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정승일의 격정대화
장하준 외 지음, 이종태 엮음 / 부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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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기본 특징이 바로 저투자, 저성장, 고용 불안이에요. 예컨대 고용이 불안하니까 노동자(소비자)들은 돈이 생겨도 쓸 수가 없습니다. 모아둬야 하니까요. 또 기업들의 투자가 줄어든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의 특징인 적대적 M&A(인수합병) 때문입니다. 기업들은 적대적 M&A로 경영권이 불안해지니까 수익금으로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사주나 사들이는 거죠. 때문에 어느 나라나 신자유주의 체제로 들어가면 성장률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우리도 이제 그런 체제로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장하준)-16쪽

그런 점에서 박세일 의원의 주장, 즉 386 정치인들이 '반시장, 반민주, 반민족' 세력이라는 견해는 옳지 않습니다. 먼저 반시장에 관해 말한다면, 저는 경제 개발에 관한 한 박정희가 성공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그가 시장 주도형이 아닌 국가 주도형 경제 개발 노선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시장주의 덕분에 경제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386 정치인들이 박정희의 경제 개발 방식을 줄곧 공격해 온 점을 감안하면 그분들의 입장은 친시장이지 반시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반민주에 대해 말한다면, 박정희 세력은 경제 개발 과정에서 민주화 세력을 엄청나게 탄압한 반민주 세력이었습니다. 이런 박정희 식 정치 체제를 반대하는 386 정치인들이 반민주 세력일 리는 없겠죠. 셋째로 반민족에 대해 말한다면 386 정치인들이 박정희 시대의 한국 경제를 식민지로 간주했던 인식은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박정희 체제는 경제 문제와 관련 오히려 종속당하지 않기 위해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입장을 표방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정승일)-46-47쪽

<이코노미스트> 유의 시장주의자들은 후진국들도 개방하고 자유화해야 경제 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남미가 좋은 사례입니다. 개방하고 자유화하다가 수출 주도형 공업화에 실패하게 된 거니까요. 자동차 같은 산업의 경우 남미 국가들 중 자력으로 생산해서 수출할 역량을 갖춘 나라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정승일) -66쪽

그에 비해 한국은 1970-1980년대 내내 개방은커녕 엄격한 수입규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니 벤츠나 도요타 자동차가 아무리 좋으면 뭐해요. 우리나라에 들여오지를 못하는데... . 이런 식으로 국내 시장을 보호하면서 수출 주도형 공업화를 추진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국적 기업들을 키워 내는 데 성공한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한 국적 기업들이 경쟁력을 얻고 난 이후엔 마음껏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고요. (정승일) -67쪽

이종태 : 과연 국가 폭력의 시대였군요.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에게만 폭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셈이고요. 그러나 그 폭력이 결국 자본을 통제하는 산업 정책의 한 수단이었고, 결과적으로는 한국 경제를 고도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왠지 씁쓸하군요.

장하준 : 그래서 박정희 체제의 특징을 첫째, 민주주의가 아니었고, 둘째, 자유주의도 아니었다고 하는 겁니다. 박정희가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또 박정희가 자본을 통제해서 자본가들의 사적 재산권을 침해한 것을 보면 '사적 소유권과 시장을 절대시'하는 자유주의자도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고요. 그러니까 박정희가 경제 발전에 성공한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 '민주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아니었기 때문'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제 경우에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자유주의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 나라를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핀란드의 경험을 연구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이고요. -81-82쪽

그 과정에서 재벌들이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에요. 시장주의(자유주의)를 들여오면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1990년대 중반 자유기업원 등을 만들어 미국 공화당 극우파들의 극단적 개인주의나 수입하고, 주주 자본주의 이론 들여오고 그랬거든요.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거죠. 자유주의를 수입해서 '정부는 기업에 간섭하지 말라'고 해놓고 보니, 그 논리대로 하면 그룹의 전체 주식 중 극소수만 보유했을 뿐인데도 그룹 전체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재벌 가문이야말로 대다수 주주들의 소유권을 침해하고 있는 셈이었거든요. 참여연대가 '그렇다면 당신들이 기업 주인이냐?'하고 물었을 때 재벌 가문들이 할 말이 없었던 것도 사실 그 때문입니다. 이런 걸 자승자박이라고 하겠죠. (장하준)-83쪽

