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의 논리학 - 말과 글을 단련하는 10가지 논리도구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7월
구판절판


"입구가 좁은 병 속에 팔을 집어넣고 무화과와 호두를 잔뜩 움켜쥔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지 생각해보라. 그 아이는 팔을 다시 빼지 못해서 울게 될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과일을 버려라. 그러면 다시 손을 빼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 너희의 욕망도 이와 같다." (에픽테토스)-29쪽

시계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라서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볼 수 없고, 어떤 지성적 존재가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생명체는 시계보다 더 복잡하고 정교하기 때문에 더욱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없으며, 엄청난 지성을 가진 창조자가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엄청난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 부른다.(페일리의 '지적설계설' 요약)-30쪽

토론에서도 이 방법은 유용하게 쓰인다. 이른바 'yes-but 화법'이다. 토론을 할 때 상대의 주장을 먼저 부정한 다음 그 이유를 조목조목 밝히는 'no-because 화법'은 좋은 화법이 아니다. 우선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데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독선적이고 비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yes-but 화법'은 상대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어느 정도 동조하지만, 그래도 자기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100쪽

연역법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실'을 알려주고, 귀납법은 '개연적으로 일어날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가추법은 '이미 일어났지만 아직 모르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래서 홈스는 가추법을 '거꾸로 추론해 나가기'라고 불렀고, 퍼스는 '귀환법'이라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죽고 A가 사람이면, 'A는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연역법은 알려준다. 그리고 귀납법은 A,B,C,D......가 죽고 그들이 사람이면, '아마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가추법은 다르다. 사람은 모두 죽는데 A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죽었다면 'A는 아마 사람일 것이다'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렇듯 가추법은 이미 일어난 일을 밝힌다. -147쪽

아리스토텥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정의는 어떤 것의 전체다"라고 규정했다. A는 B고 동시에 B는 A일 때, 오직 그럴 때만이 'A는 B다'라는 문장이 정의가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동물이다'는 정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물이다'는 옳지만 '동물은 인간이다'는 그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는 정의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뿐만 아니라, '이성적 동물은 인간이다'가 옳기 때문이다. -181쪽

타당한 논증이란 '형식적으로' 올바른 논증, 곧 추론의 규칙을 따른 논증을 말한다. 따라서 타당한 논증에서는 전제가 참일 때 결론도 참이 된다. 예를 들어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비가 왔다. 그러므로 땅이 젖었다.' 라는 논증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건긍정식'이라고 하는 추론의 규칙을 따랐기 때문이다. -185쪽

건전한 논증이란 '타당하고', '전제들이 모두 참'인 논증을 뜻한다.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도' 올바른 논증이다. 예를 들어 '모든 포유류는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 고래는 포유류다. 그러므로 고래는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라는 논증은 건전하다. 왜냐하면 형식적으로 삼단논법을 따라서 타당할 뿐 아니라, 전제들이 모두 참이기 때문이다. -186쪽

세상의 관심을 끈 것은 논리학의 이런 형식적 발전보다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이룬 논리철학적 발전이었다. <논고>의 본래 이름은 <논리-철학적 논고>다. 철학자 러셀이 추천사를 쓰고 윤리학자 조지 무어가 제목을 붙인 영어판 <논리-철학적 논고>가 1922년에 출간되었을 때 전 세계 철학계는 열광했다. 특히 빈 학파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그랬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 법이다. 이유가 있었다.

<논고>에는 논리학적으로 그리고 또 철학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 있다. 우선 '신은 죽었다'처럼 우리가 경험으로 판단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명제들을 철학에서 간단하게 내쫓아버릴 수 있는 방법이 들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거짓이 아니라 "비의미하다"고 규정했다.(<논고>, 4.003) '의미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당연히 참과 거짓의 대상도 아니다. 그러니 이제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논고>,7)-190쪽

"모든 참된 요소명제들이 주어지면, 세계는 완전히 기술된다. 모든 요소명제들이 주어지고, 그에 덧붙여 그것들 중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주어지면, 세계는 그것에 의해 완전히 기술된다."(<논고>,4.26)-195쪽

"그대가 결혼한다면 그대는 그것을 후회하리라. 그대가 결혼하지 않ㅎ는다면 그대는 역시 그것을 후회하리라. 그대는 결혼하든 안 하든, 아무튼 그대는 둘 다 후회하리라. 세상의 어리석은 짓을 보고 웃어보라. 그대는 그것을 후회하리라. 세상의 어리석은 짓을 보고 울어보라. 그대는 역시 그것을 후회하리라. 한 여인을 믿어보라. 그대는 그것을 후회하리라. 한 여인을 믿지 말아보라. 그대는 역시 그것을 후회하리라. 한 여인을 믿든 안 믿든, 아무튼 그대는 둘 다 후회하리라. 목을 매달아보라. 그대는 그것을 후회하리라. 목을 매달지 말아보라. 그대는 역시 그것을 후회하리라. 목을 매달든 안 매달든, 아무튼 그대는 둘 다 후회하리라. 제군이여,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생 지혜의 진수다." <키에르케고르, <이것이냐 저것이냐> '망아의 연설')-203쪽

