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에 나온 책이고, 또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책인데, 옛날 이론 느낌이 물씬 나면서도 귀담아들을 만한 지적들이 있다. 언택트 시대에 도덕감정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2장까지 읽어보니 번역도 썩 괜찮다고 느낀다.


사회의 권력 불균형에 의해 생겨난 사회적 갈등의 해소는 그 불균형이 지속되는 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회학자는 별로 없다. - P16

[] 역사가 종말되는 순간까지 정치는 양심과 권력이 만나는 영역이며, 또한 인간 생활의 윤리적인 요인과 강제적인 요인이 상호 침투하여 잠정적이고 불안정한 타협을 이루는 영역이다.

일부 낭만주의자들이 강제적 요인에 대한 윤리적 요인의 승리라며 찬양하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민주적 방법은 사실상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더 강제적이다. - P29

가장 현명한 형태의 사회 교육조차도 보다 직접적이고 (인간적으로) 친밀한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발전시킨 자애심만큼 관대한 자애심을 개발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윤리적 태도가 사회 전문가들이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것보다 더욱 윤리적이고 친밀하고 유기적인 접촉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윤리적 태도가 인격적 접촉과 직접적 관계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은 한 문명의 도덕적 혼란을 야기시킨 원인이다. 왜냐하면 이 문명—서구 문명을 말한다—에서는 삶과 삶이 유기적이지 못하고 기계적인 관계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상호 간의 책임은 많아졌으나 인격적 접촉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해 관계를 잘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이해 관계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능력은 결코 동정심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관계들의 조화는 자애심에 의존하는 만큼, 혹은 더욱 많이 정의감에 의존한다. 이러한 정의감은 지성의 산물이지 감정의 산물은 아니다. - P58

사실 모든 직접적인 충성은 보다 숭고하고 포괄적인 목적에 대한 잠재적인 위험이며, 승화된 이기주의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이다. 숭고하고 포괄적인 목적에 대한 잠재적인 위험이며, 승화된 이기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는 큰 사회 집단들, 즉 공동체, 계급, 인종, 민족 등은 사람들에게 자기 부정과 자기 확대의 이중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 애국심이란보다 저급한 충성심이나 지역적 충성과 비교해 볼 때, 높은 형태의 이타주의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 전망에서 보면 한갓 이기주의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집단이 크면 클수록 그 집단은 전체적인 인간 집단에서 스스로를 이기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집단은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해지며, 어떠한 사회적 제재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집단이 크면 클수록 공동의 지성과 목적에 도달하기 어려워지며, 불가피하게 순간적인 충동 및 직접적이고 무반성적인 목적과 연계를 맺게 된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과 갈등 상태에 있거나 전쟁의 위험 및 열정으로 인하여 하나로 통일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집단이 커질수록 집단적 자기 의식의 달성은 그만큼 어려워진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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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는 지역, 성별, 연령, 빈부, 정치로 인해 여러 면에서 사분오열된 형국이다. 나는 이 책이 쓸모 있는 도구가 되어, 한국인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보다 풍요롭고보다 공정한 사회를 창조해가는 데 가치가 있기만 하다면, 한국인들이 편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서 아이디어와 정책을 구하게 되길 희망해 본다.

- 한국어판 지은이(조너선 하이트) 서문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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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좋은데, 번역이 만족스럽지 않다. 2016년에 초판 1쇄가 나왔으면 당시까지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른 번역어를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원저는 2014년에 나왔다). 그러다 보니 키워드가 부각되지 않는다. '행동경제학'이라는 학문으로서보다는 '자기계발서' 정도를 번역한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임하신 게 아닌가 생각된다(몇 군데 강하게 의심 드는 대목이 있는데 아직 원전을 확인하지 못하여 생략한다).




