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kimji > 50, 가을에 읽는 시
알라딘 이벤트를 위해 시집을 좀 뒤적이다가 '가을'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시를 좀 찾았다.
문지시인선의 여성작가에서만 골랐다. 그러니 몇 편 된다.
무엇보다도 '가을' 하면 떠오르는 시,는 이거 아니겠는가.
개 같은 가을이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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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최승자의 시를 무척 좋아했었다. 81년에 발간된 시집을 94년, 스무살에 읽다. 내가 가진 시집들 중에서 가장 낡고 허름한 시집이다. 밑줄도 많고 군데군데 메모도 많다. 그 시절의 나, 스물의 내가 담긴 시집이다. 아, 그 눈부신 나이에 읽기에 너무 잔인한 시들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오랜만에 읽으니, 옛날 생각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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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박라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박라연의 시집을 들추다가 깜짝 놀랐다. 동서울 출발 고속버스 승차권 영수증이 하나 툭 떨어졌기 때문이다. 보니, 2001년 12월 22일자, 18시 10분. 막차였던 것이다. 지금은 남편이 된 '그'에게 가면서 나는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을 읽었던 것이다. 표제지를 보니 2001년 12월 22일,이라고 적혀 있다. 기억난다. 시간이 남아 터미널에서 시집을 샀다. 지금은 애아빠 애엄마가 된 우리 부부의 풋풋한 과거. 은밀한 연인이었던 우리 부부의 지난 시간이 떠오르니, 이 시를 안 읽고 갈 수가 없었다.
(보니, 예전에 이 시집에 관한 페이퍼를 쓴 적이 있었다.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583958)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박라연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 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
가을 편지
박라연
어떤 주인은
장미, 그가 가장 눈부실 때에
쓰윽 목을 벤다
제 눈부신 시절을
제 손으로 쓰윽, 찰나에 베어낼 수 있는
그렇게 날카로운 슬픔을 구할 수만 있다면
꼭 한 번 품어보고 싶던 향기
꼭 한 번 일렁이고 싶던 무늬
왜 있잖아 연초록 목소리 같은 거
기가 막히게 어우러질 때
저 山 저 너무 훌쩍 넘어가고 싶다
아주 오래된 빈집이 있고
날카로운 슬픔의 주인이 있고
희미한 前生의 그림자가 있지만
이 모든 것 제 갈 길 가기 시작하면
나는……야 거북이처럼 느리게 골방으로 가서
습작 시절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삼라만상 무한천공을 엿보리라
눈이 짓물도록 귀가 멍멍해지도록 머물다가
내 주인이 쓰윽, 목을 베면
한 세상 다시 피어 볼 붉히는 장미
장미 한 송이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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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나를 깨운다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8월
황인숙의 여러 시집에 '가을' 이라는 단어는 많았지만 유독 <슬픔이 나를 깨운다>에서 많이 발견. 대표시집으로 고르고. 그 중에서 두 편.
다시 가을
황인숙
구름은 비를 쏟았다
날짜들이 흘러가고
사과나무는 여기저기 사과를 쏟고
마른 나뭇잎 속에서 늙은 거미는
연약하게 댕댕거린다
햇빛이 오래 앉았다 간 자리
바람이 오래 만지작거린 하늘
새들이 날아간다
빈 하늘이 날아가버리지 못하게
매달아놓은 추처럼
가을밤
황인숙
마루를 걸으면
삐걱이는 뼛속에서
철썩거리는 어둠.
방파제를 쌓듯
담요를 두른다.
덜컹,
무슨 소릴까?
문은 잠겨 있는데.
덜컹,
무슨 소릴까?
문은 굳게 잠겨 있는데.
덜컹, 덜컹,
아아 무슨 소릴까?
암만 보아도 문은 잠겨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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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나희덕 시집에도 '가을'은 있다.
