드러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문제다. 그들 또한 곡을 여러번 듣고 악보를 그리거나 아니면 머리 속에 외우고 있거나 하면서 실제 연주를 하고 그들의 연주 또한 직역과 의역을 섞고 있다.

 해석학은 우리의 일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단지 인기없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한 분과가 아닌 우리의 일상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고, 또한 우리가 시간시간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고 있는 작업이 해석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삶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우리모두는 해석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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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표현.이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4
빌헬름 딜타이 지음, 이한우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체험, 표현, 이해>는 해석학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의 해석학 일부를 떼어다 번역한 책이다. 단 일부이지만 딜타이의 해석학이 제대로 번역된 것이 이 책이 처음이다. 그동안 딜타이는 그가 사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다뤄지지 않은 잊혀진 철학자였다. <체험, 표현, 이해>의 번역이 딜타이의 철학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딜타이는 정신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철학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데에 온갖 정력을 쏟아부었다. 그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본따 자신의 철학을 '역사이성비판'이라 하였고, 칸트는 물론 헤겔까지도 포괄, 종합하는 철학을 만들어냈다. 칸트가 이성의 한계를 찾는 실험을 감행했고, 헤겔이 처음으로 '역사'개념을 도입해 절대정신의 구현을 꿈꿨다면, 딜타이는 헤겔의 역사를 통해 칸트와 같이 역사이성의 한계를 찾는 실험을 했다.

 해석학은 본래 성서를 해석하는데서부터 출발했고 이후 슐라이어마허를 거치면서 딜타이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해석학의 마지막 철학자 폴 리꾀르는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해석학을 일컬어 '인식론적 해석학'이라고 명명하기에 이른다. 물론 딜타이에서 리꾀르에 이르기까지는 베티와 하이데거, 가다머가 끼어있다.

 딜타이의 해석학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책세상문고의 문고판 시리즈라고는 하지만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다. 그는 앞서 언급했듯 스스로 칸트와 헤겔을 종합했다고 하기때문에 칸트와 헤겔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들이 그대로 딜타이에게 전해진다. 독일 관념철학은 오로지 머리로만 하는 철학이기때문에 언어와 표현이 매우 어렵고, 문단 가운데서 핵심을 찾기도 힘들다. 이 책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에서 혼자 고민하면서 정독해서 읽어야할 이론서다. 그리고 해석학에 대한 아무런 배경없이 읽는다면 절대 이해못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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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32
장 자크 루소 지음, 박호성 옮김 / 책세상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볼테르에 대한 관심이 다른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루소와 로크, 홉스에 대한 관심으로 <사회계약론>을 접하게 되었고, 그중 로크와 홉스의 다음 세대를 살아가며 계몽주의의 전성기를 보낸 루소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장 자크 루소, 그는 사실 18세기 계몽주의자 중에서 사상계의 이단아로 불리운다. 시계공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다. 그래서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고독과 방랑, 소외 속에서 그는 바랑 부인을 만났고 그녀에게서 자신의 지적인 성장의 단초를 제공받았다. 그의 지적 토대가 모두 그녀에게서 나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후에 루소는 <학예론>을 써 명성을 얻었꼬,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계약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고백록> 등의 저서를 냈다. 그의 사상이라는 것이 당시의 계몽주의자들과는 서로 대치되는 면이 많아서 온갖 비난과 핍박을 받아 외로운 지식인 생활을 했다.

 이번에 읽은 <에밀>은 사실 루소의 <에밀>의 완전번역본이 아니다. 완역본은 김중현씨가 번역하고 한실사에서 낸 <에밀>이 따로 있다. 기왕에 읽을 바에야 완역본을 읽는 것이 좋겠지만, 워밍업으로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일부 번역본을 봐도 괜찮다 싶었다.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박호성씨가 해제한 이 책은 루소의 <에밀>의 1부만을 번역한 것이다. 그 역시 책에서 이 책을 읽고 완역본을 읽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자신의 번역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난 이 축약본을 읽고 사실 다 읽고픈 생각이 간절히 든 것은 아니나 읽어야한다는 의무감이 더 든 것은 사실이니 그의 시도가 내게있어선 그다지 실패로 단정하지는 않아도 될 듯 하다.

  <에밀>은 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나, 혹은 교직에 몸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나, 정치학을 하는 자들에게나, 철학을 하는자들에게나 모두 읽어야할 필독서다. 루소의 <에밀>은 교육소설이라고 알려져있지만 또한 정치소설이기도 하다. 그의 사회계약설에 대한 기초적인 부문, 인간과 정치, 문명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이곳에 숨어들어있기 때문이다.

 책세상문고판은 <에밀>의 1부만을 담고 있고, 두껍지 않고 책크기도 작아서 그냥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면서 읽어도 그다지 오래걸리지 않을 듯 싶다. 두꺼운 <에밀>을 읽기가 겁이 난다면 우선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다면 완역본을 손에 쥐기가 쉬워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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