  존 스튜어트 밀을 기본 삼아 그에 터 잡은 개입주의 비판의 논리들을 논박하는 내용이다. 선스틴 교수도 대체로 비슷한 논지인데, Millian의 한 사람으로서 온건한 개입주의가 밀과 배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몰랐던 사이에 『자유론』 번역이 두 권 더 나왔다. 2020년 4월에 나온 정영하, 산수야 본은 2015년에 나왔던 것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넛지도 보통은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라 일컫는다.


  어떤 면에서 아주 새로운 내용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2008년에 나왔던 『Nudge』의 후일담 격으로 그간의 논의를 개조식에 가깝게 정리한다. 『Simpler』도 이 책과 함께 2012년 예일대 로스쿨 Storrs Lecture가 바탕이 되었다.



  다음 책들도 예일대 Storrs Lecture를 바탕으로 출간된 것들이다. https://yalebooks.yale.edu/series/the-storrs-lectures-series




  "넛지"(사람들을 행복한 삶으로 유도하는 정부의 부드러운 개입,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게 돕는 정부의 은근한 개입)가 한국사회에서 화제를 모은지 10년이 더 지났고, 2009년 4월 첫 출간 후 2018년 11월에 책을 다시 낼 정도로 책이 성공하였는데, 여전히 우리는 어떤 행동을 주로 '형벌'에 기대어 금지하거나 도출하려고만 한다. 후진적인 방식일 뿐만 아니라 효과도 떨어진다. 행태적 요인에 의한 시장실패(behavioral market failure) 때문이다. 형벌은, '취향'이나 '생각'에는 간접적으로만 개입하면서(형벌의 표현 기능) 심리적/물리적 비용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행동'에 개입한다(규제수단 중에는 형벌과 달리 '결과' 자체에 바로 개입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책 72, 101-106쪽 참조). 그러나 사람들은 단기적 이익에 집착하고, 현저하지 않은 정보를 무시하며, 낙관 편향과 가용성 편향(책은 availability bias를 '입수 가능성 편향'으로 옮겼다)을 가지기 때문에 시스템 2에 힘입은 합리적인 비용-편익 분석이 일어나지 않는다. 형벌은 집행하는 데도 비용이 많이 든다. 요컨대 여러 가능한 수단들 가운데 형벌은 받는 쪽도 부과하는 쪽도 많은 비용을 감당하여야 하게 되는데, 이것은 입법 단계에서 고심하여 줄여야 할 비용이다. '어떤 행동을 억지하거나 이끌어내려면 어떤 선택 설계가 효과적인가'에 관하여 입법자들이 별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에(비용을 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많은 비용을 들이고도 원하는 결과를 효과적으로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정책입안자들이 얄미울 정도로 똑똑해져야 한다. 일견 입장이 선명해 보이는 분들, 당파적 이익에 충실하신 분들은 한 발 거리를 둔 냉정한 비용-편익 분석을 경시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정치가 실용적 개방성을 갖지 못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불행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스틴 교수는 COVID-19의 대유행 속에서도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여러 Webinar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책도 꾸준히 내고 있다. 아직 아마존에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발간되지 않은 것 같은데, 곧 『Too Much Information: Understanding What You Don't Want to Know』가 나올 예정이다(페이스북에 올려주셔서 알았다). 이 분야 주제들을 그야말로 구석구석, 독보적으로 다루고는 계시지만, 반열에 오르고 나시니 간혹 썩 뛰어난 내용이 없는 것 같은 뇌피셜이라도 모두 주목하고 경청하는 것 같다. 나와있는 책 중에는 『Conformity』, 『How Change Happens』가 최근작이고, 이번 포스팅과 관련하여 『On Freedom』이라는 책도 2019년에 나왔다. 전 세계에 엄청나게 팔리는 책을 매년 몇 권씩이나 내고 계시니, 모르긴 몰라도 인세수입이 상당하실 것 같다.


 



  『Why Nudge?』는 분량이 길지 않아서 인용된 단행본이 많지 않다. 번역된 책이 꽤 있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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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공룡들과 프랑스의 추피(T'choupi)에 빠져있지만(이른바 '추피지옥')...


