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이야기를 해볼까. 나는 온기가 부족한 아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핼이 ‘마법의 콩’을 가진 운명의 친구를 찾아 나섰다면, 나는 태양을 찾고 있었다. 태양같이 환한 미소로 온 주변을 빛으로, 온기로 물들일 친구를.
당신이 핼을 이해한다면 나 역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의 ‘역사’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내가 어떻게 어른이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내 친구와 자지 않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친구는 죽지도 않았다. 나는 미친 듯이 울면서 어른이 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갈라지는 두 사람의 운명을 응시하며,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아주 서서히 깨달아가며 어른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 소설의 낯선 형식에 투덜거렸었다. 난잡하고 겉멋이 들어 보여 소설이라기에는 무슨 일기처럼 느껴지고 완성도가 떨어진다고도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이 이토록 내게 진지하게 다가올 줄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곧 나는 이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소설을 읽으며 내내 깊은 동질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핼의 이야기는 나를 사로잡았다. 어떻게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도 잠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나 자신만의 역사라고 마음에 꾹 담고 있던 깊고 푸른 슬픔을 다른 이의 글에서 발견했을 때, 당신은 잠들 수 있겠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물론 죽은 배리의 모습을 보는 것과 매일 아침 나와 ‘사회적 계층이 다른’ 친구의 학교를 지나 등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 둘 다 순간의 일치를 혼자서 영원하리라 믿었고, 배신당했다고 괴로워했으며,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청소년 소설이라지만 언뜻 청소년 소설 같지 않다.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읽는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물론 어른들이 읽는다고 달라질 것 역시 없다. 하긴. 소설을 읽고 삶이 바뀐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작가든 독자든 오만을 부리는 것이겠지. 하지만 적어도 청소년을 거치고 있거나 거친 사람이라면 소설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역사를 읽고 있을 것이다. 나는 무덤에서 푸닥거리를 하는 대신,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갔다. 핼도 글을 쓰며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어른이다.’라고 자신에게 강하게 되뇌는 아이에서, ‘내가 어른이구나.’라고 어쩐지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진짜 어른이 되어버렸다.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곱씹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내 역사를 되씹으며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었다. 책이 아니라 나의 역사를 읽는 것이었다. 나는 핼과 배리가 아니라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어른이구나. 울진 않았지만, 눈물보다 더 강한 내면의 울음으로, 소설을 읽으며 속으로 계속 흐느꼈다.
울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지독한 사랑을 했고, 사랑은 끝이 났다. 이제는 울 수 있다. 울 수 있어서 웃을 수도 있다. 어른이 되게 만드는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하나이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이기 때문에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영혼이 찢기고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우리는 어른이 된다. 떨어져나간 영혼의 빈 공간에 우리는 타인의 상처를 품을 수 있는 더 큰 사랑을 담는다. 핼. 가엾은 핼. 네가 너의 이야기를 들려줬으니 내 이야기를 이 서평에 썼다. 상처는 공명하며 서로를 강하게 묶는다. 그의 사슬이 내 팔목에 채워진 것을 느낀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성장한다. 방금 내가 소설을 읽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고 했던가. 수정하겠다. 소설로 세상이 바뀐다. 상처를 응시하며, 지지 않으며, 언제까지고 걸어갈 용기가 생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