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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먼 길을 돌아온 기분이다. 일년 넘게 책도 제대로 읽지 않고 나답지 않게 생활했다. 그러다 문득 어제, "이대로 사회에서 누락된다 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일년간 내가 한 일은 사회 안으로 들어가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친 일뿐인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그 끝에 고작 든 생각이 "사회에서의 누락"이라니. 사회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부림쳤는데, 그게 오히려 사회 바깥으로 밀려나게 한 꼴이다.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그랬다. 

 적응기간. 필요하다. 일단 밀린 서평부터 하나하나 쓸 작정이다. 시험삼아 잡동사니글처럼 몇 개를 썼는데 내가 쓴 글이지만 정말 한숨이 나온다. 오랫동안 글다운 글을 쓰지 않았더니 영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렇다. 다시 걸음마부터 할 것. 스스로에게 말한다. 걷자,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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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와의 만남 행사 후기

 
 그가 왔다. 처음 <일식>으로 만났을 때 대학교 4학년이던 그가, 10년의 세월을 지나 이제 유부남이 되어서 돌아왔다.
 사실, 히라노의 강연회는 이것으로 두번째이다. 첫번째는 2005년, 일본문화교류재단에서 주최한 강연회였다.(그때의 강연록은 이쪽) 그때로부터 벌써 3년이 지났다. 그러니 당연히 이 성실하고 성실한 작가에게도 변화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의 변화는 이미 그의 소설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2005년 번역된 <장송>(일본에서는 2002년에 나온 것으로 안다.)으로 이른바 '전환기 3부작'을 완성한 작가는 그렇다면 그러한 역사의 '변화와 전환'을 통해 완성된 현대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뚜렷한 자각을 가지고 그 사회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소설에서도 보여지듯, 이 작가는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것을 알기에, 현대를 그리는 소설에 그에 걸맞는 형식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센티멘털>(원제 다카세가와高瀨川),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 <얼굴 없는 나체들>(아직 한국에서는 번역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번역이 된 <당신이, 없었다, 당신>이다.

 그리고 다양한 형식적 실험은 이것으로 어느 정도 일단락된 모양이다. 작가는 다시 <결괴>(아직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얼마 전에 단행본이 나왔다. 이와 관련한 작가의 인터뷰가 보고 싶으면 이쪽)라는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나도 아직 이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그리고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단편만큼 실험적인 형식미를 추구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가 형식에 대한 실험정신을 포기했다기보다는 드디어 자신이 쓰고 싶은 내용에 걸맞는 형식을 찾아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번 강연회는, 그러니까 이런 맥락에서 작가의 생각을 본인의 입으로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히라노의 강연은 역시 '현대'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현대가 시작되었고, 9.11이 일어났으며, 사람들은 공동체적인 삶에서 벗어났으며,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등장했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그는 이런 세상에서 어떤 문학을 써야 하는가? 작가는 우리가 지금에서야 받아 본 <당신이, 없었다 당신>보다는 얼마 전 그가 출간한 신작 <결괴>의 이야기를 주로 하여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다.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협력을 위해 공통의 '적'을 만들어 내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국가가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자 그 극복책으로 '적'을 설정하고 그것에 대항함으로써 국민의 단결을 이끌고 이미 존재하는 부조리들을 덮는다거나, 인터넷에 악성댓글을 달아서 '우리는 하나다'라는 식의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방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반대편에는, 텔레비전과 같은 기존의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부정하는 '인터넷'이라는 미디어가 있다고 보았다. 선택할 수 있는 정보와 그로 인해 분열되는 작은 세계. 그리고 그 작은 세계가 서로 간섭하면서 다양해지는 인간세계의 모습들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작가는 세계가 점차 각각의 새로운 틀로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그를 위해 다양한 실험적 형식을 시도했음을 고백했다.

 또한 당시 그가 동아시아 문학 포럼에 참가하고 있었기에 그러한 활동을 통해 다양한 채널을 통한 한중일 교류를 늘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말도 잊지 않았다.(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요!)