"한 인격은 절대로 한 인격이 아니다. 그의 생각은 그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바다.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방금 태어난 다른 자아에게 말하고 있는 바다. 누구나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그가 설득하려는 대상은 바로 비판적 자아다."(찰스 샌더스 퍼스)-205쪽

"오직 존재가 있고, 비존재가 없다고 인식하고 말해야만 한다."(파르메니데스)

"듣는 사람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말하는 사람조차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 그것은 철학이다."(볼테르)-278쪽

칸트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정신에 나타난 대상'이라고 했다. 그는 대상 그 자체를 '물자체'라 하고, 우리의 정신이 나타난 대상을 '현상'이라고 불렀다. 칸트는 물자체는 영원히 알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오직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에게서 얻은 정보를 우리의 정신이 자신의 선천적인 규칙들에 의해 구성한 현상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칸트의 구성주의 인식론의 핵심이다.

중략

아인슈타인도 칸트처럼 우리의 경험 속에 주어지는 것은 '세계의 본성'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인간 의식의 자료'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것들을 '지적으로 구성'해서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지식은 '실재에 대한 지식'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정신이 지어낸 환상'도 아니다. 우리의 정신이 지어낸 개념(또는 이론)과 실험 및 관찰을 통해 얻은 자료들의 대응에서 얻어진 결과물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말을 "물리학 개념들은 우리의 감각과 대응관계를 유지한다."라고 표현했다. -316-317쪽

"우리는 사유에서와 마찬가지로 문장에서도 대응의 개념을 버려야 하며, 문장들이 존재의 세계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다른 문장들과 연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리처드 로티)-325쪽

로티는 실용주의와 패러다임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함께 묶었다. 그 결과 그에게 진리란 단지 '한 사회가 인정하는 유용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참'과 '거짓'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유용한 것'과 '덜 유용한 것'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그는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가 지동설을 믿는 이유는 단지 천문학과 우주여행이 주는 이익이 천동설을 믿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주는 이익보다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논문 <상대주의 : 발견하기와 만들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의 신념에 관한 질문은 그것이 실재에 관한 것이냐 현상에 관한 것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충족하기에 가장 좋은 행동 습관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어떤 신념이 '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밖의 어떤 대안적 신념도 우리가 아는 한 더 나은 행동 습관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328-329쪽

참석자 질문 : 아이들을 가르칠 경우 '저건 달이고 이건 금성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대응이라는 개념을 가정하고 그것을 활용해 가르침으로써 교육도 하고 또 우리들끼리 의사소통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로티의 대답 : "... 아이들 교육에서 동일한 사물에 동일한 이름을 적용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실재와의 대응이라는 관념과 연관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실재에 대해 일관된 언어를 사용하도록 사회적 실행을 견지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 우리는 '다른 사람이 모두 그렇게 부르니까 너도 그렇게 불러라' 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329-330쪽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진리와 윤리는 구분되었다. 진리는 가치중립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 타당한 말이다. 진리가 세계로부터 '발견해내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단지 우리가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라면 그 책임도 전적으로 우리가 져야 한다. 진리는 더 이상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윤리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가벼워진 진리가 져야 할 무거운 짐이다.-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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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29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리학은 어려워요.
'비트겐슈타인'은 그사람의 행동(behavior)이 마음에 들어
열심히 읽어보았지만 그의 지성은 저에게는 일종의 벽이더군요. 아프락사스님




마늘빵 2008-01-29 10:12   좋아요 0 | URL
비트겐슈타인은 제가 아직 제대로 접하지 못한 철학자랍니다. 학부에서도 다룬 적이 없고, 대학원에서는 윤리학이니 더더욱 다룬 적이 없고. 이 책을 통해 맛을 본건데 관심이 많이 가네요. 작년에 꽤 많이 번역된거 같은데 하나씩 골라서 봐야겠습니다.

비로그인 2008-01-29 10:45   좋아요 0 | URL
오.. 그러셨군요.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에서 러셀과 상호 연구결과를 주고 받았지요.
20세기의 천재들일 것입니다.
초기에는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을 인정하고 끌어주는 쪽이었지만
나중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연구결과가 러셀을 추월하는 경지에 이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