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Mr. Know 세계문학 26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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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로저 젤라즈니 -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아름다운 청년 같은 단편집


 책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이 책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잘생긴 청년 같은 책이다. 아름다운 얼굴과 몸은 신들도 질투할 만한 그런 청년 말이다. 그 청년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단단한 몸으로 대지를 뛰어다니다 막 돌아온 홍조 띤 얼굴 같은 글들이 바로 이 소설책의 단편들이다. 무언가 다른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힘이 이 글들에는 담겨져 있다. 건강한 열기, 긴장감, 그리고 이상까지도.

 그런 글은 늙은 사람이 써내기에는 어려운 법이다. 그것은 폭발하듯 자신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한꺼번에 태워버릴 작정으로 덤벼드는 젊은이만이 써낼 수 있는 글이다. 나는 노장의 원숙한 글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젊은 사람만이 써낼 수 있는 이런 글들 쪽이 더 좋다. 게다가 로저 젤라즈니는 젊은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즉 너무 지나쳐서 오히려 모자라느니만 못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이 작가는 젊지만 또 충분히 이미 거장의 풍모 또한 갖추고 있는 것이다. 손 댈 곳이 없는 청년의 아름다운 몸처럼, 이 책의 소설들도 그들 스스로 이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로저 젤라즈니와 처음 만난 책 <신들의 사회>에서도 그랬지만 이 책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도 나를 흠뻑 그의 감성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의 초기 소설은 한결같이 힘이 넘치고, 매력적이다. 그 매력의 첫번째 이유라면 그의 탁월한 문장력을 들 수 있겠다. 그는 그 어떤 작가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아름답고 신비한 문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문장은 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끝나서, 글을 빨리 읽어버리는 나 자신을 자책하게 만든다. 그가 사용하는 농담은 우아하다. 그가 그리는 장면 장면은 단순한 장면이 아니라 늘 중첩된 의미를 담고 있다. 대개 이런 찬사는 본격문학의 거장에게나 어울릴 법한데도, 작가는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가져간다. 그는 청년의 문학을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검은 결코 어린애가 쓰는 목검이 아니라 전문가가 오랜 세월 수련을 통해 얻어낸 진검인 것이다.

 그러나 그 힘과 매력은 단순히 그가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고 장면을 배치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서 드러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의 진정한 힘은 오히려 그가 만들어내는 인물들에게 있다. 그 인물들에게는 하나같이 숭고함이 깃들어있다. 그 숭고함은 말 그대로 그들의 높은 이상과 그 이상을 위해 정진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나온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  처음에는 질주하는 듯한 그의 이야기들을 따라가다가 나중에 가면 결벽증적일 정도로 윤리적인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주인공들의 그 성격에 매료된다.

 살아가며 어깨를 웅크리고 겁쟁이를 자처하는 자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나 자신부터 그러하지 않은가. 하지만 적어도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에서 그런 주인공들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미련스러울 정도로 스스로가 정한 원칙을 밀고 나가려고 한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괴롭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런 주인공들이 처음에는 답답하고 오만하게 느끼다가도 나중에는 그 숭고한 인생에 저도 모르게 감동하게 된다. 이제는 한계야, 라고 모두가 생각하는 순간에도 주인공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결말로 내달린다. 그 가속력의 공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주인공의 위대함을 깨달으며 함께 이야기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실린 여러 편의 단편들 모두 그런 인물들을 그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편집들 중에서 중심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것들-예를 들자면 <12월의 열쇠>,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프로스트와 베타>등-에서 분명 그러한 오만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젊은 청년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힘은 결코 내게 멈출 시간을 주지 않고 이 책을 그 자리에서 사도록 만들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인물들을 만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기에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은 멋모르는 청년의 느낌을 지닌 소설이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방종 대신 아름다움을, 유치함 대신 경건함을 불어넣은 것은 로저 젤라즈니의 문학에 대한 재능과 열정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를 보완하고 더욱 완벽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나는 그가 비워둔 행간의 하얗고 넓은 바다에서 그가 노래한 위대하지만 오만하고 미천하지만 별처럼 반짝이는 영혼들을 상상한다. 그의 소설은 분명히 SF의 범주를 넘어 모든 문학이 앉을 수 있는 가장 영광된 자리에 앉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의 문학은 이토록 나를 가슴 뛰게 만들고, 그리고 상상하게 만드니까. 그러한 독서체험이란 분명히 행복한 일이다. 나에게 이런 행복을 준 작가에게 존경의 장미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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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 시간표라는 녀석이 목요일 3개 몰아보기로 되어버렸습니다. 참 공부 안 하기 딱 좋은 조건이지요. 평점 3.5가 넘어야 학교를 다닌다는 절박감도, 휴학 한 번 하고 났더니 희미해지고, 매일 또 잠 못 자는 밤이 계속되면서 ‘시나 읽을까’하며 다시 연시(戀詩) 읽기 시작입니다. 지난번에는 영시였으니 이번은 한국시로 읽었습니다.