각주

한국의 시장(개혁)주의자들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 시장은 가격 변동을 통해 기업, 가계 등 각 경제 주체들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신과 같은 기구이다. 예컨대 정부가 인위적인 개입만 하지 않는다면 시장은 기업이 이윤을 최대화할 수 있는 산업 부문에 적정한 투자를 하게 하고, 소비자들은 자신의 효용을 최대화하는 상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조절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시장의 조절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를 '시장 실패'라고 부른다.-93쪽

신자유주의 혹은 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저투자 현상이 발생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시장이 너무 잘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투자한 기업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기미가 보인다면 바로 그 돈을 빼낼 수 있는 시스템이 바로 신자유주의 혹은 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이니까요. (장하준) -94쪽

각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금융 세계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극단적으로 추구된다. 그 결과 돈이 이 산업에서 저 산업으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신속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금융 자산 계급, 즉 금리 생활자들의 이익이 가장 잘 보장된다. 따라서 이 체제 아래에서는 국제적 금융 자산가 계급, 특히 선진국의 금융 자산가 계급이 가장 큰 이익을 보게 되어 있다. 외환 위기 이후의 IMF 와 김대중 정부의 사장 개혁 과정에서 한국의 자본시장은 완전히 대외적으로 개방되었고 재벌 개혁과 금융 개혁, 노동 개혁, 공기업 민영화 등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이제 한국에도 재벌, 즉 산업 자본을 대체하여 금융 자산가 계급의 경제지배가 본격화되고 있는데, 주주 자본주의가 그러한 현상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변호사, 회계사 등 금융 자산가 계급을 지원하는 직업군의 지배 계층화 역시 금융 자산가 자본주의 현상의 일환이다.
-95쪽

(위에 이어서) 한편 19세기 말 이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수탈한 전 세계의 부를 금융적 방식으로 취득했던 영국의 금리 생활자 혹은 금융 자산가 계급이 유지하고자 했던 자유주의 국제는 1929년 대공황의 원인이 되어 무너졌다. 그와 관련 케인즈는 자유주의 경제학과 경제 정책, 그리고 그 배경으로서의 금융 자산가 자본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또 레닌 역시 제 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와 그 토대인 금융 자산가 계급의 전일적 지배에서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를 보였다.-95쪽

외환 위기 이후 시장주의의 이름으로 재벌에 대한 공격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 재벌 자체가 비시장주의적으로 조직된 기업 집단이니까 시장을 무기로 재벌을 통제하려고 한 거죠. 그러나 그 결과는 외국의 더 큰 자본들이 한국 재벌들을 통제하게 된 겁니다. 그런 만큼 아무리 재벌이 밉다고 해도 시장 근본주의를 용인해서는 안 되겠죠. (장하준)-118쪽

미국에서 주주 자본주의와 소액 주주 운동이 강화된 게 1980년대부터인데, 그 이후 기업의 배당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재미있는 현상 중의 하나는, 처음에는 전문 경영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소액 주주 운동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보면 미국 최고 경영자들의 봉급이 엄청나게 올랐다는 겁니다. 1950년대엔 종업원 평균 임금과 사장의 봉급 차이가 30배 정도였는데, 요즘엔 500배, 계산 방법에 따라서는 1000배까지 나오는 식이죠. 결국 주주들과 경영자들이 짜고 노동자를 벗겨 먹는 식으로 굴러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장하준) -134쪽

각주

로우-로드, 하이-로드는 각각 나름대로의 내용을 가진 기업 및 국민 경제의 발전 전략이다. 전자인 로우-로드에서 기업 및 국민 경제는 저임금, 노동 시장의 수량적 유연화 등을 통해 비숙련 노동자로 하여금 저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고, 국제 시장에서는 저가격으로 승부한다.