  미국에서 즐겨봤던 시리즈 중에 Mo Willems의 Elephant & Piggie (The best of the best!!), Pigeon 시리즈, Eric Carle의 여러 책들, Sesame Street, Peppa Pig, A Narwhal and Jelly Book, The Pout-Pout Fish, Clifford the Big Red Dog 등과 더불어 롤라(Lola) 시리즈가 있다. [Maisy Mouse는 영국에 비하여 미국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고(동네 Barnes & Noble에 한 권도 없었다), Dr. Seuss도 영어를 배우고 상상력을 키우는 데 좋은 것 같기는 하지만, 그림도 좀 기괴하고, 고전을 넘는 지위는 더 이상 갖지 못하는 것 같다. Pete the Cat이나 Biscuit도 꽤 읽히는데, 코드가 맞지 않는지 아이가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핑크퐁의 상어가족도 캐릭터 자체는 미국 전역에서-아마존 오프라인 매장에 가면 가장 잘 보이는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볼 수 있는데, 노래와 캐릭터가 유튜브로 먼저 뜨고 나서 스토리를 부랴부랴 만들어 채우는 상황이다 보니 아직 책으로서는 독자층을 형성하지 못했다(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뮤직비디오들은 퀄리티도 썩 괜찮지만(공룡 시리즈는 가사에서 각 공룡에 대한 엄밀한 '고증(?)'이 뒷받침되었음이 느껴져 감탄스럽다), 그야말로 양으로 승부하고 있다는 느낌도 드는데, Nickelodeon과 손잡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다니 기대해 볼 일이다. 장수현, "美 빌보드·MLB 강타한 `아기 상어`…동요계 BTS 등극", 매일경제 (2019. 12. 10.)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9/12/1031795/].


  롤라(또는 룰루)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우면서도(위에 열거한 시리즈 중에 사람이 주인공인 책이 딱히 없다) 만연히 살다보면 디즈니의 압도적 공세 속에 의식하지 못하게 될 수 있는 특정 인종의 과잉대표성("whitewashing")을 교정할 수 있고(친소가 있을지언정 가족이 아닌 한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편견이 없다), 책이나 도서관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아주 만족스럽게 보았던 시리즈이다. 모두 스페인어로도 나와있는데,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좋아서 몇 권을 사기도 했다.


  한국에서 최근 어린이 전집 몇 질을 빌려 아이와 함께 읽다가 롤라 책 두 권을 발견하고 아주 반가웠는데...


  읽어주다 보니 원작과 상당히 달라져 있어서 크게 실망하였다. 글쓴이 Anna McQuinn은 2006년 National Parenting Publications Awards (https://www.nappaawards.com/product-types/childrens-books/) 등 여러 상을 받기도 하였는데(http://www.annamcquinn.com/prizes.html),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보니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Lola Loves Stories"와 "Lola at the Library" 뒤에 "with Daddy", "with Mommy"가 붙은 버전이 있고, Lola를 Lulu로 쓴 버전이 있는 등 원작 자체가 여러 버전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일단 텍스트에 큰 변화가 없다는 가정하에 자의적인 번역으로 원작이 가진 미덕을 크게 훼손하였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다.


  비교 대상은 다음 두 책이다. 전집의 다른 책들을 모두 비교하여 보진 못하였지만, 같은 출판사에서 낸 "엄마, 도서관 가요!"는 "Lola at the Library"와 비교하여 볼 때 번역에 큰 무리가 없었고, "뽀뽀 물고기"는 원작인 "The Pout-Pout Fish"와 뉘앙스가 상당히 다르고, 원작만 못하다(생략).



  원작도 좌우가 반전된 책들이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어떤 이유에서 다른 책을 냈는지는 모르겠다. 각 나라의 성평등지수에 따라 다른 버전의 번역권을 준 것일까? 과한 상상 같긴 하지만, 만에 하나 그래서 번역이 원작과 달라진 것이라면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번역본은 낱권으로는 구할 수 없고 전집으로만 살 수 있는 책인데, 설마 라이선스는 확보하고 책을 냈겠지?).



