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나기를 위한 시원한 책읽기!

더운 여름 즐거운 일도 없고 우울하기만 해서, 혼자 놀아 보고자 꼼지락거린 결과물. 리스트는 순전히 개인적인 기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쓰다 보니 흥분해서 막 찬양조가 된 부분도 눈에 보이는군요. 뭐. 덕분에 우울한 마음은 많이 가라앉았으니까요.



미청년의 삽질 추리놀이 - 엘러리 퀸 시리즈


장신에 마른 몸, 잘생긴 얼굴과 뛰어난 두뇌를 가진 완벽한 탐정 엘러리 퀸. 그러나 이 완벽한 청년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삽질을 너무 잘 한다는 거다. 내가 맨 처음 접했던 퀸 시리즈인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에서부터 그 많고 많은 시리즈 중 절반 정도는 이 퀸의 삽질놀이가 꼭 들어간다. 가끔 보면 역시나 단서라고는 찾지 못하는 아버지 퀸 경감과 함께 쌍으로 삽질을 하기도 하고, 단서가 안 잡히니까 심증만 있는 여자를 잘생긴 얼굴로 후리기도 하고, 애꿎은 하인 주나에게 이상한 짓(......)도 시키기도 하는 이 남자. 심지어,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삽질하느라 이곳저곳 쑤시고 돌아다니면서 낭비한 돈 땜빵하려고’라니. 귀여워도 너무 귀엽다. 덕분에 탐정 하면 으레 떠오르는 민간인이 아닌듯한 특별한 아우라 역시 초반 몇 장(章)을 제외하면 많이 씻겨나가서 심지어 마지막에 엘러리가 사건을 해결할 때는 ‘쟤가 그래도 탐정이 맞긴 하구나.’라고 새삼 깨닫기까지 한다. 나는 원래 주인공이 잘 생기면 뭐든지 용서하는 독자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도 엘러리 퀸 시리즈는 훌륭한 추리소설이라고 말할 테지만, 사실은 탐정뿐만 아니라 추리 소설 본연의 목적(열심히 머리를 굴리게 하는 것)에도 역시 충실하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 이 얼마나 바람직한 소설인가. 시리즈에서는 국명시리즈(<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 <네덜란드 구두의 비밀>, <로마 모자의 비밀>, <중국 오렌지의 비밀> 등등)를 추천하겠다. 아무리 그래도 엘러리가 던지는 ‘독자에게의 도전장’이 없으면 영 엘러리 시리즈를 읽는 기분이 안 난단 말이지.



사실 범인 찾는 데에는 관심 없구먼 - 필립 말로 시리즈


이쪽도 장신은 장신이다. 엘러리 퀸이 새끈하게 생긴 미남이라면 이쪽은 고독을 씹고 다니는 거친 남자의 얼굴이다. 게다가 이죽거리는 말솜씨는 어찌나 대단한지. 그도 그럴 것이 아무 것도 없이 몸 하나로 살아가는 이 일용직 사내(소설을 읽다보면 탐정만큼 못해먹을 일용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에게 거의 유일한 방어벽이 말 뿐이기 때문이다. 그 말마저 없었다면 아마 그는 견디지도 못할 것처럼 보일 만큼, 그가 사는 바닥을 거칠다. 거친 얼굴로 거친 삶들이 거칠게 부딪치는 거리를 걷는 이 말로의 모습은 두고두고 뭇사람들에게 카피를 당하는데,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중절모에 긴 레인코트를 입고 나오는 만화의 탐정들을 떠올리기 바란다. 우리 세대에서는 험프리 보가트를 기억하라고 하면 안 먹힐 터이니.