그에 반해 하이-로드에서 기업 및 국민 경제는 고용 안정과 노사 신뢰에 기반해 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숙련 기술을 익혀 고부가가치 상품을 생산하기를 기대한다. 일반적으로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 모델은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거두는 가장 신속하고 확실한 방법은 노동자들을 줄여서 인건비를 삭감하는 것이다. 때문에 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은 로우-로드 전략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 한국에 수용되고 있는 노사 관계는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 모델에 해당된다. 그에 반해 노사 화합과 노동자의 숙련 축적을 중시하는 하이-로드는 독일과 일본의 발전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147쪽

현재 정부나 자본은 중국이 값싼 임금으로 우리나라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임금 인상 투쟁이 말이 되느냐는 식인데, 그게 어떤 총제적, 국민경제적 비전을 가지고 이야기되는 것 같지가 않아요. 저기서 '2만 달러 시대로 가자'고 하던 분들이 여기서는 노동 시장 유연성이니 어쩌니 하면서 비정규직 늘리고 중국의 저임금이나 강조하니 말이에요. 국민의 일부만 2만 달러로 가고, 나머지는 2000달러로 가자는 말인지...

경우에 따라서는 선진국을 좇아가자는 게 아니라 중국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 하자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해요. 왜, 재벌과 보수 언론들이 하향 평준화란 단어를 참 좋아하잖습니까? '노동 운동 세력이 강해지면 하향 평준화 현상이 일어난다'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지금 실제로 하향 평준화를 주장하는 것은 재벌과 보수 언론들인 셈이에요. (장하준)-148-149쪽

한국의 경우 일본보다는 약하지만 기업별 노조 체계가 존재했고, 1997년까지 대기업 같은 사업장에서는 종신 고용에 대한 일종의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어요. 최근 영국의 로버 자동차와 한국의 현대 자동차를 비교했는데, 현대차의 로봇 도입률이 훨씬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현대 자동차의 경우 아무리 노사 관계가 대립적이라 할지라도 50-60대까지 근무할 수 있다는 암묵적 약속 같은게 있기 때문에 로봇 도입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이 적었다는거죠. 또 로봇을 도입할 때도 로봇 때문에 일거리를 잃게 된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회사 측에서 전직 훈련을 시킨 뒤 다른 라인에 배치해줬습니다. 영국과는 달랐던 거죠.

그런데 1997년 외환 위기 직후 정부와 재벌, 언론이 합헤해서 '고비용, 저효율 경제 타도하자'며 노동자들을 대폭 해고해버렸잖아요? 당시 현대차도 그랬습니다. 30%인가 잘랐지요. 바로 그때 완전히 믿음이 깨졌다는 거에요. ...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겠어요. 회사 경영 상태가 안 좋아지면 잘릴 수 있으니 근무하는 동안에 파업 많이해서 노후 보장 대책을 마련해 놓자는 식이 된 거죠. (정승일) -151-152쪽

'메이드 인 코리아' 인 삼성 제품은 사지만 '메이드 인 말레이시아' 인 소니 제품은 사지 않아요. 우리나라도 2만 달러 시대로 가려면 이런 일본의 경험에서 미리 배워야 합니다. 물론 일부 사양 산업이 중국으로 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게 대안은 아니라는 거죠. 지금 당장 급하다고 모두 중국으로 몰리면 이후 한국의 산업은 어떻게 되겠어요? 국내 산업을 고부가가치화해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인지도를 높여야 합니다. 싼 가격으로 경쟁할 것이 아니라 '메이드 인 코리아'의 한국 제품이 '메이드 인 차이나'의 일본 제품보다 비싸도 더 잘 팔리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정승일) -157쪽

아주 재미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스웨덴이 의외로 외국 기업들에게 인기를 끄는 나라거든요. '의외로'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있는데, 이 스웨덴이란 국가가, 우리나라 보수층의 논리를 빌면, 기업하기 어렵게 만드는 '빨갱이 나라'란 말입니다. 임금 높죠, 노동조합 강하죠, 행정부는 사회민주당에 장악되어 누진세로 따지면 소득의 60%까지 긁어 갈 정도로 부자들을 괴롭히는 식이니까요. 이런 나라니까 외국 자본이 안 들어갈 것 같죠? 아닙니다. 외국 자본들이 기꺼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것도 악착같이.

