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분명 쉬운 책은 아니다. 그 내용이 일단 심각하고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며, 내용을 감싸고 있는 외형 또한 투박하고 딱딱하다. 그래서 친숙하지 않고 낱말과 문장은 마음에 깊숙이 들어오지 않는다. 전형적인 학문을 하는 철학자의 글쓰기이고, 대중을 고려하지 않는 학자적 글쓰기의 표본이다. 일반적인 '철학과현실사'의 책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고 보면 되겠다. '관용'을 알기 위해서 참고할 만한 책은 국내에 몇 권 있다. 일단 이 책 <관용과 열린 사회>가 있고, 하승우씨가 쓴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홍세화씨가 번역한 <왜 똘레랑스인가>, 반 룬의 <관용>,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대략 참고하면 되겠다. 이 책들 중 특히나 이 책은 더욱 투박하다. 쉽게 읽히는 책을 원한다면 책세상 문고에서 나온 얇은 하승우씨의 책을 권한다. 물론 내용은 모두 각기 다르다.

  김용환은 머릿말에서 이런 말을 한다. "불관용의 만연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른 것과 틀린 것을 동일하게 보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이 아니다." 김용환은 우리 사회는 아직 불관용이 만연하고 있고, 이러한 불관용은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생겨난다고 말한다. 우리는 분명 '다른 것'과 '틀린 것'을 머리로 구분할 줄 안다. 머리로 알고 있지만 막상 어떤 상황에 직면하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해버린다. 불관용을 해소하고 관용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둘을 제대로 구분해주고, 머리로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언제나 머리보다는 가슴이 뒤늦다. 앎은 이해로 이뤄지지만, 실천은 '감''동'으로 이뤄지기 때문인가보다. 

  <관용과 열린 사회>는 불관용의 사회를 살고 있는 민주사회의 구성원들이 각기 관용적으로 탄생하기 위한,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책이다. 두껍지는 않지만 범위는 방대하고, 깊이는 깊다. 관용이란 무엇인가, 를 통해서 관용의 개념과 의미를 명확히 하고, 왜 관용이 문제가 되는가,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탐구한다. 3장에서는 관용이 처음 제기되던 중세유럽으로 넘어가 '종교적 관용'을 살펴보고, 당시 관용을 외쳤던 홉스나, 로크, 흄 등을 통해서 관용 개념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알아본다. 이후 4장에서는 '다원주의 사회와 관용'을 연결지으며, 결국 우리가 다른 삶,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관용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나머지 5,6,7장은 한국 사회에서의 관용이 요청되는 영역과 관용적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가, 에 대해 '교육'을 통해서 해결방안을 내놓는다.

  우리는 보통 '관용'이라는 우리말 뒤에 '베풀다'라는 동사를 붙여, "관용을 베푼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관용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관용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어야 한다. '베푼다'라는 말은, "소수의 지배 집단 또는 권력의 소유자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으로 관용을 이해하는 데 있다." 주인이 종에 대해, 높으신 '분'이 낮은 '것'에 대해, 던져주는 아량으로 해석하는데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오히려 관용은 자유와 관련되어 있으며 관용하는 사람과 관용되는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관용은 자유를 확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자유없이는 또한 관용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어떤 혜택의 개념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서로를 향해서 기본적으로 취해야 할 태도에 가깝다.

  관용을 영어로 표기하면 톨러레이션(Toleration) 또는 톨러런스(Tolerance)로 표현할 수 있는데, 관용을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은 이 둘을 굳이 구분하지는 않지만 - 유네스코에서는 톨러런스로 통일해 사용한다 -, 프레스톤 킹은 이 둘을 나눠서 설명한다. 그는 톨러레이션을 톨러런스보다 넓은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전자를 힘에 의한 묵인과 인내로, 후자를 자신과 상충되는 입장을 거부할 능력이 있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힘으로 관철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대상에 대한 반대를 거부의 행위로 표출하지 않고 수용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프레스톤 킹에 있어 '톨러런스'는 힘 있는 강자가 힘 없는 약자에 대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반대의사를 행사하지 않고 상대를 수용함을 의미한다. 프레스톤 킹의 이러한 정의방식이 필요한 순간이 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둘 모두 같게 보아도 상관이 없다.

  김용환은 관용을 정의함에 있어 상대방의 견해를 '용납'함으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이를 프레스톤 킹이 말한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를 일반화해서 넓은 의미의 용납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김용환은 이렇게 명확히 선을 그으려 하는 것은 '용납'이라는 개념이, '복종'이나 '강제적 시인', '묵인' 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관용의 유사한 개념으로부터 관용을 구별하는 일을 곤란하게 만들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용납한다는 말 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반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그 반대표현을 중지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조건은 내가 상대를 반대한다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그 반대표현을 중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용은 '반대'와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라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된다.