고학력의 멋쟁이 엘러리에 비해 말로 쪽은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이다. 깡패나 경찰이나 그다지 다른 점이 없어 보이는 뒷골목을 쑤시며 각종 치정 사건을 주로 해결(?)하러 돌아다니는 탐정인 그는, 솔직히 탐정질보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하는 철학자처럼 보인다. 물론, 수많은 아류들과는 달리 이 남자는 주제에 안 맞는 후까시 떠느라 청승으로 나아가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추악한 인간들과 순수한 인간들이 한대 어우러져 명멸하는 도시를 바라보는 말로의 시선은, 영원한 여자들의 로망 중 무언가가 분명히 깃들어 있다. 그렇다고 어려운 소설로 착각하지는 말 것. 어디까지나 이 소설은 추리소설. ‘역사상 최악의 허술한 추리소설’이라는 악평도 있지만 어쨌든 살인이 있고 범인이 있고 추리도 있다. 다른 소설들처럼 작가와의 머리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단서를 찾을 것이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말로의 말빨을 따라가다 보면 자칭타칭 탐정인 말로가 모두가 납득할만한(그리고 대부분 슬퍼할만한) 진실을 내놓으시니, 부디 이 소설에서만큼은 탐정 말씀 잘 듣길 바란다. 이건 본격 추리가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책을 추천하자면 시리즈의 첫 번째인 <빅 슬립>과 말로가 유독 쓸쓸해 보이는 <안녕 내 사랑>을 추천하겠다.



미소년, 미소녀들의 향연 -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황혼녘 백합이 뼈>


가만히 앉아서 온다 리쿠의 매력이란 대체 무엇일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녀의 소설은 솔직히 조금 전형적이고, 현실감도 떨어지고, 재미있긴 한데 엄청난 감동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취향은 전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매일 투덜거리면서도 오늘도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했다. 나오는 인물들이 너무 화려해서!

온다 리쿠는 정말 대놓고 미소년, 미소녀들을 사랑하는 작가다. 그녀가 쓴 소설에는 반드시 그 자체가 예술품에 가까운 아름다운 십대가 등장한다. 게다가 이 소년 소녀들은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내면까지도 강인한 사람도 많아서, 그 옆에 있으면 파도에 휩쓸리듯이 그 매력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아이들이 나오는 이 작가의 소설 중,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황혼녘 백합이 뼈> 두 연작은 가히 최고봉이다. 특히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에는 아예 기숙사에 꽃들을 몰아넣고 잔치를 벌이는데 작정하고 사람 홀리려고 한 게 아니면 이런 소설은 못 쓴다, 라는 것이 내 추측이다. 덕분에 나는 이 소설 읽느라 과외도 늦었다.(......)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누구라는 말을 한 마디씩 하던데, 나도 거기에 편승하자면 나는 레이지가 좋다. 물론 요한의 위험한 천진난만함도 열광하는 성격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먼 곳을 바라보는 슬픈 옆모습은 미소년의 영원한 테제. 아, 이 전형적인 설정에 또 흔들리는 내가 좀 싫긴 하지만, 그냥 고전주의자(?)가 되기로 하고 레이지를 마음껏 좋아하련다. 가여운 레이지. 비슷한 이유로 다음 작품인 <황혼녘 백합이 뼈>의 와타루도 좋아하는데 안타깝게도 마지막에 리세에게 역시 뺏겨(!)버린다. 후. 이럴 때 드는 생각은 ‘리세 이 복 받은 년’뿐이다. 아무리 매력적이라고 해도 그렇지, 왜 그렇게 모든 미소년들을 다 끌고 다니시는겨! 아무튼 리세에 대한 질투심만 잘 다스린다면 행복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 역시 우울할 때는 미소년이 최고지.



삶과 죽음, 그 신(神)급의 강렬함 - <신들의 사회>


로저 젤라즈니는 SF작가도 판타지 작가도 아니다. 그는 신화를 쓰는 작가다. 그가 쓰는 소설에는 줄줄이 신(神)급의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나온다. 그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들에게 사람들은 ‘마초’라고 쉽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는 마초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젤라즈니의 주인공들(절대 다수가 남자)은 강하긴 하되 그 강함은 철저히 인간적인 것에서 온다. 그게 바로 그들의 진짜 매력이다.

