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나기를 위한 시원한 책읽기!
더운 여름 즐거운 일도 없고 우울하기만 해서, 혼자 놀아 보고자 꼼지락거린 결과물. 리스트는 순전히 개인적인 기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쓰다 보니 흥분해서 막 찬양조가 된 부분도 눈에 보이는군요. 뭐. 덕분에 우울한 마음은 많이 가라앉았으니까요.
미청년의 삽질 추리놀이 - 엘러리 퀸 시리즈
장신에 마른 몸, 잘생긴 얼굴과 뛰어난 두뇌를 가진 완벽한 탐정 엘러리 퀸. 그러나 이 완벽한 청년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삽질을 너무 잘 한다는 거다. 내가 맨 처음 접했던 퀸 시리즈인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에서부터 그 많고 많은 시리즈 중 절반 정도는 이 퀸의 삽질놀이가 꼭 들어간다. 가끔 보면 역시나 단서라고는 찾지 못하는 아버지 퀸 경감과 함께 쌍으로 삽질을 하기도 하고, 단서가 안 잡히니까 심증만 있는 여자를 잘생긴 얼굴로 후리기도 하고, 애꿎은 하인 주나에게 이상한 짓(......)도 시키기도 하는 이 남자. 심지어,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삽질하느라 이곳저곳 쑤시고 돌아다니면서 낭비한 돈 땜빵하려고’라니. 귀여워도 너무 귀엽다. 덕분에 탐정 하면 으레 떠오르는 민간인이 아닌듯한 특별한 아우라 역시 초반 몇 장(章)을 제외하면 많이 씻겨나가서 심지어 마지막에 엘러리가 사건을 해결할 때는 ‘쟤가 그래도 탐정이 맞긴 하구나.’라고 새삼 깨닫기까지 한다. 나는 원래 주인공이 잘 생기면 뭐든지 용서하는 독자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도 엘러리 퀸 시리즈는 훌륭한 추리소설이라고 말할 테지만, 사실은 탐정뿐만 아니라 추리 소설 본연의 목적(열심히 머리를 굴리게 하는 것)에도 역시 충실하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 이 얼마나 바람직한 소설인가. 시리즈에서는 국명시리즈(<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 <네덜란드 구두의 비밀>, <로마 모자의 비밀>, <중국 오렌지의 비밀> 등등)를 추천하겠다. 아무리 그래도 엘러리가 던지는 ‘독자에게의 도전장’이 없으면 영 엘러리 시리즈를 읽는 기분이 안 난단 말이지.
사실 범인 찾는 데에는 관심 없구먼 - 필립 말로 시리즈
이쪽도 장신은 장신이다. 엘러리 퀸이 새끈하게 생긴 미남이라면 이쪽은 고독을 씹고 다니는 거친 남자의 얼굴이다. 게다가 이죽거리는 말솜씨는 어찌나 대단한지. 그도 그럴 것이 아무 것도 없이 몸 하나로 살아가는 이 일용직 사내(소설을 읽다보면 탐정만큼 못해먹을 일용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에게 거의 유일한 방어벽이 말 뿐이기 때문이다. 그 말마저 없었다면 아마 그는 견디지도 못할 것처럼 보일 만큼, 그가 사는 바닥을 거칠다. 거친 얼굴로 거친 삶들이 거칠게 부딪치는 거리를 걷는 이 말로의 모습은 두고두고 뭇사람들에게 카피를 당하는데,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중절모에 긴 레인코트를 입고 나오는 만화의 탐정들을 떠올리기 바란다. 우리 세대에서는 험프리 보가트를 기억하라고 하면 안 먹힐 터이니.