그렇다면 외국 자본들이 스웨덴의 시장을 보고 이러는걸까요? 아닙니다. 스웨덴은 시장 규모가 작은 나라에요. 인구가 남한의 4분의 1 정도에 불과하잖아요. 외국 자본이 노리는 것은 스웨덴의 우수한 사회보장 제도와 무료로 제공되는 기술 훈련 시스템, 그에 따라 숙련된 현장 노동자들과 대학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들, 그리고 노동 조합 전국 조직과 경영자 전국 조직 같에 유지되는 산업 평화라는 겁니다. (정승일)
-162-163쪽

따라서 영국에서 우리가 정말 얻어야 할 교훈은, 공기업 민영화를 했더니 단기적으로 큰 수익을 얻으려 할 뿐 설비 투자는 기피하는 경향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더라는 거예요. 하지만 공기업이 뭡니까? 시민들의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서비스, 즉 교통, 에너지, 물, 통신 등을 책임지는 업체 아닙니까? 때문에 공기업 활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공공성이고요. 그런데 이 공기업들이 민영화되어 주주 이익 극대화라는 주주 자본주의 원리에 매몰되면서 공공성이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이 서민층이고요. (장하준) -167쪽

그게 바로 신자유주의의 기본 정신과 통하는 거예요. 단기주의! 그냥 우선 쉬운 것을 하는 거죠 축산업 규제 풀어 주면 고기를 싸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후엔 결국 광우병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공기업인 철도 산업을 민영화한 뒤에 투자를 안하고 수익률 높인건 좋았는데, 10년쯤 지나니까 열차 사고가 빈발하잖아요. 이렇게 단기 수익 올리려고 노조 탄압하고 해외에서 저임금 노동자 수입하다 보면 당장엔 기업이 살아날 것 같은데, 장기적으로 업그레이드를 못하게 됩니다. 결국 망하는 거죠. (장하준) -171쪽

성공회 대학에서 노조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강의에 참석한 분들 중에서도 주주 자본주의의 논리를 지지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하도 답답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죠. '최소한 여러분들은 주주 자본주의적인 논리를 지지하면 안 됩니다. 주주들이 기업을 통해 돈을 신속하게 많이 벌기 위해 가장 먼저 손대는 대상이 노동자들입니다. 어떻게 노동 운동가들이 주주 자본주의를 지지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긍정하시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주주 자본주의적 논리를 통해 재벌과 싸우는 것을 독립 운동처럼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오산입니다. (장하준) -177쪽

그리고 한국 기업과 외국 자본은 인원 배치에 대한 개념 자체에서부터 달라요. 우리나라 백화점이나 큰 빌딩에 가 보면 주차장 입구에 발권기가 있잖아요. 그 옆에 사람이 서 있습니다. 젊은 여성이 서서 뽑아 줘요. 사실 발권기는 그 젊은 여성을 해고하려고 만든 기계인데, 그 기계와 젊은 여성이 함께 서 있는 거에요. 이건 아주 희한한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어요. 후진국의 경우엔 주차장 입구에 사람만 서서 주차권을 나눠주고, 선진국에서는 기계만 설치해 두죠. 기계와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우리나라가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의 어떤 중간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겁니다. 소버린 같은 외국 자본 입장에서 볼 때 이 젊은 여성의 인건비는 낭비거든요. 이런 외국자본들이 들어와서, 특히 우리나라의 서비스 업계 같은 곳은 아직 개방이 덜 되어 있으니까, 인원 정리에 들어가면 실업률이 현재 수준에서 그치지는 않을 겁니다. 삽시간에 10-15%를 넘어갈 수도 있어요. (장하준) -178-179쪽

'국가의 역할' 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까지 왜곡 되어 있는 겁니다. 결국 '정부는 무조건 나쁜 것'이란 인식이 개혁, 보수, 진보 세력 모두에게 깊숙이 박혀 버린 셈이죠. 그 경우 기업들이 마음껏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으면 '모든 게 잘 된다'는 식인데, 그거 정말 무식한 소리예요. 그렇게 시장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준다면 정부라는 게 왜 필요합니까? 그냥 무정부로 살아야죠. (장하준)-187쪽