쨍한 사랑 노래

               황동규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읽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왜 바람에 스치는 나뭇가지가 우는 소리를 내는지.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왜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지를. 나뭇가지 부대낄 때마다 내 마음 같이 부대끼는 것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렇게 날 밤을 꼬박 새웁니다. 몇 번을 뒤척이고 시계를 확인하기도 지칠 때쯤이면, 생각합니다. 차라리 이 마음이라는 녀석이 없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차마 말도 못 붙이고 돌아설 때, 다른 아이와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볼 때도 생각합니다. 마음이야, 사라져라. 그냥 요즘의 이 해사한 햇살만 남아라. 그런 마음으로 시를 읽었습니다. 아아. 쨍한 사랑 노래군요.

 또 다른 시도 읽었습니다. 정지용의 삽사리라는 시입니다.

 


삽사리

                정지용

 

그날 밤 그대의 밤을 지키던 삽사리 괴임직도 하이. 짙은 울 가시사립 굳이 닫히었거니. 덧문이요 미닫이오 안의 또 촉불 고요히 돌아 환히 새우었거니. 눈이 치로 쌓인 고삿길 인기척도 아니하였거니 무엇에 후젓하던 맘 못 놓이길래 그리 짖었더라니 얼음 아래 잔돌 사이 뚫노라 죄죄대던 개울물 소리 기어들세라 큰 봉을 돌아 둥그레 둥긋이 넘쳐오던 이윽달도 선뜻 나려설세라 이저리 서대던 것이러냐 삽사리 그리 굴음직도 하이 내사 그댈새레 그대것엔들 닿을 법도 하리 삽사리 짖다 이내 허울한 나릇 도사리고 그대 벗으신 고운 신이마 위하며 자더니라.

 

 

 삽사리라는 녀석이 참 영물입니다. 주인을 누가 해할까 얼음 아래 잔돌 사이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도 봉긋 솟아난 이윽달에도 목청 높여 짖으니 말입니다. 님을 향한 시인의 마음도 삽사리와 다르지 않기에 삽사리가 자는 그대 벗으신 고운 신 위에 시인의 마음도 같이 깃듭니다. 그리고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도 그 자리에 같이 깃듭니다. 그대 삽사리 괴임직도 합니다. 참말로. 참말로.

 마지막으로 읽은 시는 허난설헌의 시입니다. 정민교수님의 번역으로 읽었습니다.


채련곡(採蓮曲)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맑은 가을 호수에 옥 같은 물 흐르는데,

荷花深處係蘭舟(하화심처계난주) 연꽃 무성한 곳 목란배 매어 두고,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연자) 님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고는,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


 이백의 <채련곡>은 강남의 화려하고 자유분방함이 엿보이는 반면, 허난설헌의 시는 아름다우면서도 부끄러운 쓸쓸함이 가득합니다. 연밥의 한자어인 연자(蓮子)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뜻의 연자(憐子)와 발음이 같아서, 연밥을 던지는 것은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라는군요. 그렇게 사랑을 고백하자마자 남부끄러워 반나절이나 얼굴을 붉히고 있을 소녀를 떠올리니 남 이야기 같지만은 않아서 그냥 쓸쓸히 같이 웃습니다. 16세기의 여인이나 21세기 제 처지나 달라진 건 없으니 세상사는 별로 변한 것이 없나 봅니다. 그리고 또 님은 아무 것도 모르고 건너편 대안으로 사라지겠죠.