고학력의 멋쟁이 엘러리에 비해 말로 쪽은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이다. 깡패나 경찰이나 그다지 다른 점이 없어 보이는 뒷골목을 쑤시며 각종 치정 사건을 주로 해결(?)하러 돌아다니는 탐정인 그는, 솔직히 탐정질보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하는 철학자처럼 보인다. 물론, 수많은 아류들과는 달리 이 남자는 주제에 안 맞는 후까시 떠느라 청승으로 나아가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추악한 인간들과 순수한 인간들이 한대 어우러져 명멸하는 도시를 바라보는 말로의 시선은, 영원한 여자들의 로망 중 무언가가 분명히 깃들어 있다. 그렇다고 어려운 소설로 착각하지는 말 것. 어디까지나 이 소설은 추리소설. ‘역사상 최악의 허술한 추리소설’이라는 악평도 있지만 어쨌든 살인이 있고 범인이 있고 추리도 있다. 다른 소설들처럼 작가와의 머리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단서를 찾을 것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말로의 말빨을 따라가다 보면 자칭타칭 탐정인 말로가 모두가 납득할만한(그리고 대부분 슬퍼할만한) 진실을 내놓으시니, 부디 이 소설에서만큼은 탐정 말씀 잘 듣길 바란다. 이건 본격 추리가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책을 추천하자면 시리즈의 첫 번째인 <빅 슬립>과 말로가 유독 쓸쓸해 보이는 <안녕 내 사랑>을 추천하겠다.
미소년, 미소녀들의 향연 -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황혼녘 백합이 뼈>
가만히 앉아서 온다 리쿠의 매력이란 대체 무엇일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녀의 소설은 솔직히 조금 전형적이고, 현실감도 떨어지고, 재미있긴 한데 엄청난 감동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취향은 전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매일 투덜거리면서도 오늘도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했다. 나오는 인물들이 너무 화려해서!
온다 리쿠는 정말 대놓고 미소년, 미소녀들을 사랑하는 작가다. 그녀가 쓴 소설에는 반드시 그 자체가 예술품에 가까운 아름다운 십대가 등장한다. 게다가 이 소년 소녀들은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내면까지도 강인한 사람도 많아서, 그 옆에 있으면 파도에 휩쓸리듯이 그 매력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아이들이 나오는 이 작가의 소설 중,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황혼녘 백합이 뼈> 두 연작은 가히 최고봉이다. 특히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에는 아예 기숙사에 꽃들을 몰아넣고 잔치를 벌이는데 작정하고 사람 홀리려고 한 게 아니면 이런 소설은 못 쓴다, 라는 것이 내 추측이다. 덕분에 나는 이 소설 읽느라 과외도 늦었다.(......)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누구라는 말을 한 마디씩 하던데, 나도 거기에 편승하자면 나는 레이지가 좋다. 물론 요한의 위험한 천진난만함도 열광하는 성격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먼 곳을 바라보는 슬픈 옆모습은 미소년의 영원한 테제. 아, 이 전형적인 설정에 또 흔들리는 내가 좀 싫긴 하지만, 그냥 고전주의자(?)가 되기로 하고 레이지를 마음껏 좋아하련다. 가여운 레이지. 비슷한 이유로 다음 작품인 <황혼녘 백합이 뼈>의 와타루도 좋아하는데 안타깝게도 마지막에 리세에게 역시 뺏겨(!)버린다. 후. 이럴 때 드는 생각은 ‘리세 이 복 받은 년’뿐이다. 아무리 매력적이라고 해도 그렇지, 왜 그렇게 모든 미소년들을 다 끌고 다니시는겨! 아무튼 리세에 대한 질투심만 잘 다스린다면 행복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 역시 우울할 때는 미소년이 최고지.
삶과 죽음, 그 신(神)급의 강렬함 - <신들의 사회>
로저 젤라즈니는 SF작가도 판타지 작가도 아니다. 그는 신화를 쓰는 작가다. 그가 쓰는 소설에는 줄줄이 신(神)급의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나온다. 그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들에게 사람들은 ‘마초’라고 쉽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는 마초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젤라즈니의 주인공들(절대 다수가 남자)은 강하긴 하되 그 강함은 철저히 인간적인 것에서 온다. 그게 바로 그들의 진짜 매력이다.
