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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모리 오가이 지음, 김영식 옮김 / 리토피아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주제랄까. 그런 것을 고르라면 나는 ‘슬픔’에 대한 주제를 고르겠다. 나는 슬픔이야말로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밑바닥 감정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슬픔은 근원이고 또한 결말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모리 오가이의 <기러기>는 충분히 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기러기>의 슬픔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나는 이 소설을 읽게 된 동기를 먼저 말하고 싶다. 아마 모두가 이미 예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단순히 그를 히라노 게이치로가 문체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작가이기 때문에 골랐다. 그 이외의 어떤 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두 작가간의 문체의 비슷함을 찾는 데에는 실패했다. 어차피 번역된 책을 읽는 것인지라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히라노가 딱딱한 문장들과 영탄적인 문장들을 오고간다면 모리 오가이는 잘 세공된 은제품처럼 섬세하고 절제된 문장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체적인 동질감을 찾아내는 대신, 나는 모리 오가이라는 작가를 꽤나 좋아하게 되었다. 군의관 출신으로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라기에 소설도 그만큼 빡빡하거나 혹은 그 반동으로 엄청 끈적끈적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기러기>는 소박한 문장과 고요한 시선으로 쓴 소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글에 나오는 상황이 정말 있을 법도 하여 깊은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 슬픔이 결코 과장되지도 혹은 왜곡되지도 않았기에 가능한 느낌이었다.
이 소설의 주제는, 맨 처음 말했듯이, 슬픔이다.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우연이 만들어낸 운명이 가져오는 슬픔이다.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사건으로 인하여 틀어지는 인간의 운명이 자아내는 애틋한 안타까움인 것이다. 아름답지만 첩으로 살아가야 하는 오다마나, 창가의 여인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결국 유학을 떠나는 오카다. 그리고 그 둘이 서로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우연한 엇갈림에 의해 무산되어 버린다. 그들은 일이 그렇게 흐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운명은 그렇게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운명의 작은 장난에 의해 갈라진 무정한 인연의 끈.
누군가 사랑은 비극을 그 태생부터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은 비극적인 사랑이라고도 하였다. 서로 잠시 스친 인연으로 평생 가슴에 불에 덴 상처를 가진 사랑만이 우리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사랑이라면, 이 소설의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일 것이다. 또한 그 상처를 만들어낸 무정한 운명의 장난 아래 기러기처럼 도리 없이 당하는 것이 우리네의 삶일 것이다. 그 <어쩔 수 없는> 삶에 대해 이만큼 아름답게 그려낸 작가는 드물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슬픔에 함빡 취하기만 할 뿐 그것을 승화시키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우리 안으로 내밀하게 밀려들어오는 슬픔의 물결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마냥 아쉽다. 그것은 어쩌면, 운명 앞에 무력한 나라는 인간의 안타까움일는지도 모를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