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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마지막 이야기였던 <회전목마>에서부터 발전한 소설이고 먼저 읽은 <황혼녘 백합의 뼈>의 전편인 이야기. 이렇게 쭉 써놓고 보니, 새삼 온다 리쿠가 제목 하나는 참 잘 뽑는구나 싶다. 나는 제목을 잘 뽑는 사람을 참 부러워하기 때문에, 새삼 이 지칠 줄 모르는 이야기꾼이 더욱 부러워졌다.

 개인적으로 이 일련의 시리즈 중에서는 <황혼녘 백합의 뼈>를 가장 좋아한다. 온다 리쿠가 아름다운 소년 소녀를 사랑한다면, 나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완전에 가까운 글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나마 <황혼녘 백합의 뼈>은 꽤 ‘소설다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는 아무래도 그만한 견고함은 떨어진다. 게다가 이미 <황혼녘 백합의 뼈>를 본 상태였기 때문에 요한이 누구이며 교장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덕분에 미스터리적인 즐거움은 절반정도 댕강 잘려나간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배경이나 인물이 너무 비현실적이 아닌가. 온다 리쿠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계속 생각한 거지만, 이 작가는 학교라든지 아름다운 소년 소녀에 대한 엄청난 환상이 있다. 그리고 이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는 그 환상의 정점에 다다라 있다.

 하지만 가끔 단점이 장점이 되기도 하는 일도 있고, 미치면 미친다는 말도 있는데, 이 소설도 어찌 보면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황당하리만큼 이상적인 배경과 인물들이 도리어 내가 이 책을 읽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이 소설은 눈이 즐거운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보장한다. 온다 리쿠가 묘사하는 학교는 완벽하고(심지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비밀까지도!)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눈부시다. 역자 후기에 이 소설의 인물들이 인기투표에서 상위권을 독점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말 확실히 동감한다. 이를테면 요한은 만화 <몬스터>의 그 요한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이고, 레이지는 어른스러움과 아이다움이 중층적으로 복합된 이미지에, 레이코는 소싯적 하이도(Hyde)의 긴 머리 모습에 정신병자와 같은 불안함을 한 두 방울 첨가한 이미지이다. 도리어 <황혼녘 백합의 뼈>에서 그토록 매력적이던 리세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는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어중간한데, 어쩌면 그것도 기억을 잃고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한 방법인가 슬쩍 의심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흐리멍덩한 계집애(笑)를 요한이나 레이지와 같은 미소년이 좋아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분하다는 것. 이 정도면 확실히 즐겁게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엄밀히 말해 온다 리쿠는 소설가가 아니라고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이야기꾼이다. 스스로 <회전목마>에서 밝혔듯이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예술적으로 완결된 소설’이라는 작품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듯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나도 소설로서는 실격이다, 라는 말은 거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소설로서는 미완이지만 이야기로서는 거침이 없다. 나는 일찌감치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을 접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작정으로, 중반 이후에는 편안히 캐릭터들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캐스팅 놀이에 전념했다. 낯선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즐거운 경험이기도 했다. 조약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에는 눈을 떼지 못하는 작가의 힘에 몇 번이나 감탄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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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제이 2007-08-14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미치면 미친다니 참으로 시원시원한 표현이시네요^^ 멋진 리뷰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