 

 

 (여담입니다만, 이 시가 읽고 싶어 검색했다가 웬 동방신기 팬픽이 하나 떠서 또 읽어버렸다죠. 그러나 저는 여전히 동방신기 다섯 명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소설은 소설, 현실은 현실. 소설의 묘사대로 동방신기를 구분하는 건.......절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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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공강시간에 애매하게 시간이 남기에 습관처럼 도서관에 갔다. 가는 도중에 갑자기 포의 시를 읽는 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어 영시쪽 서가를 찾았다. 포의 시집을 찾는 중 제가 좋아하는 오든의 시집도 찾아서 같이 들고, 포를 읽는 김에 포의 영향을 받았다는 보들레르도 다시 읽어볼까 하고 <악의 꽃>도 찾아서 함께 읽었다.

 포의 시집은 역시나 유명한 애너벨 리Annabel Lee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진난만하다가도 맨 마지막 연까지 읽으면 어쩐지 으스스해지는 시. 포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죽지 못하고 되살아난 자들’의 분위기도 나고. 별로 길지 않을 줄 알고 직접 손으로 베끼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길어서 절반도 안 쓰고 후회가 밀려오더라.

 

애너벨 리Annabel Lee


                                  E. A. Poe


오래고 또 오랜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여러분이 아실지도 모를 한 소녀 
        애너벨 리가 살고 있었다.

이 소녀가 오직 한결같이 생각한 것은 
        나와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

나는 아이였고 그녀도 아이였으나 
        바닷가 이 왕국 안에서
우리는 사랑 중 사랑으로 사랑했다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날개 돋친 하늘의 천사조차도 
        샘낼 만큼 그렇게 사랑으로

분명 그것으로 해서 오랜 옛날 
        바닷가 이 왕국에
밤에 구름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내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훌륭한 친척들이 몰려와 
        내게서 그녀를 데려가 버렸고
바닷가 이 왕국 안에 자리한 
        무덤 속에 가두고 말았다

절반만큼도 행복하지 못한 하늘의 천사들 
        그녀와 나를 시가하고 있다.
그렇다! 그렇기에 (누구나 다 알고 있듯, 
        바닷가 이 왕국에서)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히 죽였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 그것은 훨씬 더 강했다, 
        우리보다 나이 많은 이들의 사랑보다도 
        우리보다 아주 지혜로운 많은 이들의 사랑보다도
그래서 하늘의 천사들도 
        바다 밑의 악마들도
나의 영혼을 떼어 놓을 수 없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달빛 밝을 때면 언제나 나의 꿈속엔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모습이 나타나고,
별들 떠오를 때면 언제나 나는 
        애너벨 리의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본다.
그러기에 밤이 새도록 나는 누워 있다,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거기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바다 옆 그녀의 묘지에서.

 

 원어로 읽으면서 새삼 포의 시는 운율성이 아주 강하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같은 단어나 구를 계속 반복하는 걸 좋아하는 듯. 덕분에 외국인인 내가 읽어도 꽤 리듬감이 느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포의 작품을 읽으며 실망(?)했던 것은, 내 눈에는 전혀 보들레르와의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보들레르를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더군. 차라리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포의 <갈가마귀>가 닮았다고 말한다면 모를까....... 도대체 보들레르가 젊은 나이에 절명한 거 빼고 포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그것을 알게 되려면 영시와 프랑스 시에 대해 더 공부해 들어가야 할 듯. 포 이전과 이후의 영시를 읽고, 보들레를 이전과 이후의 프랑스 시를 읽고 비교하고.......하는 식으로 말이지. 뭐 말이야 쉽지, 사실 언제 그 공부를 하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읽은 오든의 시집은, 역시 좋았다. 오든의 시는 약간 릴케의 분위기가 나는 것도 같고.......하여간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그 상황 인식이 좋다.