 질의문답 시간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어려운 소설'에 대한 생각이었다. 2005년에만 해도 그는 작가가 독자들의 수준을 멋대로 설정하고 일부러 쉬운 소설을 쓰는 것은 독자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 <결괴>에서는 그런 생각이 바뀌어 글을 어렵게 느끼는 것은 '인터페이스'의 문제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흥미를 끌 수 있는, 마치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요소들을 도입했다는 말이었다. 그 외에 지난 10년간 소설을 쓰면서 생각한 점이라든지, 미(美)에 대한 생각도 말해주었다. 그는 소설가로서 10년간 독자들과 소통하며 좀 더 나은 소설을 쓸 수 있도록 성장했다고 말했으며, 자신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최고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예술을 우선시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대답을 했다. 역시, 진지하면서도 멋진 대답이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젊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나이가 젊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이 시대를 진지하고 냉정한 눈으로 진단하고 있으며 그것을 문학에 끊임없이 반영하려 하기 때문이다. 처음 그가 '예술지상주의자'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는 소설을 쓴지 10년이 되는 지금도 여전히 소설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하나의 일에 전부를 걸 수 있는 남자라면 나이가 몇이든간에 젊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갈 수 있어서 기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강연회를 마친 후 발걸음을 집으로 옮겼다.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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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히라노 게이치로의 간단한 강연록
    from 아비시엔 2008-10-07 20:35 
    10월 2일에 있던 강연의 간단한 정리본이다.통채로 녹화한 파일이 있긴 한데, 생각보다 음질이 좋지 않아서 그걸 블로그에 올리기에는 조금 무리일 듯.혹시 개인적으로 원하는 분이 있으면 조용히 문의해 주세요(笑) 일본은 저작권에 민감하니까 이런 것도 원래 공유하면 안 되는 건데, 그러니까, 더욱 조용히 문의해 주세요(......)
 
 
천재 2008-10-08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한 문의^^ 히라노 게이치로가 만든 온화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상당부분 그의 발언들이 생각나지 않은 1人입니다-_-;; 녹화한 파일 보고싶은데 보내주실 수 있는지...? genius50@hanmail.net입니다!
 
[제1회 블로거 문학 대상] 문학에 관한 10문 10답 트랙백 이벤트

1. 당신은 어떤 종류의 책을 가장 좋아하세요? 선호하는 장르가 있다면 적어주세요.
-문학,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추리소설이나,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일본식 기담을 특히 좋아한다.

2. 올여름 피서지에서 읽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요?
-코맥 매카시의 <로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3.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요? 혹은 최근에 가장 눈에 띄는 작가는?
-한국에는 김연수, 일본에는 히라노 게이치로. 내 인생을 바꾼 작가들.

4.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이유와 함께 적어주세요.
-김연수의 단편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의 세희. 나와 고민하는 것이 닮았다고 느껴졌다.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을 끝까지 이해하려 드는 것. 그러나 쉽게 포기한 나와 달리 그녀는 끝까지 가버리니까, 그런 모습은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윤리적'으로 보였다.

5.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서 자신과 가장 비슷하다고 느낀 인물 / 소설 속 등장인물 중 이상형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이 있었다면 적어주세요.
-비슷하다고 생각한 인물이라면.....방금 말했던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의 세희? 물론 나는 죽도록 고민하진 않지만. 등장인물 중 이상형이라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장송>에 나오는 들라크루아. 멋진 사람이고 어른이다. 몸과 영혼이 균형잡혔다는 느낌이 딱 든다.

6.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아니면 <그리스인 조르바>? 사실 워낙 내 취향이 독특해서 누구에게 무얼 권하기가 꺼려진다.

7. 특정 유명인사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누구에게 어떤 책을 읽히고 싶은가요?
-코엔형제에게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을 선물하고 싶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처럼 멋지게 영화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8. 작품성과 무관하게 재미면에서 만점을 주고 싶었던 책은?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윈터러> 이 방면의 장점들만 모아놓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9. 최근 읽은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면 적어주세요.
-
사랑은 입술이고 라디오고 거대한 책이므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므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입술을 빌려 하는 말은, 바로 지금 여기가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라는 것이므로. 그 리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름답게, 이토록 아름답게 연결되므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사랑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을. 오직 존재하는 것은 서로 닿는 입술의, 그 손길의, 살갗의, 그 몸의 움직임뿐이라는 것을 그도 알았더라면.(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10. 당신에게 '인생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유와 함께 적어주세요.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 이 책을 읽고 소설가가 대단한 존재이며 소설가가 되는 것도 생각해볼 만 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 내 인생을 바꾼 책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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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 시간표라는 녀석이 목요일 3개 몰아보기로 되어버렸습니다. 참 공부 안 하기 딱 좋은 조건이지요. 평점 3.5가 넘어야 학교를 다닌다는 절박감도, 휴학 한 번 하고 났더니 희미해지고, 매일 또 잠 못 자는 밤이 계속되면서 ‘시나 읽을까’하며 다시 연시(戀詩) 읽기 시작입니다. 지난번에는 영시였으니 이번은 한국시로 읽었습니다.

