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은
  강아지도 한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치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 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
  나는 한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윤동주 시인은 늘 내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밥만 많이 먹고 강아지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생의 순례자가 될 수 있을까
  강아지는 이미 의자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강아지가 먼저 나를 용서할까봐 두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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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랭이꽃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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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는 당신

 
                             마 종기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구해 빈 터를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깊이 숨은 것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깊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 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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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함민복

 

  참 늙어 보인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그수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는 마음 다짐

  독하게,꽃을,땡감을,떨구며

  지나는 바람에 허튼 말 내지 않고

  아니다 싶은 가지는 툭 분질러 버린다

  단호한 결단으로 가지를 다스려

  영혼이 가벼운 새들마저 둥지를 틀지 못하고

  앉아 깃을 쪼며 미련 떨치는 법을 배운다

  보라

  가을 머리에 인 밝은 열매들

  늙은 몸뚱이로 어찌 그리 예쁜 열매를 매다는지

  그뿐

  눈바람 치면 다시 알몸으로

  죽어 버린 듯 묵묵부답 동안거에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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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  터

                                                           김경미

 하루 종일 사진 필름처럼 세상 어둡고 몸 몹시 아프다

마음 아픈 것보다는 과분하지만 겨드랑이 체온계가

초콜릿처럼 녹아내리고 온 몸 혀처럼 붉어져

가는 봄비 따라 눈빛 자꾸 멀어진다 지금은

아침인가 저녁인가 나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빈 옷처럼 겨우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본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온갖 꽃들이 다 제 몸을 뚫고 나와 눈부시다

나무들은 그렇게 제 흉터로 꽃을 내지 제 이름을 만들지

내 안의 무엇 꽃이 되고파 온몸을 가득 이렇게 못질 해대는가

쏟아지는 빗속에 선 초록 잎들이며 단층집 붉은 지붕들이며

비 맞을수록 한층 눈부신 그들에 불쑥 눈물이 솟는다

나는 아직 멀었다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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