제목부터 신들이 줄줄 흘러넘치는 소설의 내용을 짐작케 하는 이 <신들의 사회>은 바로 그런 젤라즈니형 주인공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는 두 인물 중 하나인 샘은, 비록 이야기에서는 붓다라고 일컬어지지만, 사실은 예수나 체 게바라 같은 인물이다. 그가 스스로 밝히듯 그는 프로테스탄트에 가깝다. 무모한 짓임을 알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끊임없이 달려들며 쉬이 세력을 도모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그의 강함은 그의 속성이나 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그 강건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주인공인 야마는 죽음의 신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뛰어난 두뇌와 누구도 피하지 못할 강력한 죽음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를 움직이는 것 역시 그가 사랑하는 여신을 향한, 죽음보다 더 강렬한 사랑이다. <신들의 사회>는 여러 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다층적이고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나는 특히 샘-칼리-야마라는 세 존재의 얽히고설킨 사랑 이야기로 읽어내는 걸 좋아한다. 심지어 후반부에 샘이 야마와 검으로 대련을 하는 부분에 이르러 혼자 마음대로 ‘이건 사랑의 결투다!’라고 상상했을 정도다. 맹목적으로 이상에 돌진하는 샘과 맹목적으로 사랑을 하는 야마. 아아. 아름다운 남자들 같으니라고.

사실 나는 ‘모르고 있었나? 모든 사내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여 왔다는 사실을?’이라고 말하는 야마에게서 사랑의 절망이라는 궁극의 단계를 엿보았던 소설 앞부분에서부터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에 비해 샘은 어딘지 모르게 고집불통에 이해할 수 없는 반항아처럼 느껴져서 도리어 싫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샘의 그 고집 역시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남자들이란 그토록 허풍을 떨면서도 사실은 겁쟁이인 것에 비해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남자 찾기 힘들지. 역시 젤라즈니는 천상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쓰는가보다. 이런 멋쟁이. 근데 왜 그렇게 빨리 죽었어!





형제는 아름답다 -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골치 아픈 세계 명작으로 기억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세 형제가 나오는 훌륭한 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겨우 초등학교 시절에 처음 읽었으니 당연히 어려운 내용은 전혀 이해되지 않았고 다만 (스메르자꼬프는 제외한) 표도르 까라마조프의 세 아들이 너무나 멋졌다는 사실만을 이해했던 탓이다.

누군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끈적끈적한 덜 마른 회색 유화에 비유했었다. 하지만 그 회색의 암담한 풍경 속에서도 미남은 빛나는 법이다. 거칠고 철없는 성격이라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드미트리, 냉정하고 똑똑하지만 섬세한 유리조각처럼 예민한 이반, 천사와 같이 순진하면서도 믿음 속에서 성장하며 점점 굳건해지는 알료샤. 어렸을 때에는 그저 ‘파멸할 것에게는 파멸을’이란 마음으로 점점 미치광이가 되어 가는 이반에게 마음을 주었지만 나중에는 한결같이 모두에게 진실하고 성실한 알료샤의 팬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글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한다면 역시 인물 하나하나가 아니라 그 셋이 모여 벌어지는 비극 그 자체일 것이다. ‘친부 살해’라는 무시무시한 죄의 폭풍 속에서 이 세 사람은 서로를 상처 입히기도 하고 또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면서 각자의 개성을 완성하고 삶을 이해해간다. 그 애증이 뒤섞인 형제애의 섬찟한 아름다움이란. 그루센까나 까쩨리나가 그들 사이에서 정신 나간 여자들처럼 우왕좌왕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형제가 저토록 아름답고 저토록 수렁 속에서부터 천상까지를 오가며 빛나는데 누가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아마 그래서 나도 여태껏 몇 번이나 읽은 이 소설을 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겠지.



좀비여도 괜찮겠니? - 더 좀비즈 시리즈


<레벌루션 No.3>, <플라이 대디 플라이>, <Speed>로 이어지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더 좀비즈 시리즈는 상큼 발랄 발칙한 남자 고등학생들의 유쾌한 모험담이다. 물론 <플라이 대디 플라이>는 그 상큼 발랄 발칙함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 시대 아버지가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책을 본 사람은 인정할 것이다. 그 책에는 주인공보다 더 중요한 조연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바로 우리의 스승, 순신님(.......) 중학교 졸업할 때 야쿠자들이 교문 양 쪽에서 꽃을 들고 서서 기다렸다는 이 잘난 소년은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보는 내내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하는 존재이다. 후반부에 순신이 ‘매의 춤‘(사실 몽골에서 추는 춤은 매의 춤이 아닌 가루다의 춤이라는데)을 추는 부분을 읽으며 진정한 자유를 얻은, 자기 자신을 이겨낸 자의 아름다운 모습이라니. 그저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 자세이다.