  시작은 문제가 없다. 다만, 원작에서는 요일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번역본에서는 이 장 이후로 요일을 뭉개버려 '그 주의 책을 일주일에 걸쳐 읽고 다음주 토요일에(on Saturday"s") 다시 아빠와 함께 도서관에 간다'는 연속성 내지 일상성이 많이 퇴색되었다.


  토요일 도서관에 다녀온 뒤에 아빠와 읽은 책 이야기, 또 일요일 낮에 전날 밤에 읽은 그 책을 따라하며 논 이야기는 생략하고 조금 뒤로 넘어가서...

  


  일요일 밤에는 '엄마와 함께' 책을 읽었는데 그 내용은 왜 뺐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뒤에 나올 참사들에 비하면 큰 문제는 아니다. 요일을 한 번 빼버리고 나니 이제는 다시 넣을 수 없게 되었다.



  원작을 읽어줄 때는 이 월요일 페이지를 읽으면서 Lola의 친구들("friends")인 코끼리, 하마, 젖소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이들은 뒤에도 등장한다), 번역본에는 친구들 이야기가 빠졌고, "Paris and Lagos"가 "이곳저곳"이라는 무미건조한 말로 대체되었다. 꼭 파리와 라고스는 아니더라도 구체적 지명을 넣었다면 그 나라와 지역에 관하여, 또 앞장 그림에 나오는 해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지명을 그냥 삭제해버렸다. 뒤에서도 구체적인 정보는 계속 자의적으로 삭제되는데(아이들은 더 알면 안 되나??), 아무튼 여기까지도 봐줄 만하다.


  '엇, 이 책 왜 이래?'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화요일째부터였다.



  번역본에서 "다음 날"은 이제 언제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사실 같은 시리즈의 "Lola at the Library"를 보면 롤라는 매주 화요일에는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간다. 그래서 두 책의 아귀가  맞아떨어진다(그나저나 그 번역본인 "엄마, 도서관 가요!"는 아무 이유 없이 "룰루"가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가는 날이 "목요일"이라고 해놓았다. 왜 그랬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a story about friends"를 골랐다는 내용도 없어졌다.


  가장 경악스러운 곳은 바로 다음 장이다. 한국 동화에 아이들을 내맡겨도 되는지 심히 고민하게 만들었던 장면이다.



  아니 왜???


  "친구에 관한 책"을 빌린 화요일 오후에 롤라는 벤을 만나서(아마도 도서관에서?) 그저 커피를 나누어 마시는 놀이를 하였을 뿐이다.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갔을 때 만난 다른 친구의 아빠 또는 엄마가 자기 엄마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보고 이를 따라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Lola at the Library"를 보면, 롤라는 화요일마다 도서관에 가서 "스토리타임"에 여러 친구들을 만나고, 오후에는 항상 엄마와 함께 간식을 먹는다. 저 위의 그림처럼 롤라 엄마는 늘 카푸치노를 마시고, 롤라는 주스를 마시며, 가끔 엄마 카푸치노 위에 얹은 생크림을 떠먹기도 한다).


  그런데 번역본은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닌 둘을 아예 '부부'로 설정하고, 소꿉놀이를 하는 장면으로 만들어버렸다. 둘은 그저 각자 자신들의 아이를 데리고 왔다가 도서관에서 만난 이웃일 수도 있고, 정상가족이 아닐 수도 있는 등 "their babies"라는 말에 내포된 저 네 사람의 관계는 얼마든지 다양한 모습일 수 있다. 그런데 "여보, 차 마셔요!" 같은 오글거리는 대사까지 굳이 넣어가면서 관계를 왜곡한 것이다(진짜 가족이었다면 아이들이 탄 유아차 둘을 저런 식으로 배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아차 배치로 보아도 왼쪽 둘과 오른쪽 둘은 가족이 아닐 개연성이 크다).



