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절판


험난한 과정을 거친 뒤에 사상의 자유라는 '원칙'이 일단 한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지면, 그 원칙은 일반적인 편의의 영역을 지나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보다 수준 높은, 사회적 효용을 갖는 편의의 영역으로 접어들게 된다. 즉 그 원칙은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권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가 보편적인 가치로서 시민의 기본권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역자 머리말 中)-6쪽

만일 우리가 의견의 표현을 이(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권리, 자녀를 낳을 권리)와 동일한 종류의 권리라고 인정할 경우, 이를 근거로 의견의 표현에 대한 무간섭을 요구한다거나 그에 대한 사회의 규제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인정은 지나치게 폭이 넓다. 왜냐하면 다른 두 권리의 제한은 모든 사람의 행동에 영햐을 미치지만, 의견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혁명적이거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의견을 표현하고자 하는 비교적 소수에게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실 자연적인 권리라는 개념에 근거해서는 타당한 논의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은 사회와 그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옹호할 수 없는 이론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제1장)-23쪽

받아들일 수 있는 권위와 받아들일 수 없는 권위는 너무나 분명해서 굳이 그 차이를 구별해야 할 필요조차 없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점을 명료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연장자로부터 산에는 곰이 있다는 것과 또한 마찬가지로 악한 영혼이 있다는 것을 배운 원시인이 곰을 목격함으로써 곧 첫번째 이야기를 확인했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악한 영혼을 만나게 되지 못한다면 천재가 아닌 이상 그는 두 가지 이야기의 차이를 깨닫지 못한다. 도리어 그는 자기 부족사람들이 곰에 대해 옳은 말을 했음으로 악한 영혼에 대해서도 옳게 말했음이 틀림없다고 추론할 것이다. 원시인도 추론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권위에 근거하여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가 있고 혜성은 신의 분노를 나타내는 흉조라고 믿은 중세 사람은, 그 두가지 경우의 증거가 성질을 달리한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제1장)-26쪽

테미스티우스는 발렌스 황제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황제가 자신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기독교들에게 내린 칙령을 폐지하도록 강력이 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용의 이론을 설명했다.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은 정부의 권위가 효력을 미칠 수 없는 영역이다. 권위에 대한 굴종은 위선적인 신앙고백을 초래할 뿐이다. 모든 신념은 허용되어야 하며, 세속 정부는 정교와 이단을 막론하고 공익을 위해 통치해야 한다. 신이 다양한 형태의 숭배를 원한다는 것은 그 스스로 명시하는 바이다. 신에게 다다를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제 3장) -68쪽

참된 교리를 강제하고 이단을 근절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문제에서도 군주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것이 신민의 의무이며, 국가의 목적은 신앙의 수호에 있다는 것이다.(루터의 불관용을 설명하며)(제4장)-95쪽

"다른 그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로이 알고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내게 달라." (밀턴) (제5장)-120쪽

"내가 보기에 가장 제한되지 않은 종교의 자유는 신성한 권리이므로, 그것을 관용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일종의 폭정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관용하는 권력은 또한 관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라보)

"관용이란 불관용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의 모조품이다. 그 둘 모두 독재이다. 하나는 양심의 자유를 억누를 권리가 있다고 자처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부여할 권리가 있다고 자처한다." (토머스 페인 <인간의 권리> 中)

(제5장)-133쪽

만일 신앙을 갖고자 할 경우 이성은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신앙과 이성의 배양은 상반된 결과를 낳는다. 철학자는 현세의 지혜에서 너무나 진보했기 때문에 신의 감화를 받을 자격이 없다.
(1741년 헨리 도드웰 주니어가 옥스퍼드의 한 젊은 유지에게 보내는 편지
<논증에 근거하지 않는 기독교>)(제 6장) -170쪽

만일 기독교가 진리일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기독교도가 되는 것이 이익인데, 왜냐하면 만일 기독교가 거짓으로 판명되더라도 그것을 믿었다는 사실이 해가 되지는 않으며, 만일 진리로 판명될 경우에는 막대한 이득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버틀러) (제6장) -174쪽

종교를 아무런 고찰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멍에를 씌워도 가만히 있는 소와 같다는 진술을 시작으로 성서의 난점과 기독교의 기원, 그리고 교회사의 경로를 고찰해나가면서,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독교를 두려워할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사형 집행자들에 의해 지탱되며 화형의 나무 다발에 둘러싸인 불합리하고도 잔인한 교의이자 그로부터 권력과 부를 얻는 무리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승인받을 수 있는 교의, 그리고 오로지 세계의 작은 일부분에서만 받아들여지는 특수한 교의를, 사람들은 무지몽매하게도 단순하고 보편적인 종교보다 더 선호한다."
(볼테르 <광신주의자의 무덤> 中) (제6장)-176쪽