물론 더 좀비즈에 순신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통솔자는 통솔자이되 반장보다는 계장 이미지에 가까운 미나가타, 온 세상 여자들의 연인이자 정보원인 아기, 안타깝게 죽지만 언제나 좀비즈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을 히로시, 아이누 족 출신 학자 가야노 시게루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이는 가야노에 누가 뭐래도 좀비즈의 핵심 인물인 덜떨어진 야마시타까지. 모두 개성 넘치는 이 사회의 낙오자들이다. 하지만 소년들은 자신들을 쭉정이 취급하는 세상, 시험 점수 몇 점 더 잘 받았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관리하려는 자들에게 자신들이 낙오자도 쭉정이도 아니며 자신들이 자유롭다는 것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외친다. 그들의 젊음, 그들의 자유를 부러워하는 나는 벌써 판에 박힌 겁쟁이가 되어버린 걸까. 그래도 너희들을 보면서 이렇게 즐거워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한, 언젠가는 나도 이 가슴의 두려움을 몰아 버리고 진짜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겠지?

소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꼭, 언젠가는 나의 ‘매의 춤’을 보여 줄 테니, 기다리라고. 그리고 그 날이 올 때까지 나는 이 어설프지만 아름다운 청춘들을 사랑할 테다.



아름다움과 추악함 사이를 걷는 너는 천재 - <지옥에서의 한 철>


보들레르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나 나나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그래도 역시 보들레르는 우아했다. 천박한 바쿠스의 시종이 되려면 이보다는 더 망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던 차에 만난 것이 랭보였다.

처음에는 오며가며 책들을 들여다보다가 랭보의 전기를 읽게 된 것으로 시작했다. 그 책에서 잘생긴 소년 랭보의 사진을 보았고, 베를렌과의 광기 어린 사랑 이야기도 보았다. 바로 옆에 <지옥에서의 한 철>이 나를 읽어 달라며 보채기 시작했다. 전집에서 막 그 시집이 베를렌과의 격렬한 결별(베를렌이 랭보에게 총을 쏘았다)을 겪으면서 쓴 것이라는 부분을 읽었을 때였다. 책의 부름을 내가 마다했던 적이 있던가? 시집 정도야, 라고 생각하면서 뽑아들었다. 이미 보들레르의 유혹도 무시했던 나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랭보는 괜히 천재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압생트의 녹색 불꽃과 하시시를 들이키면서 썼다고? 이 시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이 시는 환각에서 뽑아 올렸으되 그 환각은 계획적으로 인간의 절망 밑바닥까지 일부러 기어들어가 뽑아 올린 것들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끔찍한 스캔들을 겪으면서, 순수한 악마 소년에서 인간의 감정을 가진 청년으로 자라나던 랭보라는 한 사람이, 매일 밤 고통에 울부짖으며 신에게 제발 이 고통의 잔을 내게서 거둬달라고 울며불며 써내지 않았다면 이런 글이 나왔을 리 없다고 믿는다. 물론 이 시들이 가지는 이미지의 향연은 신이든 악마든 누군가가 그에게 준 인간의 것이 아닌 재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재능을 폭발하게 만든 불안하게 흔들리고 격렬하게 울부짖는 감정들은 결코 신이나 악마의 것이 아니다. 신도 질투하고 악마도 범접할 수 없는 인간만의 눈물이라고, 그 눈물로 시를 써낸 거라고 나는 믿는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지고, 너덜너덜한 옷을 걸친 소년. 한 손에는 연인이 남긴 상처를 지닌 채 매일 밤낮으로 시를 쓴다. 단어들을 나열하고 조합하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면서 소년의 영혼도 변한다. 처음 <서시>에서 ‘내 악마의 수첩의 몇 부분을 발췌해 주마’라고 이죽이던 아이는 마지막 <이별>에서는 지친 어조로 ‘벌써 가을인가!’라고 쓸쓸하게 읊조린다. 네루다는 랭보의 시를 영광스러운 노벨상 시상식에서 인용했지만,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 언제나 쓸쓸해진다. 마음의 고통이 느껴져 때로는 울고 싶기도 하다. 랭보. 너는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열아홉 살. 가장 괴롭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소년은 시로 써서 영원히 이 세상에 기억되게 만들었다. 영원한 소년 곁에서 늙어가는 것은 우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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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요즘 무슨 음악 듣고 계세요?
Hyde - Roentgen - Special Package For Korea
하이도 (Hyde)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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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L'Arc en ciel에서 벗어나 솔로 가수로서 낸 Hyde의 앨범은 그가 어떤 음악관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L'Arc en ciel 시절부터 주로 가사를 통해 표현되던 Hyde의 '심미주의'가 이 앨범에서 오롯이 그의 것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음악관에 따라 만들어진 Hyde의 솔로 앨범 Roentgen. 이 앨범은 노래 하나하나를 모아놓았다기보다는 각각의 수록곡이 마치 길고 아름다운 서사시의 작은 부분인 것처럼 들린다. 그만큼 분명하고 일관된 분위기로 이 앨범은 전개된다.