  책을 빌려 돌아온 화요일 "밤"에, "엄마"와 함께 "사나운" 호랑이에 관한 책을 읽고 잤고,



  그래서 "다음날"인 수요일에 올라와 함께 정글 놀이를 한 것이다. "사나운" 호랑이는 "아기" 호랑이로 격하되었고, 이틀이 하루로 줄었으며, 친구 이름이 없어졌다. 번역본 책을 읽을 때 아이가 자꾸 "저 친구 이름이 Orla야."라고 하여 '그게 무슨 소리지?' 싶었는데, 원작을 꺼내봤더니 아닌 게 아니라 이름이 있었다. 덕분에 책을 비교해보게 된 것이기도 하다.



  롤라는 매일 밤 책을 읽고 자는데, 요일이 빠지다 보니 그런 맥락은 이제 드러나지 않는다. Old MacDonald도 영어문화권에 특수한 것이니 그렇다 치자.



  엄마가 어떻게 치료하여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내용, 즉 지식의 '주체'로서 엄마라는 메시지도 없어졌다. 붕대 위치는 또 왜 바뀌었는지??? (원작에는 젖소 왼쪽 앞다리에 붕대가 있고, 번역본에는 오른쪽 뒷다리에 붕대가 있다. 바로 뒷장의 그림에서도 붕대 위치가 다르다.)



  목요일 밤에는 아빠와 함께 "우리 집"에 관한 동화책이 아니라 "건축"에 관한 책을 읽었다. 바로 이어지는 내용도 그렇고, 원작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을 읽었다는 뉘앙스로 읽힌다. 눈치 채셨겠지만, 롤라의 엄마와 아빠는 요일별로 번갈아가면서 롤라와 함께 책을 읽고 있는데(각자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므로), 요일을 없애고 나니 그런 나름대로의 규칙, 롤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이 가정의 룰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림에도 나오는 망치와 톱은 왜 번역하지 않은 것인지;;; (망치는 롤라가 잡고 있는데 사진에서는 좀 잘렸다.) 그리고 금요일에 롤라는, 상상 속의 집을 막연히 "멋지게" 짓는 "건축가"가 '추상적으로' '되었던' 것이 아니라, 어딘가 고장난 "내 집"을 '구체적으로' "수리""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롤라 혼자서 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아빠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혼자 망치질, 톱질을 하다간 다칠 수도 있고... 여담이지만, 장난감이나 교구가 우리처럼 잘 나오지 않는 대신 DIY가 일상화되어 있는 미국에서는 '만들기 컨텐츠'에서 어린이에게 위험할 수 있는 공정은 어른의 도움을 받거나 어른에게 맡기라는 경고가 반드시 나온다). 어느 쪽이 아이를, (어딘가 고장이 나면 직접 공구를 들고 고칠 수도 있는) 현실적이고도 자립적인 인격체로 양육하는 방향의 서사인지는 분명하다고 본다.



  원작에서 금요일 밤, 아빠는 롤라에게 마법 구두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동화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창작한 이야기였다(빌려 온 책을 다 읽었기 때문에?). 그런데 번역본은 이 가족의 다채로운 독서생활을 단순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인 토요일, 롤라는 마법 구두를 신고 다시 도서관에 다녀왔다. 앞에서 본 것처럼, 아마 아빠와 함께였을 것이다. 번역본에는 도서관에 다녀온 내용이 빠졌다.



  원작의 앞부분("sparkle")은 앞에서 이어진 것인데 빠졌다. 괴물에 관한 책도 필경 그날(토요일) 도서관에서 새로 빌려온 책일 것이다(바로 위에서 본 것처럼 번역본에는 도서관에 또 갔다왔다는 이야기가 빠졌다).