불가지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신학은 그 한계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과학이 취급하는 세계는 그 한계 안에 있다. 과학은 전적으로 현상만을 다룰 뿐,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을지도 모를 궁극적인 실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할 것이 없다. (제 7장) -238쪽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누군가의 행동의 자유에 대한 간섭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목적은 자기 방위"이며 압제는 오로지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경우에만 정당화된다. (존 스튜어트 밀) (제8장)-259쪽

정당하다라는 말은 그 탁월한 사회적 효용이 이미 경험을 통해 입증되었으며, 당장의 편의에 대한 고려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그런 부류의 규칙이나 원칙에 붙여지는 것이다. 즉 사회적 효용이 유일한 기준이다. 그러므로 사상의 자유가 다른 모든 고려들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사회적 효용을 지니는 원칙임을 입증하지 못하는 한, 정부가 부당하게 사상을 억압하고 있다는 식의 항의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참된 직관을 통해 자유가 사회적으로 가치있다는 노선을 취했다. (제8장)-261쪽

"매번 논쟁을 해봐도 전혀 논박되지 않기 때문에 그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과, 논박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그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의 의견을 반박하고 반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야말로 행동을 위해 우리의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조건이다. 그 외의 다른 어떤 조건 위에서도 인간적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는 옳음에 대한 합리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존 스튜어트 밀)

만약 오류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수호되고 있는 기존의 견해가 참이라 하더라도, 토론을 억압하는 것은 여전히 일반적인 효용에 반한다. 기존의 견해가 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참이라는 합리적인 확실성은 그것이 충분히 검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는 사실에 의해 비로소 확보될 수 있다.
(제 8장)-263-264쪽

순전히 인간의 능력 범위 내에서 확보될 수 있는 정신적, 도덕적 진보의 최고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상과 토론의 완전한 자유이다.
(제 8장)-265쪽

어떤 사안이 예외, 즉 당국의 간섭이 당연시되는 사안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규범에 저촉되는 경우이어야만 한다.
... 중략 ...
만약 내가 현 사회를 규탄하고 아나키즘 이론을 옹호하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을 읽은 어떤 사람이 곧바로 위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내 책이 그 사람을 아나키스트로 만들었고 그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했다는 점이 명백하게 입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내 책 안에 그가 저지른 바로 그 범죄에 대한 직접적인 선동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한 나를 처벌하거나 내 책을 탄압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것이다.
(제 8장)-266-267쪽

(신성모독처벌법에 대해서 언급하며) "만일 그 법이 진정으로 공정하며 오직 신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신성모독행위를 처벌한 것이라면, 비신자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설교 역시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더없이 진지하고 열성적인 종교 형태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지극히 모욕적이다."
(제임스 스티븐 경)(제8장) -269쪽

"자신이 어느 항구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항해사에게는 아무리 순풍이 불어도 소용이 없다."(세네카) 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당위와 사회적 효용을 자신의 머리로 확고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한 그 법의 폐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누군가 폐지를 주장하거나 그 반대로 폐지 불가를 주장한다고 해서 어느 쪽을 무조건 추종한다면 그 당사자에게 사상의 자유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해설, 박홍규) -277쪽

이 책은 나에게 사상의 자유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책 속에서 직접 언급하고 있는 기독교를 둘러싼 사상의 흐름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게 해주었다. 즉 유럽에서는 19세기에 이미 기복적이고, 광신적이며 근본주의에 집착하는 신앙 풍토가 극복되었는데 왜 한국의 기독교는 여전히 그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중략...
실제로 한국의 종교는 오랫동안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근본주의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한 듯 보이지만 그 자체로는 폭력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종교 근본주의만이 아니라 모든 근본주의에 내재된 속성이기도 하다. 근본주의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의 주의나 주장, 믿음에 대한 배타성을 전제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해설, 박홍규) -285-286쪽

한국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의 존속을 주장하는 사람의 주장은 한결같다. 이 법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옹호할 뿐만 아니라 체제 수호를 위한 훌륭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으로 인해 설사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체제 수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불가피한 일이며, 그 해악이 입법 취지의 정당성을 훼손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국가보안법이 기본적으로 '올바르다는 가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이 가진 결정적인 결함은, 이 법이 원래 의도하는 바인 '국가의 안위'를 실현한다는 가설에 근거를 둠으로써 애당초부터 박해의 원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해설, 박홍규) -292쪽

양심의 자유는 '훌륭한 마음'의 자유가 아니고, 있는 그대로 '마음'의 자유이다. 군대에 스스로 간다고 해서 '훌륭한 마음'이 아니고 그냥 '마음'일 뿐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기독교도로서 병역을 거부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해설, 박홍규)-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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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6-02-14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홍규 만세!!!

마늘빵 2006-02-14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강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