1번 트랙인 Unexpected는 그 긴 서사시의 프롤로그 역할을 한다. 끝도 없을 듯 반복되는 가사는 그 단조로움 속에서 오히려 무언가 암시를 주는 듯 하다. 귓가에 들릴 듯 말 듯한 비밀스러움이 특별히 강조되는 부분 없이 흘러가는 사운드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는 듯 해 듣는 이의 은근한 호기심을 끄는 곡이다.


바로 이어지는 White song은 이러한 은근함과 신비로움을 그대로 살려 아름다운 겨울밤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속삭이는 듯 신미스럽게 시작하는 곡은 중반에 들어오면서 탁 트인 듯, 넓은 스케일로 전환된다. 얼어붙었지만 차갑지 않고, 밤이지만 결코 어둡지 않은, 오로라가 내린 북극 밤을 연상시킨다. Unexpected의 예상치 못한 만남이 풍요로운 눈의 흰 빛 속에서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3번 트랙인 Evergreen에서는 왠지 모를 슬픔이 감지된다. Hyde의 저음과 어쿠스틱 기타에 실려 한없이 투명하고 순수한 노래지만, 오히려 그 비현실적인 순수와 망설이듯 절제된 멜로디에서 이유 모를 거리감이 느껴진다. 가장 아름다울 때 이별이 보이는 슬픔, 그 안타까움을 애써 숨기는 듯해서 괜히 눈물이 쏟아지는 노래다.


이어지는 Oasis에서는 분위기가 반전된다. 순식간에 배경은 뜨겁고 목마른 사막으로 바뀌어 있다. 결국 사랑을 잃기라도 한 것일까? 끝도 없이 메마른 열기 속에서 죽음의 신과 춤추는 이의 얼굴은 슬픔보다는 허탈한 절망이 스며들어 있을 듯하다.


5번 트랙인 A drop of colour에서는 이러한 절망이 그리움으로 바뀐 듯 보인다. 당신이 없는 이 시끄러운 도시 속에서 자신에게 끝없이 자문하고, 이 세상 많은 풍경들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모습에서는 안타까움이 엿보인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대로 안고 잠에 든 모습을 그렸을법한 Shallow sleep. 색소폰과 Hyde의 중저음이 돋보였던 A drop of colour와 달리 Shallow sleep은 나른하고 옅은 보컬, 세련된 팝 사운드로 달콤한 꿈속에서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다음 노래인 7번 트랙 New days down은 Shallow sleep의 나른함을 깨고 들어온다. 묵직한 사운드는 냉소적이고 공격적으로까지 들린다.


그러나 이어지는 Angel's tale은 다시 조용한 회상으로 빠진다. 과거를 돌이키게 하는 조용한 멜로디와 저음의 보컬은 '1년 전 겨울'이라는 단어와 애틋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드디어 이 긴 이야기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The cape of storm에서는 빠르고 드라마틱한 곡 전개가 눈에 띈다. 그리고 가장 고통스럽기도 하다. 이제 폭풍 속에서 헤매며 Angel's tale의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이라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연민이 느껴지기도 하고, 왠지 내 이야기 같이 느껴지기도 하는 곡이다.