쨍한 사랑 노래

               황동규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읽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왜 바람에 스치는 나뭇가지가 우는 소리를 내는지.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왜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지를. 나뭇가지 부대낄 때마다 내 마음 같이 부대끼는 것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렇게 날 밤을 꼬박 새웁니다. 몇 번을 뒤척이고 시계를 확인하기도 지칠 때쯤이면, 생각합니다. 차라리 이 마음이라는 녀석이 없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차마 말도 못 붙이고 돌아설 때, 다른 아이와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볼 때도 생각합니다. 마음이야, 사라져라. 그냥 요즘의 이 해사한 햇살만 남아라. 그런 마음으로 시를 읽었습니다. 아아. 쨍한 사랑 노래군요.

 또 다른 시도 읽었습니다. 정지용의 삽사리라는 시입니다.

 


삽사리

                정지용

 

그날 밤 그대의 밤을 지키던 삽사리 괴임직도 하이. 짙은 울 가시사립 굳이 닫히었거니. 덧문이요 미닫이오 안의 또 촉불 고요히 돌아 환히 새우었거니. 눈이 치로 쌓인 고삿길 인기척도 아니하였거니 무엇에 후젓하던 맘 못 놓이길래 그리 짖었더라니 얼음 아래 잔돌 사이 뚫노라 죄죄대던 개울물 소리 기어들세라 큰 봉을 돌아 둥그레 둥긋이 넘쳐오던 이윽달도 선뜻 나려설세라 이저리 서대던 것이러냐 삽사리 그리 굴음직도 하이 내사 그댈새레 그대것엔들 닿을 법도 하리 삽사리 짖다 이내 허울한 나릇 도사리고 그대 벗으신 고운 신이마 위하며 자더니라.

 

 

 삽사리라는 녀석이 참 영물입니다. 주인을 누가 해할까 얼음 아래 잔돌 사이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도 봉긋 솟아난 이윽달에도 목청 높여 짖으니 말입니다. 님을 향한 시인의 마음도 삽사리와 다르지 않기에 삽사리가 자는 그대 벗으신 고운 신 위에 시인의 마음도 같이 깃듭니다. 그리고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도 그 자리에 같이 깃듭니다. 그대 삽사리 괴임직도 합니다. 참말로. 참말로.

 마지막으로 읽은 시는 허난설헌의 시입니다. 정민교수님의 번역으로 읽었습니다.


채련곡(採蓮曲)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맑은 가을 호수에 옥 같은 물 흐르는데,

荷花深處係蘭舟(하화심처계난주) 연꽃 무성한 곳 목란배 매어 두고,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연자) 님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고는,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


 이백의 <채련곡>은 강남의 화려하고 자유분방함이 엿보이는 반면, 허난설헌의 시는 아름다우면서도 부끄러운 쓸쓸함이 가득합니다. 연밥의 한자어인 연자(蓮子)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뜻의 연자(憐子)와 발음이 같아서, 연밥을 던지는 것은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라는군요. 그렇게 사랑을 고백하자마자 남부끄러워 반나절이나 얼굴을 붉히고 있을 소녀를 떠올리니 남 이야기 같지만은 않아서 그냥 쓸쓸히 같이 웃습니다. 16세기의 여인이나 21세기 제 처지나 달라진 건 없으니 세상사는 별로 변한 것이 없나 봅니다. 그리고 또 님은 아무 것도 모르고 건너편 대안으로 사라지겠죠.

 

 

 (여담입니다만, 이 시가 읽고 싶어 검색했다가 웬 동방신기 팬픽이 하나 떠서 또 읽어버렸다죠. 그러나 저는 여전히 동방신기 다섯 명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소설은 소설, 현실은 현실. 소설의 묘사대로 동방신기를 구분하는 건.......절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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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공강시간에 애매하게 시간이 남기에 습관처럼 도서관에 갔다. 가는 도중에 갑자기 포의 시를 읽는 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어 영시쪽 서가를 찾았다. 포의 시집을 찾는 중 제가 좋아하는 오든의 시집도 찾아서 같이 들고, 포를 읽는 김에 포의 영향을 받았다는 보들레르도 다시 읽어볼까 하고 <악의 꽃>도 찾아서 함께 읽었다.

 포의 시집은 역시나 유명한 애너벨 리Annabel Lee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진난만하다가도 맨 마지막 연까지 읽으면 어쩐지 으스스해지는 시. 포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죽지 못하고 되살아난 자들’의 분위기도 나고. 별로 길지 않을 줄 알고 직접 손으로 베끼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길어서 절반도 안 쓰고 후회가 밀려오더라.