제목부터 신들이 줄줄 흘러넘치는 소설의 내용을 짐작케 하는 이 <신들의 사회>은 바로 그런 젤라즈니형 주인공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는 두 인물 중 하나인 샘은, 비록 이야기에서는 붓다라고 일컬어지지만, 사실은 예수나 체 게바라 같은 인물이다. 그가 스스로 밝히듯 그는 프로테스탄트에 가깝다. 무모한 짓임을 알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끊임없이 달려들며 쉬이 세력을 도모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그의 강함은 그의 속성이나 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그 강건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주인공인 야마는 죽음의 신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뛰어난 두뇌와 누구도 피하지 못할 강력한 죽음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를 움직이는 것 역시 그가 사랑하는 여신을 향한, 죽음보다 더 강렬한 사랑이다. <신들의 사회>는 여러 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다층적이고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나는 특히 샘-칼리-야마라는 세 존재의 얽히고설킨 사랑 이야기로 읽어내는 걸 좋아한다. 심지어 후반부에 샘이 야마와 검으로 대련을 하는 부분에 이르러 혼자 마음대로 ‘이건 사랑의 결투다!’라고 상상했을 정도다. 맹목적으로 이상에 돌진하는 샘과 맹목적으로 사랑을 하는 야마. 아아. 아름다운 남자들 같으니라고.
사실 나는 ‘모르고 있었나? 모든 사내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여 왔다는 사실을?’이라고 말하는 야마에게서 사랑의 절망이라는 궁극의 단계를 엿보았던 소설 앞부분에서부터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에 비해 샘은 어딘지 모르게 고집불통에 이해할 수 없는 반항아처럼 느껴져서 도리어 싫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샘의 그 고집 역시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남자들이란 그토록 허풍을 떨면서도 사실은 겁쟁이인 것에 비해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남자 찾기 힘들지. 역시 젤라즈니는 천상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쓰는가보다. 이런 멋쟁이. 근데 왜 그렇게 빨리 죽었어!
형제는 아름답다 -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골치 아픈 세계 명작으로 기억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세 형제가 나오는 훌륭한 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겨우 초등학교 시절에 처음 읽었으니 당연히 어려운 내용은 전혀 이해되지 않았고 다만 (스메르자꼬프는 제외한) 표도르 까라마조프의 세 아들이 너무나 멋졌다는 사실만을 이해했던 탓이다.
누군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끈적끈적한 덜 마른 회색 유화에 비유했었다. 하지만 그 회색의 암담한 풍경 속에서도 미남은 빛나는 법이다. 거칠고 철없는 성격이라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드미트리, 냉정하고 똑똑하지만 섬세한 유리조각처럼 예민한 이반, 천사와 같이 순진하면서도 믿음 속에서 성장하며 점점 굳건해지는 알료샤. 어렸을 때에는 그저 ‘파멸할 것에게는 파멸을’이란 마음으로 점점 미치광이가 되어 가는 이반에게 마음을 주었지만 나중에는 한결같이 모두에게 진실하고 성실한 알료샤의 팬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글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한다면 역시 인물 하나하나가 아니라 그 셋이 모여 벌어지는 비극 그 자체일 것이다. ‘친부 살해’라는 무시무시한 죄의 폭풍 속에서 이 세 사람은 서로를 상처 입히기도 하고 또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면서 각자의 개성을 완성하고 삶을 이해해간다. 그 애증이 뒤섞인 형제애의 섬찟한 아름다움이란. 그루센까나 까쩨리나가 그들 사이에서 정신 나간 여자들처럼 우왕좌왕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형제가 저토록 아름답고 저토록 수렁 속에서부터 천상까지를 오가며 빛나는데 누가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아마 그래서 나도 여태껏 몇 번이나 읽은 이 소설을 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겠지.
좀비여도 괜찮겠니? - 더 좀비즈 시리즈
<레벌루션 No.3>, <플라이 대디 플라이>, <Speed>로 이어지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더 좀비즈 시리즈는 상큼 발랄 발칙한 남자 고등학생들의 유쾌한 모험담이다. 물론 <플라이 대디 플라이>는 그 상큼 발랄 발칙함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 시대 아버지가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책을 본 사람은 인정할 것이다. 그 책에는 주인공보다 더 중요한 조연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바로 우리의 스승, 순신님(.......) 중학교 졸업할 때 야쿠자들이 교문 양 쪽에서 꽃을 들고 서서 기다렸다는 이 잘난 소년은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보는 내내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하는 존재이다. 후반부에 순신이 ‘매의 춤‘(사실 몽골에서 추는 춤은 매의 춤이 아닌 가루다의 춤이라는데)을 추는 부분을 읽으며 진정한 자유를 얻은, 자기 자신을 이겨낸 자의 아름다운 모습이라니. 그저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 자세이다.