그러나 이대로 끝은 아니다. 나는 이 앨범에서 가장 중요한 곡은 마지막 곡인 Srcret letters라고 생각한다. Hyde는 이 앨범의 에필로그에 해당되는 이 곡에서 자신이 진짜 심미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했다.

Secret letters에서는 바라보는 대상이 이제껏 그토록 그리워했던 '당신'으로 바뀐다. Evergreen의 그 5월의 장소에 그대로 남겨져 먼 창밖만 바라보는 당신.

과연 사랑하는 이의 아픔은 모르는 것일까?

아름다우면서도 이국적인 곡은 아름답게만 전개된다. 그러나 작은 흥얼거림 같은 후렴구에서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I remember, remember you.

I remember, still close to you.'


 가슴 한 켠을 아련하게 하는 흥얼거림이다. Hyde는 암담한 현실에서 결코 이야기를 끝맺지 않았다. 그는 애틋한 희망과, 그리움과, 아름다움을 조용히 남겨놓으면서 그는 이 앨범을 끝맺었다.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랑을 그려넣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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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텍스트에서 영상으로 만나다!!
플라이 대디 (2disc)
최종태 감독, 이문식 외 출연 / 엔터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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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로 받은 2000원 할인권으로 영화 <플라이 대디>를 보러 갔다. 사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원작, 그리고 가네시로 카즈키가 직접 시나리오를 쓴 일본판 영화는 내게 선명한 인상을 남겼기에 한국판 영화도 한번쯤은 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적잖게 실망하고야 말았다. 글쎄, 차라리 원작을 보지 않았더라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조금 웃기고 좀 감동적이고 꽤 어설픈, 그래서 2000원 할인권에 조조로 2500원짜리 표를 끊어 보기에 딱 적당한 그런 영화 말이다. 별로 재미는 없었지만 그럭저럭 했어, 라고 지금 이 후기에 적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원작을 읽었다. 일본판 영화는 원작소설과 거의 똑같으니 같이 묶어서 치겠다. 그리고 그 원작과 비교했을 때, 영화는 좀 한심스럽기까지 한다.

작년에 배웠던 현대문학 강의 시간에 <말아톤>의 시나리오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말아톤의 원래 시나리오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말아톤의 감독과 시나리오는 우리 학교 출신이다) 본래 그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초원이의 엄마가 아니라 코치였다고 한다. 나름의 상처를 입고 있던 코치가 초원이와 교감해가는 그런 식으로. 하지만 아마도(사정은 그 선생님 역시 모르실테니) ‘흥행’상의 문제 때문에 주인공이 코치에서 어머니로, 주제가 소통에서 감동적인 모성애로 바뀌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시며 아쉬워하셨다. 참고로 문학적인 아름다움은 처음 시나리오가 훨씬 나았다고 평하셨다.

그리고 <플라이 대디>. 이것도 내가 보기에는 <말아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원작소설을 보면 알겠지만, 그 소설의 주제는 단순히 부성애로 한정지을 수는 없다. 물론 부성애는 강한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그 부성애를 가지고 그려내는 이야기는 단순히 아버지의 사랑이 아닌 그 너머의 것, 즉 자유이다. 자신의 틀 안에서 살아가던 나약한 아버지가 부성애라는 힘을 통해 스스로의 세계를 깨고 자유롭게, ‘매의 춤’을 추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주제인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주인공 승석(원작에서는 순신)이 겉은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상처 입은 어린아이라는 것도 우스운 설정이다. 승석의 자리는 자유로운 사람의 그곳에 있어야 한다. 원작에서 순신은 결전의 날 바로 전날 가진 즐거운 휴식에서 내가 그토록 멋있다고 칭찬하는 ‘매의 춤’을 춘다. 순신은 단순히 부모의 이혼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아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해진 차별과 부당함을 신체적 정신적 강인함으로 모두 끊어버리고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진정한 ‘스승’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승석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이 한없이 기분이 나빴다. 결코 부성애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나는 매일 나오고 또 나오는 그런 흔한 감동스토리보다는 진정 우리의 안정된 세계를 깨부수고 날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런 영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버지 장가필은 결국 다시 안정된 세계로 돌아간다. 나는 그 승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심스럽다. 그는 자신의 강함으로 남들을-특히 가족과, 어린 승석- 지켜줄 수 있다고 자기위안을 얻었을 뿐이다. 그가 정말 자유로워졌을까? 그는 그냥 주먹이 세진 것뿐이다.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날아오르진 못했다. 단지 자신의 세계를 더욱 강하게 지킬 수 있게 되었을 뿐이지.

