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시간표라는 녀석이 목요일 3개 몰아보기로 되어버렸습니다. 참 공부 안 하기 딱 좋은 조건이지요. 평점 3.5가 넘어야 학교를 다닌다는 절박감도, 휴학 한 번 하고 났더니 희미해지고, 매일 또 잠 못 자는 밤이 계속되면서 ‘시나 읽을까’하며 다시 연시(戀詩) 읽기 시작입니다. 지난번에는 영시였으니 이번은 한국시로 읽었습니다.

쨍한 사랑 노래

               황동규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읽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왜 바람에 스치는 나뭇가지가 우는 소리를 내는지.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왜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지를. 나뭇가지 부대낄 때마다 내 마음 같이 부대끼는 것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렇게 날 밤을 꼬박 새웁니다. 몇 번을 뒤척이고 시계를 확인하기도 지칠 때쯤이면, 생각합니다. 차라리 이 마음이라는 녀석이 없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차마 말도 못 붙이고 돌아설 때, 다른 아이와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볼 때도 생각합니다. 마음이야, 사라져라. 그냥 요즘의 이 해사한 햇살만 남아라. 그런 마음으로 시를 읽었습니다. 아아. 쨍한 사랑 노래군요.

 또 다른 시도 읽었습니다. 정지용의 삽사리라는 시입니다.

 


삽사리

                정지용

 

그날 밤 그대의 밤을 지키던 삽사리 괴임직도 하이. 짙은 울 가시사립 굳이 닫히었거니. 덧문이요 미닫이오 안의 또 촉불 고요히 돌아 환히 새우었거니. 눈이 치로 쌓인 고삿길 인기척도 아니하였거니 무엇에 후젓하던 맘 못 놓이길래 그리 짖었더라니 얼음 아래 잔돌 사이 뚫노라 죄죄대던 개울물 소리 기어들세라 큰 봉을 돌아 둥그레 둥긋이 넘쳐오던 이윽달도 선뜻 나려설세라 이저리 서대던 것이러냐 삽사리 그리 굴음직도 하이 내사 그댈새레 그대것엔들 닿을 법도 하리 삽사리 짖다 이내 허울한 나릇 도사리고 그대 벗으신 고운 신이마 위하며 자더니라.

 

 

 삽사리라는 녀석이 참 영물입니다. 주인을 누가 해할까 얼음 아래 잔돌 사이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도 봉긋 솟아난 이윽달에도 목청 높여 짖으니 말입니다. 님을 향한 시인의 마음도 삽사리와 다르지 않기에 삽사리가 자는 그대 벗으신 고운 신 위에 시인의 마음도 같이 깃듭니다. 그리고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도 그 자리에 같이 깃듭니다. 그대 삽사리 괴임직도 합니다. 참말로. 참말로.

 마지막으로 읽은 시는 허난설헌의 시입니다. 정민교수님의 번역으로 읽었습니다.


채련곡(採蓮曲)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맑은 가을 호수에 옥 같은 물 흐르는데,

荷花深處係蘭舟(하화심처계난주) 연꽃 무성한 곳 목란배 매어 두고,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연자) 님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고는,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


 이백의 <채련곡>은 강남의 화려하고 자유분방함이 엿보이는 반면, 허난설헌의 시는 아름다우면서도 부끄러운 쓸쓸함이 가득합니다. 연밥의 한자어인 연자(蓮子)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뜻의 연자(憐子)와 발음이 같아서, 연밥을 던지는 것은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라는군요. 그렇게 사랑을 고백하자마자 남부끄러워 반나절이나 얼굴을 붉히고 있을 소녀를 떠올리니 남 이야기 같지만은 않아서 그냥 쓸쓸히 같이 웃습니다. 16세기의 여인이나 21세기 제 처지나 달라진 건 없으니 세상사는 별로 변한 것이 없나 봅니다. 그리고 또 님은 아무 것도 모르고 건너편 대안으로 사라지겠죠.

 

 

 (여담입니다만, 이 시가 읽고 싶어 검색했다가 웬 동방신기 팬픽이 하나 떠서 또 읽어버렸다죠. 그러나 저는 여전히 동방신기 다섯 명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소설은 소설, 현실은 현실. 소설의 묘사대로 동방신기를 구분하는 건.......절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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