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둔의 기억 1 - 제1부 저항군, 제1권 수색
라우라 가예고 가르시아 지음, 고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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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라는 장르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때로 사람들의 편견이 야속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판타지는 싸구려 장르라든지, 마법만 터트리면 다 판타지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심지어 이와 같은 인식은 판타지를 쓰는 사람들에게까지 스며들어, 내가 보기에는 전혀 쓸데가 없는 마법의 주문 따위를 고심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주문의 정교함이 세계관의 정교함을 완성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저 부수적인 것일 뿐 본질이 아니다.

 그렇다면 판타지(환상 소설)의 본질이 뭔데? 이 자리를 빌어서 대답하자면, 그건 기적이다. 하지만 명심하고 명심할 것은, 기적이라는 것은 사람이 불과 비바람을 부르거나 물 위를 걷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건 그냥 특수효과일 뿐이다. 판타지의, 문학의 기적이란 인간의 기적이다. 인간의 기적이라는 것은 성장과 사랑이다. 아무 것도 모르던 꼬마가 사랑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안다. 그 순간순간 세계가 그와 함께 변화하고 넓어진다.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의 기적은 간달프가 마법을 쓰는 것이 아니라 프로도라는 작고 겁 많은 존재가 세계를 위해 반지 원정대에 뛰어든 것이 아닐까. 글쎄. 사람들에 따라 생각이 다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기적이 판타지에 있기 때문에 내가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읽어도 진심으로 감동받을 수 있는 거라고. 결국은 판타지도 문학의 한 범주일 뿐이고, 문학의 진실함 없이는 아무런 감동도 줄 수가 없다고.

 그런 나의 기준에서 <이둔의 기억>은 훌륭한 판타지 소설, 아니 그냥 소설로서도 훌륭한 소설이었다. 만약 잭과 빅토리아가 아무런 성장 없이 자신의 정체를 깨달았다면, 독자가 이렇게 깊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을까? 키르타슈와의 삼각관계가 이토록 절절하게 다가왔을까? 그 모든 소설적인 장치가 진실하게 다가올 수 있던 까닭은 이 소설이 종족이나 전설의 무기와는 관계없이,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잃은 잭의 방황과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빅토리아, 겨우 그 조직을 유지하던 ‘저항군’의 해체와 재조직까지. 그 모든 것들은 이 곳이 판타지의 세계이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의 인물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이 좌절하는 것은 거대한 마법의 힘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고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일상에 가려 우리 자신이 더 자신의 인간적인 힘에 대해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은 인물들이 다 변화하고 자라나지만, 특히 소년 소녀들의 성장은 눈부시다. 고집만 부리던 잭이 책임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약하기만 하던 빅토리아가 사랑 앞에서 용기를 내고, 차갑던 키르타슈가 자신 안에 있는 인간적인 면을 끄집어낸다. 사랑은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하던가. 이 모든 성장이 그들의 사랑과 연관이 있다. 연애와 성장은 그 뿌리가 같은 이복형제쯤 되는 것만 같다. 그렇게 주인공들이 성장하는 부분은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의 환상적인 은유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때로 은유의 형식을 리얼리즘에 입각한 소설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곤 한다. 그것이 판타지의 힘이고, 나는 그 힘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이 소설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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