제 이야기는 한국 경제가 노동자들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시기에 왔다는 겁니다. 한국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개방되면서 엄청난 외부 충격을 감당하고 있는 사회이고, 기업들도 세계적으로 움직이면서 국제 시장 변화에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는 시대가 왔다는거죠.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기왕 이런 시대가 와 버렸으니, 이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려면 복지 국가 시스템을 건설하는 것이 한국 경제의 발전에도 이롭다는 겁니다. 제가 만나본 기업가들 중에서도 생각이 있는 분들은 마음대로 해고를 못하는 것보다 노조가 작업장에서 전환 배치를 저지하는 것에 더 불만이 크더군요. 이른바 노동 경제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수량적인 유연성이 문제가 아니라 기능적 유연성이 문제라는 거죠. ... 사실 한국에서 수량적 유연성은 더 이상 높아질 수도 없습니다. 선진국 중에 국민의 50% 이상이 임시직인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수량적 유연성을 높여 해결하려는 길은 이미 끝났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오히려 비정규직을 줄여야 할 겁니다. (장하준)
-214쪽

각주

스웨덴은 사회적 타협에 이르기 전인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인데다, 1920년대에는 노동자 1인당 파업 일수가 세계 1위였을 정도로 노사 갈등이 치열했다. 그런데 노동자 정당인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1932년 이후 이 나라에 변화가 일어났다. 스웨덴 노총과 경총(SAF;경영자총연합)이 1938년 잘츠요바덴 협약을 통해 각각의 무기인 파업과 직장 폐쇄, 국유화와 소득세 인상 반대를 포기한 것이다. 그와 함께 노총과 경총은 임금 교섭을 노사 양 진영의 중앙 조직인 노총와 경총의 협의에 따라 결정하는 중앙 임금 교섭 방식을 추진하기로 했다. 대신 노총은 점차적으로 국가의 경제, 사회 정책 결정에 참여해 조세, 복지, 의료 등 각종 사회 개역 의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경총은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을 통해 얻어 낸 이윤 부분에 대해서는 일정한 사회적 통제를 감수해야 했다. 임금 억제를 통해 증가된 이윤을 자본이 멋대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 투자를 통해 일자리 창출 등 국민 경제에 이바지하도록 강제당한 것이다.-223-224쪽

(이어서) 결국 스웨덴 노동자들은 중앙 조직인 노총에 임금 인상 등의 결정을 맡겨 버리는 방식으로 '단결'한 셈인데, 이 또한 '단결'임에는 분명하다. 게다가 이런 '단결'은 국익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기업 이윤에 상관없이 동일 노동에는 동일 임금을 지급한다는 스웨덴의 연대임금제이다. 이 정책에 따르면 A사의 한 해 이윤이 2000억 원이고, B사의 이윤은 20억 원이라 해도, 두 회사는 자사에 근무하는 동일 노동 직종의 노동자들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급해야 했다. 이 정책을 통해 스웨덴은 산업 구조 조정을 촉진할 수 있었다. 충분한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회사는 임금을 감당할 수 없어 문을 닫아야 하는 관계로 산업 전체 차원에서 볼 때 '저효율 기업'의 자연스러운 퇴출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대부분 수출 기업인 '고수익 기업'의 임금을 억제함으로써 수출 경쟁력이 높아지는 효과도 거뒀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임금 협상 때마다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유리했다.-223-224쪽

(이어서) 또 노총 입장에서는 연대임금제를 통해 저소득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림으로써 자기 조직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단결 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 모두가 최대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고수익 기업' 노동자들이 '저소득 노동자와의 사회적 연대'를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했던 결과였다. 물론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들의 소득 중 상당 부분이 연금, 가족 수당, 주택 보조금, 질병 수당 등의 형태로 국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임금은 소득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복지 제도는 이 같은 형태로 노동자의 단결에 이바지했던 것이다. 이렇듯 스웨덴 노동 운동은 분명히 국가의 일부다. 심술궂게 이야기하면, 유례없는 '어용 노조'인 셈이다. 노동자들은 복지를 얻은 대신 자주성을 잃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어용 노조'가 역설적으로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223-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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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1-06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심심하셨군요. 밑줄긋기만 주루룩 ㅋㅋ

마늘빵 2008-01-06 20:20   좋아요 0 | URL
-_-a 음... 전에 하다 만 밑줄긋기랑 이번에 읽은 책이랑 머... :)

2008-01-06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6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