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한국철학 - 인물들과 함께 떠나는 한국철학 시간여행
황광욱 외 지음 / 동녘 / 2007년 3월
절판


우리나라에 오묘한 진리(현묘지도 玄妙之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 그 가르침을 세우게 된 근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있다. 실질적 내용은 곧 유교, 불교, 도교를 포함하고 있고 뭇 생명과 접촉하여 교화한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가 효도하고 밖에 나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고,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며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근본이며, 모든 나쁜 것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한 것을 받드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
(최치원 中)-42쪽

최익현은 의복이 중화와 오랑캐의 문화를 구분하고 귀함과 천함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기본 형식이라고 본다. 최익현은 조선의 의복제도가 비록 옛 제도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중화문물을 상징하는 것이고 동방 풍속의 자랑거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전통식 복제를 회복할 것과 김홍집과 유길준 등 을미개혁의 주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개화파가 주장하는 '개화'란 중화의 제도를 오랑캐 제도로 바꾸고, 인류를 짐승으로 타락시키는 행위라고 여긴 것이다.
의복과 두발은 단순히 외양을 꾸민다는 의미가 아니다. 특히 효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조선사회에서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가장 큰 불효였다. 또, 복식은 신분질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에 신분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은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일이다. 이에 최익현은 전통 의복과 두발을 반드시 보존하려 노력했고, 반대로 개화파는 이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후진성을 탈피하는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최익현 中)-87쪽

초가 하나 타고 있다고 하자. 초가 타는 것은 '고체로서의 기'가 '기체로서의 기'로 변화(운동)하는 과정에서 불꽃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럴 때 기는 있음(有)에서 없음(無)으로 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서경덕의 생각이다.
... 중략 ...
서경덕은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와 감각을 넘어선 세계를 구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인식할 수 있는 세계다. 우리의 감각 능력과 범위에 드어오지 않는 초음파나 수억 광년 떨어져 있는 행성도 모두 이 세계다. 그것을 서경덕은 '후천(後天)'이라고 부른다. 후천은 기의 운동성이 발휘되어 생극을 통해 전개되는 세계다. 그리고 촛불은 마치 눈앞에서 타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실은 '태허'로 돌아가는 것이다. 태허의 세계는 인식을 넘어서 있는 세계며, '선천(先天)'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후천의 기와 선천의 기가 다른 것이 아니다.
(서경덕 中)-138-139쪽

선악의 문제를 개인의 도덕심으로만 다룰 수는 없다. 사회란 개인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는 각 개인의 차원과는 다른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른 운영원리와 조직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개인에 있어서건 사회에 있어서건 선악은 '때(상황)'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초상집에 문상 갔을 때 슬퍼하는 것은 선이지만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슬퍼하면 악이다. 슬퍼하는 것은 같지만 때에 따라 선악이 갈리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감정이 '때에 맞으면' 선이고 사단이라고 보는 것이 이이의 견해다.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분명히 구분한 것과 대비된다. 이이는 마음에 사단이라는 줄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사단은 칠정의 감정이 때와 절도에 맞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이 中)-167쪽

정제두는 '마음과 이치는 하나다'라는 주관적인 측면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천(天)을 끌어들여 주관과 객관을 동시에 만족시키려 했다. 그는 '성이 곧 리이다. 리는 하늘이 조리있게 통하는 것이니, 바로 하늘의 다른 이름이며, 사람 마음의 본체가 이것이다.'라고 말하여 마음만이 아니라 성도 리라고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정제두가 말하는 '성이 곧 리'는 마음, 리, 성이 분리된 '성즉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을 매개로 '마음과 이치의 일원적 관계'를 주장한 것이다. 이는 주희의 '성즉리'와 다르다. 주희는 마음과 성을 구분했다. 정제두에게 있어 성은 사람 마음속에 들어있는, 하늘이며 명덕이다. 그러므로 성은 본래 마음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은 마음 속에 들어있는, 하늘로부터 받은 리이며 도의 핵심이고 구체적으로는 명덕이다. 따라서 성은 마음속에서 선한 부분 곧 진리를 가리킨다. 정제두는 성이 마음의 본체이고 마음이 성의 작용이라고 하여, 마음의 본체인 성 곧 선이 마음의 작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근거로 삼았다. 따라서 정제두는 주관적인 심체(心體)와 객관적인 성체(性體)를 합일시킴으로써 임정종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논리를 구축했던 것이다.
(정제두 中)-183-184쪽

몇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모범을 보여야 할 훈구 지배층이 타락해 정의와 도덕이 문란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는 '분배의 정의'라는 측면이고, 또 하나는 '사회지도층의 역할'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진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첫째의 측면과 관련해, '분배'는 결국 의의 실현이고 그것은 가진 자의 책임문제기도 하다. 분배와 정의는 결국 의와 이의 문제다. 의와 이의 관계에 관한 유학의 기본적 관점은 '의주이종'이지만 주종이 서로 상쇄되는 관계가 아니다. 의의 실현은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고, 이의 추구는 의를 근본으로 해야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지함이 의와 이의 관계를 상보로 본 것은 민생과 도덕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겨 한 것이다. 의만 강조하면 민생문제를 가볍게 보게 될 것이고, 이에 치중하면 도덕의 타락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지함의 의이상보론(義利相補論)은 지금 사회에서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이지함의 경제관이 뛰어난 것은 산업진흥책을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를 추구하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문제까지 함께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지함 中)-234-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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