가을이었다
나희덕
가을이었다. 뱀이 울고 있었다. 덤불 속에서 뱀이 울고 있었다. 방울소리 같기도 하고 새소리 같기도 한 울음소리. 아닐 거야. 뱀이 어떻게 울겠어. 뒤돌아서면 등뒤에서 뱀이 울었다. 내가 덤불 속에 있는 것인가. 백이 내 속에서 울고 있는 것인가. 가을이었다. 뱀이 울고 있었다. 덤불에 가려 뱀을 보이지 않았다. 덤불은 말라가며 질겨지고 있었다. 그는 어쩌자고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일까. 산길을 내려오는데 울음소리가 내내 나를 따라왔다. 배은 여전히 덤불 속에 있었다. 가을이었다. 아무하고도 말을 주고받을 수 없는 가을이었다. 다음날에도 산에 올랐다. 뱀이 울고 있었다. 덤불 속을 들여다보면 그쳤다 뒤돌아서면 다시 들리는 울음소리. 덤불이 앙상해질 무렵 뱀은 사라졌다. 낯선 산 아래서 지낸 첫 가을이었다.
가을이었다, 아무하고도 말을 주고받을 수 없는 가을이었다, 첫 가을, 이것이 내가 밑줄을 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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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서정시가 좋아졌을 때, 나는 내가 젊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작가들의 이름을 외면하고 오래된 작가들의 신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젊지 않기 때문이었다. 젊지 않은 건 가끔 불편할 뿐, 그리 나쁘진 않다.
가을 물 가을 불
허수경
그 강
내가 자란 마을 강 천지로 불 일듯,
붉은 잎 떨어질 때
그때 그 강가에 서서
아마도 누군가 기다리는 뱃사공 본 듯,
그 뱃사공이 마시던 주발에
붉은 잎 떨어지는 것 본 듯,
검은 이불 속을 뒤척이며
서리서리 퍼런 물,
퍼런 물속 순한 물이
되는 불 만난 듯,
기다린 듯,
거친 손을 뱃사공이 내밀며
가자, 가자, 할 때,
그때 어디로,
라고 묻지 못하는 길
오랫동안 걸은 듯,
가을 물 가을 불 속 검은 이불 속,
순하게 사라지는 꿈꾼 듯
고개 숙이고
강 저쪽을 바라보던 이
실은 뱃사공 무심하게 노를 그은 듯.
내친김에 세기의 라이벌처럼 보였던 최영미와 신현림의 시집에서도 가을을 찾았다. 정말 오래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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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 1994년 3월
94년, 내가 스무살때 서른을 상상했다. 그때 생각한 나의 서른과 진짜 나의 서른의 간극을 어떻게 채워야할까. 최영미의 시집을 다시 읽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스물의 나는 이 시집을 들고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골몰하고 있었는데, 지금 읽으니 시가 모조리 말랑말랑하게 읽히는 게 아닌가. 느물느물해졌나봐, 또 자꾸 웃으면서.
가을에는
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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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블루스
신현림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 1996년 6월
세기말,이라는 단어를 지겹도록 들었던 때가 있었다. 평생 단 한번일테니 시대를 용서하기로 했다, 뭐, 그런 식의 낙서를 어딘가 했던 기억도 난다. 역시나 오래된 시집. 그러고보니, 나는 곧 서른셋이 된다.
삼십삼 세의 가을
신현림
삼십삼 세란 무엇인가
아이 하나, 둘 유아원에 보내거나
미리 죽어 목화솜 같은 바람으로 떠돌거나
우울의 강둑을 거닐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 달래거나
좀더 넓은 아파트
좀더 안정된 살림을 위해
고되고 답답한 나날을 장승처럼 견디는 것인가
'돈을 모아 자유로울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일로 밥을 먹을 수만 있다면'
성취와 만족은 얼마나 먼 등대인가
등대와 가을 태양을 보며 사무치는
나의 삼십삼 세란
무엇에든 용감해지는 일이다
바람 속 장작불처럼 거친 외로움은
죽음의 공포쯤은 커피 마시듯 넘겨주는 일
지금껏 사랑했는가 무얼 제대로 사랑했는가
슬프다면 대신 울어주마
불쾌하다면 기분을 바꿔주마
손을 내밀어 情人들을 편안히 맞이하고
내 안의 깊은 산책길을 따라
잊고 지낸 것을 생각하는 일이다
간소하게 사는 매력과
초조하게 들린 시계소리가
얼마나 어여쁜 노래인가 느끼는 일이다
신현림의 시는 조금 달리 읽힌다. 다만, 나는 이제 서정을 좋아하는 삼십대가 되었다는 점이 아쉬울뿐.
아, 이렇게 시를 읽는 사이 가을밤은 깊어가고.
나는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