물론 더 좀비즈에 순신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통솔자는 통솔자이되 반장보다는 계장 이미지에 가까운 미나가타, 온 세상 여자들의 연인이자 정보원인 아기, 안타깝게 죽지만 언제나 좀비즈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을 히로시, 아이누 족 출신 학자 가야노 시게루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이는 가야노에 누가 뭐래도 좀비즈의 핵심 인물인 덜떨어진 야마시타까지. 모두 개성 넘치는 이 사회의 낙오자들이다. 하지만 소년들은 자신들을 쭉정이 취급하는 세상, 시험 점수 몇 점 더 잘 받았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관리하려는 자들에게 자신들이 낙오자도 쭉정이도 아니며 자신들이 자유롭다는 것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외친다. 그들의 젊음, 그들의 자유를 부러워하는 나는 벌써 판에 박힌 겁쟁이가 되어버린 걸까. 그래도 너희들을 보면서 이렇게 즐거워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한, 언젠가는 나도 이 가슴의 두려움을 몰아 버리고 진짜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겠지?
소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꼭, 언젠가는 나의 ‘매의 춤’을 보여 줄 테니, 기다리라고. 그리고 그 날이 올 때까지 나는 이 어설프지만 아름다운 청춘들을 사랑할 테다.
아름다움과 추악함 사이를 걷는 너는 천재 - <지옥에서의 한 철>
보들레르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나 나나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그래도 역시 보들레르는 우아했다. 천박한 바쿠스의 시종이 되려면 이보다는 더 망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던 차에 만난 것이 랭보였다.
처음에는 오며가며 책들을 들여다보다가 랭보의 전기를 읽게 된 것으로 시작했다. 그 책에서 잘생긴 소년 랭보의 사진을 보았고, 베를렌과의 광기 어린 사랑 이야기도 보았다. 바로 옆에 <지옥에서의 한 철>이 나를 읽어 달라며 보채기 시작했다. 전집에서 막 그 시집이 베를렌과의 격렬한 결별(베를렌이 랭보에게 총을 쏘았다)을 겪으면서 쓴 것이라는 부분을 읽었을 때였다. 책의 부름을 내가 마다했던 적이 있던가? 시집 정도야, 라고 생각하면서 뽑아들었다. 이미 보들레르의 유혹도 무시했던 나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랭보는 괜히 천재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압생트의 녹색 불꽃과 하시시를 들이키면서 썼다고? 이 시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이 시는 환각에서 뽑아 올렸으되 그 환각은 계획적으로 인간의 절망 밑바닥까지 일부러 기어들어가 뽑아 올린 것들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끔찍한 스캔들을 겪으면서, 순수한 악마 소년에서 인간의 감정을 가진 청년으로 자라나던 랭보라는 한 사람이, 매일 밤 고통에 울부짖으며 신에게 제발 이 고통의 잔을 내게서 거둬달라고 울며불며 써내지 않았다면 이런 글이 나왔을 리 없다고 믿는다. 물론 이 시들이 가지는 이미지의 향연은 신이든 악마든 누군가가 그에게 준 인간의 것이 아닌 재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재능을 폭발하게 만든 불안하게 흔들리고 격렬하게 울부짖는 감정들은 결코 신이나 악마의 것이 아니다. 신도 질투하고 악마도 범접할 수 없는 인간만의 눈물이라고, 그 눈물로 시를 써낸 거라고 나는 믿는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지고, 너덜너덜한 옷을 걸친 소년. 한 손에는 연인이 남긴 상처를 지닌 채 매일 밤낮으로 시를 쓴다. 단어들을 나열하고 조합하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면서 소년의 영혼도 변한다. 처음 <서시>에서 ‘내 악마의 수첩의 몇 부분을 발췌해 주마’라고 이죽이던 아이는 마지막 <이별>에서는 지친 어조로 ‘벌써 가을인가!’라고 쓸쓸하게 읊조린다. 네루다는 랭보의 시를 영광스러운 노벨상 시상식에서 인용했지만,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 언제나 쓸쓸해진다. 마음의 고통이 느껴져 때로는 울고 싶기도 하다. 랭보. 너는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열아홉 살. 가장 괴롭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소년은 시로 써서 영원히 이 세상에 기억되게 만들었다. 영원한 소년 곁에서 늙어가는 것은 우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