  김용환은 이 책 전체에 걸쳐 관용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개인적 차원이거나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관용의 정신이 확대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며 관용이 의사 결정의 한 기준이 되고 또 사회 정책의 한 태도가 되기 위해서는 비판과 논증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고 합리적인 논증이 자신의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유일한 합법적 수단이라는 믿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관용이 크고 작은 일상과 사회 전반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기본 전제 조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에 동의한다.

  갈등을 해소하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여러가지 수반 조건들이 있을테지만 나는 그 중 관용을 제일로 생각한다. 갈등이 생기는 것은 서로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를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이미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다른 것을 다르게 바라보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이 관용이고, 관용은 곧 합리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 된다. 오로지 "합리적인 논증이 자신의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유일한 합법적 수단"이 되면, 누구나 자신의 개인적 생각을 공중 앞에서 표현하기 위해선느 자신의 견해가 합리적인가를 먼저 스스로 살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을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통해서 발견했다. 롤즈가 말하는 '중첩적 합의'와 '공적 이성'이 바로 '개인적인 견해'를 '합리적 논증'으로 바꿔주고 검증해줄 수 있는 장치라고 본다.

   우리가 관용을 이야기하면서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그 한계가 무엇인가,이다. 김용환은 두 가지를 말하는데, 하나는 관용의 역설이라는 논리적 한계요, 또 하나는 자기부정의 어려움인 실천적 한계이다. 우리는 분명 머리로는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이런 경우 머리와 마음이 서로 따로 놀게 되는데, 이런 상황을 '관용의 역설'이라고 표현한다. 이때 생기는 의문점 하나. 나는 관용적이지 못해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관용해야 할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관용적이지 못해서 어쩔 수 없어, 나는 원래 그런걸, 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까지 관용을 행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는 관용적 자세를 스스로 저버렸으므로 타인을 관용으로 대하지 않는 이들까지 관용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한계는 앞서 언급한 '자기 부정의 어려움'인데, 이는 "어디까지 관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행위자의 선택과 결정에 달린 문제이지 원칙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결국 관용을 행하는 것은 행위하는 주체에 달려있고, 그의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실천적 한계'라고 이름한다. 이렇게 관용을 행함에 있어 실천한 한계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대부분 자기이익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이익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불관용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이때 '이익'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처해있는 모든 환경과 조건을 '이익'안에 고려해 넣어야 할 것이다.

  일단 관용을 행사하려면, 관용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칼 포퍼는 '오류가능성 논변'을 통해서 자기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절대 무오류성'을 깨야만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관용을 통해서 어떤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포퍼가 말하는 진리 또한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닐게다. 포퍼는 제 1원칙 "내가 틀릴 수 있고 니가 옳을 수 있다." 제 2원칙 "무슨 일이든 합리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들의 어떤 잘못을 수정할 수 있다." 제 3원칙 "만약 우리가 합리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더 가까이 도달할 수 있다." 는 진리에 도달하는 세 가지 원칙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자기 부정을 전제로 한 관용에 도달하기 위한 길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그럼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김용환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부정을 불가능한 요구라고 믿으면 관용의 범위는 점점 좁아질 뿐만 아니라 불관용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다시 말해 이기적인 인간에게 자기 부정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라고 보는 것은 결국 관용을 공리적이거나 실용적인 가치로 정당화하는 정도에 그치도록 만들며, 이런 경우 관용의 한계는 지극히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된다. 관용의 한계는 처음부터 이미 그 개념 속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적 한계이며, 문제는 그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야 비로소 그 한계를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관용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해서 그것이 갈등을 해소하는 사회의 기본적 자세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알고 정확히 인식하는데서 비로소 민주시민의 기본적 자세로 자리매김한다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관용은 필수적이며, 그것은 사회가 지향해야할 가치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입헌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전제'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관용은 자기부정을 전제로 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개개인이 내가 틀릴 수 있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 는 생각을 가져야만 비로소 그 사회는 관용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전체의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그렇지 않은 문제가 있다. 관용은 구성원들 개개인의 노력에 달려있다. 합리적인 의견이 자유롭게 교환되는 사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이 절실하다.

p.s.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서로의 모든 의견을 '다름'안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광장에 나와있는 많은 견해들엔 '다른 것' 뿐 아니라 '틀린 것'도 속해있다. 우리는 그것들 중 틀린 것을 골라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다른 것에 대해서 다르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틀린 것을 솎아내는 방법은 그것이 과연 사회 구성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를 스스로 생각해봄으로써 걸러내고, 이후에 그것이 과연 나의 이익만을 고려한 이기적인 견해가 아니라 모두에게 수용가능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나아가 합당한 견해인가를 검증해야 할 것이다.

p.s. 2.

관용에 대한 더 깊이있는 논의를 원한다면 김용환 교수의 논문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그는 관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미 여러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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