또한 승석(순신)의 친구들의 모습도 불만이었다. 원작에서 순신의 친구들은, 비록 <플라이 대디 플라이>에서는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하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재일교포인 순신과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차별을 안고 살아간다. 또한 그들은 꼴통 고등학교의 꼴통 학생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자유롭다. 엄숙한 척 차별을 하는 세상에 유쾌한 반란을 벌이는 전사들이란 말이다. 하지만 <플라이 대디>에서는 그냥 조금 착하고 발랄한 고등학생으로 나왔다. 개인적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엉망이 되고, 그러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야마시타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더 좀비즈' 시리즈의 마지막 <Speed>에서 야마시타를 가리켜 ‘이 녀석이 모든 불행을 껴안았기 때문에 지구에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감격했던지.)

이러한 이유로, 내 생각에 <플라이 대디>에서 아버지 장가필은 날지 못했다. 그는 그냥 주저앉아버리곤 ‘자신의 반경 1m’를 단단히 했을 뿐이다. 마지막 딸의 원수의 목을 계속 조르지 않고, ‘진정 자유로워지기 위해’, ‘자신의 복수심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를 놓아주었던 아버지는 없다. 그저 자신이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품 안에 지킬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을 뿐. 난 원작의 아버지가 한없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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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우더의 비밀 - 시그마 북스 006 시그마 북스 6
엘러리 퀸 지음, 이제중 옮김 / 시공사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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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로 엘러리 퀸을 만났고, 작년에 <황태자 인형의 모험>이라는 짧은 단편과 <Y의 비극>을 접했으나 진짜 엘러리(작가가 아닌 캐릭터)는 만나지 못했음을 이 책을 읽으며 새로이 깨달았다. 그리고 곧 ‘대체 그동안 나는 무얼 읽은 거냐.’라고 머리 쥐어뜯으며 엘러리 팬클럽에 확실히 가입 신고서 날렸다.

 라이벌이라고 할 만한 번즈가 고상하고 우러러볼 타입의 탐정이라면, 똑같이 머리가 좋아도 이 엘러리는 굉장히 친근하다. 특히 아버지 퀸 경감과 말로 치고 박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살인사건이라는 엄청난 배경 속에서도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소설에서는 주로 아버지 쪽이 풀이 죽어 있고 엘러리는 자신만만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데,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경감이 질투하는 듯 몇 마디 던지는 게 어찌나 우스운지! 부자가 참 다정하기도 하다.

 물론 사랑스러운 가족애 때문에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그것만한 난센스는 없을 터. 무엇보다도 추리소설에는 추리가 1순위 아닌가. 하지만 조잡한 추리는 작가 엘러리 퀸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작년에 읽은 <Y의 비극>에서 이미 확실히 확인해두었으므로 믿고 소설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사실 작가가 주구장창 주장하는 ‘페어플레이 정신’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무책임하고 수동적인 독자이기 때문에, 그저 생각치도 못했던 범인이 지목되는 것만으로도 ‘좋은 추리소설이로군.’이라며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나의 낮은 커트라인에서 보자면 이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은 수석입학으로 들어온 추리소설이 된다. 뭐, 나처럼 무책임한 독자가 아니라 잔뜩 날이 선 독자들도 대체로 엘러리 퀸의 페어플레이 정신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후회는 없었다는 장렬한 전사통보를 날리는 걸 보면 높은 기준에도 들어맞는 잘 만든 작품인 건 분명한 것 같다.

 게다가 욕심도 많은 작가는 이 즐거운 추리 한 판에 본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회적인 메시지도 넣으려고 한 모양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좀 실패인 것 같다. 오히려 나는 그 시도가 실패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 잘생긴 청년 탐정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사회의 어둠을 응시하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단 말이지.

