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공강시간에 애매하게 시간이 남기에 습관처럼 도서관에 갔다. 가는 도중에 갑자기 포의 시를 읽는 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어 영시쪽 서가를 찾았다. 포의 시집을 찾는 중 제가 좋아하는 오든의 시집도 찾아서 같이 들고, 포를 읽는 김에 포의 영향을 받았다는 보들레르도 다시 읽어볼까 하고 <악의 꽃>도 찾아서 함께 읽었다.
포의 시집은 역시나 유명한 애너벨 리Annabel Lee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진난만하다가도 맨 마지막 연까지 읽으면 어쩐지 으스스해지는 시. 포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죽지 못하고 되살아난 자들’의 분위기도 나고. 별로 길지 않을 줄 알고 직접 손으로 베끼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길어서 절반도 안 쓰고 후회가 밀려오더라.
애너벨 리Annabel Lee
E. A. Poe
오래고 또 오랜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여러분이 아실지도 모를 한 소녀
애너벨 리가 살고 있었다.
이 소녀가 오직 한결같이 생각한 것은
나와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
나는 아이였고 그녀도 아이였으나
바닷가 이 왕국 안에서
우리는 사랑 중 사랑으로 사랑했다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날개 돋친 하늘의 천사조차도
샘낼 만큼 그렇게 사랑으로
분명 그것으로 해서 오랜 옛날
바닷가 이 왕국에
밤에 구름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내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훌륭한 친척들이 몰려와
내게서 그녀를 데려가 버렸고
바닷가 이 왕국 안에 자리한
무덤 속에 가두고 말았다
절반만큼도 행복하지 못한 하늘의 천사들
그녀와 나를 시가하고 있다.
그렇다! 그렇기에 (누구나 다 알고 있듯,
바닷가 이 왕국에서)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히 죽였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 그것은 훨씬 더 강했다,
우리보다 나이 많은 이들의 사랑보다도
우리보다 아주 지혜로운 많은 이들의 사랑보다도
그래서 하늘의 천사들도
바다 밑의 악마들도
나의 영혼을 떼어 놓을 수 없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달빛 밝을 때면 언제나 나의 꿈속엔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모습이 나타나고,
별들 떠오를 때면 언제나 나는
애너벨 리의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본다.
그러기에 밤이 새도록 나는 누워 있다,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거기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바다 옆 그녀의 묘지에서.
원어로 읽으면서 새삼 포의 시는 운율성이 아주 강하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같은 단어나 구를 계속 반복하는 걸 좋아하는 듯. 덕분에 외국인인 내가 읽어도 꽤 리듬감이 느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포의 작품을 읽으며 실망(?)했던 것은, 내 눈에는 전혀 보들레르와의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보들레르를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더군. 차라리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포의 <갈가마귀>가 닮았다고 말한다면 모를까....... 도대체 보들레르가 젊은 나이에 절명한 거 빼고 포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그것을 알게 되려면 영시와 프랑스 시에 대해 더 공부해 들어가야 할 듯. 포 이전과 이후의 영시를 읽고, 보들레를 이전과 이후의 프랑스 시를 읽고 비교하고.......하는 식으로 말이지. 뭐 말이야 쉽지, 사실 언제 그 공부를 하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읽은 오든의 시집은, 역시 좋았다. 오든의 시는 약간 릴케의 분위기가 나는 것도 같고.......하여간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그 상황 인식이 좋다.
연애편지Love Letter
W. H. 오든
햇볕이 따갑고 또 길을 잃고 해서
피곤한 표정으로 낯선 계곡에
처음으로 내려와
너는 확실히 떠나지 않고 있다.
나는 양(羊) 우리 뒤에 웅크리고 앉아
폭풍우 속에서 갑작스레
새가 울며 날아가는 것을 보고
한 해의 궤도가 끝나고
사랑의 낡은 순회가 다시 시작됨을 깨닫는다.
끊임없이, 그리고 어김없이 돌아가는
지붕 위에 제비를 보듯이
봄날 이른 초록빛 흔들림과
지나는 외로운 트럭과, 가을날
최후의 따돌림을 보고 지나가리라.
그러나 지금
다정한 이마를 훼방 놓으며
저녁에 두고두고 따뜻한 생각에 잠기게 하는
너의 편지가 왔다, 비록 너처럼 수다스럽게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결국은 못 온다는 소식이구나.
언어는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손가락은 마비되지 않는다.
만일에 사랑이 적지 않게 부당한 답장을 받았다면
사랑은 속임을 당한 것.
나는 계절과 더불어 예의를 배우고
다른 사랑을 생각하며 가고 있다.
지나치게 묻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더 과묵할 수 없는
이 시골에 나는 신의 돌 같은 미소는
항상 뜻 이상의 것을 말하기를 꺼린다.
새 한 마리가 울며 날아가는 걸 보곤, 계절이 바뀌었구나, 사랑이 변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시인의 감성이 참 와 닿았다. 연애의 막바지에서 적당히 예의를 지키며 홀로 다른 사랑을 생각한다는 감정 묘사도 좋고. 사랑할 때 겪는 마음의 결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아 절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덧없는 인생이지만, 이 순간 내 품 안에 잠들어라’라고 말하던 그 시인이다, 과연. 이 남자도 사랑이 뭔지 아는 남자(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