 

애너벨 리Annabel Lee


                                  E. A. Poe


오래고 또 오랜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여러분이 아실지도 모를 한 소녀 
        애너벨 리가 살고 있었다.

이 소녀가 오직 한결같이 생각한 것은 
        나와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

나는 아이였고 그녀도 아이였으나 
        바닷가 이 왕국 안에서
우리는 사랑 중 사랑으로 사랑했다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날개 돋친 하늘의 천사조차도 
        샘낼 만큼 그렇게 사랑으로

분명 그것으로 해서 오랜 옛날 
        바닷가 이 왕국에
밤에 구름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내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훌륭한 친척들이 몰려와 
        내게서 그녀를 데려가 버렸고
바닷가 이 왕국 안에 자리한 
        무덤 속에 가두고 말았다

절반만큼도 행복하지 못한 하늘의 천사들 
        그녀와 나를 시가하고 있다.
그렇다! 그렇기에 (누구나 다 알고 있듯, 
        바닷가 이 왕국에서)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히 죽였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 그것은 훨씬 더 강했다, 
        우리보다 나이 많은 이들의 사랑보다도 
        우리보다 아주 지혜로운 많은 이들의 사랑보다도
그래서 하늘의 천사들도 
        바다 밑의 악마들도
나의 영혼을 떼어 놓을 수 없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달빛 밝을 때면 언제나 나의 꿈속엔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모습이 나타나고,
별들 떠오를 때면 언제나 나는 
        애너벨 리의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본다.
그러기에 밤이 새도록 나는 누워 있다,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거기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바다 옆 그녀의 묘지에서.

 

 원어로 읽으면서 새삼 포의 시는 운율성이 아주 강하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같은 단어나 구를 계속 반복하는 걸 좋아하는 듯. 덕분에 외국인인 내가 읽어도 꽤 리듬감이 느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포의 작품을 읽으며 실망(?)했던 것은, 내 눈에는 전혀 보들레르와의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보들레르를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더군. 차라리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포의 <갈가마귀>가 닮았다고 말한다면 모를까....... 도대체 보들레르가 젊은 나이에 절명한 거 빼고 포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그것을 알게 되려면 영시와 프랑스 시에 대해 더 공부해 들어가야 할 듯. 포 이전과 이후의 영시를 읽고, 보들레를 이전과 이후의 프랑스 시를 읽고 비교하고.......하는 식으로 말이지. 뭐 말이야 쉽지, 사실 언제 그 공부를 하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읽은 오든의 시집은, 역시 좋았다. 오든의 시는 약간 릴케의 분위기가 나는 것도 같고.......하여간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그 상황 인식이 좋다.


연애편지Love Letter

                       W. H. 오든


햇볕이 따갑고 또 길을 잃고 해서
피곤한 표정으로 낯선 계곡에
처음으로 내려와
너는 확실히 떠나지 않고 있다.
나는 양(羊) 우리 뒤에 웅크리고 앉아
폭풍우 속에서 갑작스레
새가 울며 날아가는 것을 보고
한 해의 궤도가 끝나고
사랑의 낡은 순회가 다시 시작됨을 깨닫는다.
끊임없이, 그리고 어김없이 돌아가는
지붕 위에 제비를 보듯이
봄날 이른 초록빛 흔들림과
지나는 외로운 트럭과, 가을날
최후의 따돌림을 보고 지나가리라.
그러나 지금
다정한 이마를 훼방 놓으며
저녁에 두고두고 따뜻한 생각에 잠기게 하는
너의 편지가 왔다, 비록 너처럼 수다스럽게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결국은 못 온다는 소식이구나.

 

언어는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손가락은 마비되지 않는다.
만일에 사랑이 적지 않게 부당한 답장을 받았다면
사랑은 속임을 당한 것.
나는 계절과 더불어 예의를 배우고
다른 사랑을 생각하며 가고 있다.
지나치게 묻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더 과묵할 수 없는
이 시골에 나는 신의 돌 같은 미소는
항상 뜻 이상의 것을 말하기를 꺼린다.

 

 새 한 마리가 울며 날아가는 걸 보곤, 계절이 바뀌었구나, 사랑이 변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시인의 감성이 참 와 닿았다. 연애의 막바지에서 적당히 예의를 지키며 홀로 다른 사랑을 생각한다는 감정 묘사도 좋고. 사랑할 때 겪는 마음의 결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아 절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덧없는 인생이지만, 이 순간 내 품 안에 잠들어라’라고 말하던 그 시인이다, 과연. 이 남자도 사랑이 뭔지 아는 남자(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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