 반 다인의 어깨에 힘 가득 들어간(가끔 그것도 웃기긴 하지만) 추리소설도 좋고 더 극단적으로 ‘후까시’를 잡는 필립 말로도 좋지만 엘러리 퀸처럼 대놓고 ‘나는 킬링타임용이여’라고 웃으며 뛰어다니는 편이 역시 이 여름 보내기에는 더 낫지 않을까. 덕분에 어지간히 근엄한 소설 좋아하시는 나도 이 귀여운 가족(엘러리, 퀸 경감, 그리고 작은 주나까지)에 푹 빠져 오늘도 학교 도서관에 목매달고 있다.

 마지막으로, 프렌치(프랑스) 백화점, 고마워. 멋진 남자를 소개시켜 줘서.(프렌치 가족의 불행에는 심심한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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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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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마지막 이야기였던 <회전목마>에서부터 발전한 소설이고 먼저 읽은 <황혼녘 백합의 뼈>의 전편인 이야기. 이렇게 쭉 써놓고 보니, 새삼 온다 리쿠가 제목 하나는 참 잘 뽑는구나 싶다. 나는 제목을 잘 뽑는 사람을 참 부러워하기 때문에, 새삼 이 지칠 줄 모르는 이야기꾼이 더욱 부러워졌다.

 개인적으로 이 일련의 시리즈 중에서는 <황혼녘 백합의 뼈>를 가장 좋아한다. 온다 리쿠가 아름다운 소년 소녀를 사랑한다면, 나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완전에 가까운 글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나마 <황혼녘 백합의 뼈>은 꽤 ‘소설다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는 아무래도 그만한 견고함은 떨어진다. 게다가 이미 <황혼녘 백합의 뼈>를 본 상태였기 때문에 요한이 누구이며 교장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덕분에 미스터리적인 즐거움은 절반정도 댕강 잘려나간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배경이나 인물이 너무 비현실적이 아닌가. 온다 리쿠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계속 생각한 거지만, 이 작가는 학교라든지 아름다운 소년 소녀에 대한 엄청난 환상이 있다. 그리고 이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는 그 환상의 정점에 다다라 있다.

 하지만 가끔 단점이 장점이 되기도 하는 일도 있고, 미치면 미친다는 말도 있는데, 이 소설도 어찌 보면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황당하리만큼 이상적인 배경과 인물들이 도리어 내가 이 책을 읽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이 소설은 눈이 즐거운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보장한다. 온다 리쿠가 묘사하는 학교는 완벽하고(심지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비밀까지도!)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눈부시다. 역자 후기에 이 소설의 인물들이 인기투표에서 상위권을 독점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말 확실히 동감한다. 이를테면 요한은 만화 <몬스터>의 그 요한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이고, 레이지는 어른스러움과 아이다움이 중층적으로 복합된 이미지에, 레이코는 소싯적 하이도(Hyde)의 긴 머리 모습에 정신병자와 같은 불안함을 한 두 방울 첨가한 이미지이다. 도리어 <황혼녘 백합의 뼈>에서 그토록 매력적이던 리세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는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어중간한데, 어쩌면 그것도 기억을 잃고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한 방법인가 슬쩍 의심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흐리멍덩한 계집애(笑)를 요한이나 레이지와 같은 미소년이 좋아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분하다는 것. 이 정도면 확실히 즐겁게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엄밀히 말해 온다 리쿠는 소설가가 아니라고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이야기꾼이다. 스스로 <회전목마>에서 밝혔듯이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예술적으로 완결된 소설’이라는 작품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듯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나도 소설로서는 실격이다, 라는 말은 거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소설로서는 미완이지만 이야기로서는 거침이 없다. 나는 일찌감치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을 접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작정으로, 중반 이후에는 편안히 캐릭터들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캐스팅 놀이에 전념했다. 낯선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즐거운 경험이기도 했다. 조약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에는 눈을 떼지 못하는 작가의 힘에 몇 번이나 감탄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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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제이 2007-08-14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미치면 미친다니 참으로 시원시원한 표현이시네요^^ 멋진 리뷰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