연애편지Love Letter

                       W. H. 오든


햇볕이 따갑고 또 길을 잃고 해서
피곤한 표정으로 낯선 계곡에
처음으로 내려와
너는 확실히 떠나지 않고 있다.
나는 양(羊) 우리 뒤에 웅크리고 앉아
폭풍우 속에서 갑작스레
새가 울며 날아가는 것을 보고
한 해의 궤도가 끝나고
사랑의 낡은 순회가 다시 시작됨을 깨닫는다.
끊임없이, 그리고 어김없이 돌아가는
지붕 위에 제비를 보듯이
봄날 이른 초록빛 흔들림과
지나는 외로운 트럭과, 가을날
최후의 따돌림을 보고 지나가리라.
그러나 지금
다정한 이마를 훼방 놓으며
저녁에 두고두고 따뜻한 생각에 잠기게 하는
너의 편지가 왔다, 비록 너처럼 수다스럽게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결국은 못 온다는 소식이구나.

 

언어는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손가락은 마비되지 않는다.
만일에 사랑이 적지 않게 부당한 답장을 받았다면
사랑은 속임을 당한 것.
나는 계절과 더불어 예의를 배우고
다른 사랑을 생각하며 가고 있다.
지나치게 묻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더 과묵할 수 없는
이 시골에 나는 신의 돌 같은 미소는
항상 뜻 이상의 것을 말하기를 꺼린다.

 

 새 한 마리가 울며 날아가는 걸 보곤, 계절이 바뀌었구나, 사랑이 변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시인의 감성이 참 와 닿았다. 연애의 막바지에서 적당히 예의를 지키며 홀로 다른 사랑을 생각한다는 감정 묘사도 좋고. 사랑할 때 겪는 마음의 결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아 절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덧없는 인생이지만, 이 순간 내 품 안에 잠들어라’라고 말하던 그 시인이다, 과연. 이 남자도 사랑이 뭔지 아는 남자(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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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둔의 기억 1 - 제1부 저항군, 제1권 수색
라우라 가예고 가르시아 지음, 고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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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라는 장르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때로 사람들의 편견이 야속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판타지는 싸구려 장르라든지, 마법만 터트리면 다 판타지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심지어 이와 같은 인식은 판타지를 쓰는 사람들에게까지 스며들어, 내가 보기에는 전혀 쓸데가 없는 마법의 주문 따위를 고심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주문의 정교함이 세계관의 정교함을 완성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저 부수적인 것일 뿐 본질이 아니다.

 그렇다면 판타지(환상 소설)의 본질이 뭔데? 이 자리를 빌어서 대답하자면, 그건 기적이다. 하지만 명심하고 명심할 것은, 기적이라는 것은 사람이 불과 비바람을 부르거나 물 위를 걷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건 그냥 특수효과일 뿐이다. 판타지의, 문학의 기적이란 인간의 기적이다. 인간의 기적이라는 것은 성장과 사랑이다. 아무 것도 모르던 꼬마가 사랑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안다. 그 순간순간 세계가 그와 함께 변화하고 넓어진다.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의 기적은 간달프가 마법을 쓰는 것이 아니라 프로도라는 작고 겁 많은 존재가 세계를 위해 반지 원정대에 뛰어든 것이 아닐까. 글쎄. 사람들에 따라 생각이 다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기적이 판타지에 있기 때문에 내가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읽어도 진심으로 감동받을 수 있는 거라고. 결국은 판타지도 문학의 한 범주일 뿐이고, 문학의 진실함 없이는 아무런 감동도 줄 수가 없다고.

 그런 나의 기준에서 <이둔의 기억>은 훌륭한 판타지 소설, 아니 그냥 소설로서도 훌륭한 소설이었다. 만약 잭과 빅토리아가 아무런 성장 없이 자신의 정체를 깨달았다면, 독자가 이렇게 깊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을까? 키르타슈와의 삼각관계가 이토록 절절하게 다가왔을까? 그 모든 소설적인 장치가 진실하게 다가올 수 있던 까닭은 이 소설이 종족이나 전설의 무기와는 관계없이,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잃은 잭의 방황과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빅토리아, 겨우 그 조직을 유지하던 ‘저항군’의 해체와 재조직까지. 그 모든 것들은 이 곳이 판타지의 세계이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의 인물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이 좌절하는 것은 거대한 마법의 힘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고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일상에 가려 우리 자신이 더 자신의 인간적인 힘에 대해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은 인물들이 다 변화하고 자라나지만, 특히 소년 소녀들의 성장은 눈부시다. 고집만 부리던 잭이 책임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약하기만 하던 빅토리아가 사랑 앞에서 용기를 내고, 차갑던 키르타슈가 자신 안에 있는 인간적인 면을 끄집어낸다. 사랑은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하던가. 이 모든 성장이 그들의 사랑과 연관이 있다. 연애와 성장은 그 뿌리가 같은 이복형제쯤 되는 것만 같다. 그렇게 주인공들이 성장하는 부분은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의 환상적인 은유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때로 은유의 형식을 리얼리즘에 입각한 소설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곤 한다. 그것이 판타지의 힘이고, 나는 그 힘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이 소설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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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공책 도코노 이야기 2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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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그 책을 던지면서 고개를 이불에 파묻었다. 무언가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삼월 시리즈를 읽으면서 온다 리쿠에 대해서 조금 안다고 생각했다. 물론 <네버랜드>나 <굽어치는 강가에서>는 삼월 시리즈와는 다른, 따뜻한 느낌이 분명 있었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토록 따뜻해지다니! 이 작가는 대체 어떻게 글을 쓰는 것이란 말인가! 개인적으로 글을 써본 경험상, 갑자기 이렇게 문체나 글의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것도 보통 쉬운 일은 아니다. 보통 작가는 자신에게 낯이 익은 이야기를 자주 쓰는 기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 법 아닌가. 하지만 온다 리쿠는 그런 점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녀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멋지게 풀어낸다. 그러니까 그녀는 역시 멋진 이야기꾼이다.

자. 그럼 이번에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삼월 시리즈에서는 악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이번에는 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환한, 태양과도 같은 선함이다. 아직은 모두가 뉴 센츄리에 들떠있던 20세기 초. 어느 마을에 살았던 아름답고 선한, 그래서 너무나 일찍 떠나가 버린 도코노 일족의 아가씨의 이야기. 아름다운 주인공을 선택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어둠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주인공은 삼월 시리즈의 여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르다. 아름답고 선하고 강한, 그러나 또 덧없이 스러져가는 주인공의 삶은 애잔하면서도 딷따뜻한 무언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물론 온다 리쿠의 장점이 놀라운 만큼 약점 역시 여전하다. 그녀는 여전히 이야기꾼일 뿐 무언가 묵직한 감동을 전해주지는 못한다. 두고두고 다시 읽고 싶다는 느낌도 없다. 읽을 때에는 정신없이 빠져들지만, 그 뿐. 그러나 만약 또 다른 책이 나온다면 역시나 읽어보고 싶어지는 작가. 이런 매력을 가진 작가는 흔치 않은데, 작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판단하기보다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이건 온다 리쿠의 글이야, 라고.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볼까. 문득 지금 우리도 뉴 센츄리로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민들레 공책>의 주인공들이 설렘과 두려움으로 그 시대를 맞이했던 것처럼 우리도 희망과 불만이 교차하는 시기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미래를 바라보려고 애쓰고 있다. 일본은 맹목으로 인하여 이웃과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굳이 이 소설의 주제가 그런 쪽이라고 우기고 싶진 않지만, 나는 마지막 ‘나’의 쓸쓸한 물음에 미쓰히코를 대신해 온 몸으로 힘껏 대답해주고 싶어진다. 그래도 우리는 어제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내일 또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괜찮을거야,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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