  번역본은 또 한 번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책을 마친다. 지금껏 롤라는 전날 밤에 어떤 책을 읽으면, 다음날 그 책의 주인공처럼 행동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괴물에 관한 책을 읽으면 괴물이 될 수도 있지, 왜 안 되는가. "괴물이 되기 전에 얼른 다른 동화책을 읽어야겠어요."라는 사족은 개성을 말살하고, 타자를 배제하는 이데올로기 아닌가.



  그와 같은 번역으로 인하여, 바로 다음 장에 나오는 위 그림이 생뚱맞은 것이 되었고, 원작이 가졌던 훈훈하고 귀엽고 유머러스한 마무리가 망실되었다. 어찌 보면 이와 같은 마무리가 롤라에 대한 애정도를 높여주는 "킬포"라고까지 할 수 있는데, 이를 전혀 살리지 못한 것이다.


  아직 '사회'랄 것이 없는 아이들은 가족으로부터, 또 책으로부터 주로 세상을 배운다. 점점 우리나라에도, 가끔은 충격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입장이 올바른(차이와 개인성을 존중하고 배려하게 하는) 어린이 책들이 많이 나오고는 있다. 그러나 특정 어른군의 입맛에 따라, 고루한 기성 질서에 맞춘, 꽉 막히고 판에 박힌 책들도 여전히 많다. 특히 번역서의 경우 '이 책이 왜 좋다는 거지?' 싶은 경우가 있는데, 아이들 책이라고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자의적 번역-전횡-을 일삼고 있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유명한 책들은 원작을 함께 접하는 경우가 흔해진 만큼, 출판업계가 더 신경써주셨으면 좋을 것 같다.


  아래가 바로 '추피지옥'... 하루에도 수십 번은 읽어주고 아이가 그야말로 추피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하고 있다. 추피가 네 발 자전거를 한 손 놓고, 또 두 손 놓고 타다가 넘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따라하느라 일부러 자전거에서 넘어지(는 척하)고는 반창고를 붙여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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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고 좋은 책이다. 지구에 남은 뼈 화석만으로 이렇게 많은 것을 밝혀낸 과학의 힘에 경이를 느낀다. 하긴 아이가 푹 빠져 함께 살고 있다 여기는 공룡의 세계도 오직 과학이 되살려 준 드라마요, 서사이니...


  두 분은 외국에서 활동하고는 계시지만 한국 전문가들이 뜻을 모아 이만한 책을 내셨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뼈에 남은 흔적으로 질병 등 건강상태를 분석하는 우은진 교수님, 뼈 조직의 양상으로 진화사를 밝혀내는 정충원 박사님, 뼈에서 뽑아낸 유전자 염기서열 자료로 과거를 복원하는 조혜란 교수님까지 이만하면 가히 드림팀이라 할 만하다. 우은진 교수님을 검색해 보니, 주간조선에서 낸 저자 인터뷰가 있다. 최준석, "[저자 인터뷰] 우은진 세종대 사학과 교수 "뼈를 보면 삶이 보인다… 우리 안에 네안데르탈인이”, 주간조선 (2018. 4. 2.)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501100012. 뿌리와이파리도 그 포트폴리오를 보면 기획을 참 잘 하는 것 같다.


  알맞은 정도로 잘 추려져 있지만, 몇 가지 흥미로웠던 내용만 간추려 본다. 현생 인류의 피부색 차이는 '자외선'과 관련되어 있다. 즉, 적도 근처는 강한 자외선을 차단하여야 하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일어날 경우 피부색이 옅어질 수 있는 MC1R (melanocortin 1 receptor) 유전자에 생기는 돌연변이가 자연선택을 통해 엄격하게 제거되어 진한 피부색을 유지하고, 반면 고위도 지역에서는 비타민 D 합성을 위해 자외선을 더 많이 흡수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에 유리한 밝은 피부색 쪽으로의 돌연변이가 제약 없는 자연선택을 받았다(책 144-145쪽). 원전은 다음 논문인 것으로 보인다. Nina G. Jablonski and George Chaplin, "Human skin pigmentation as an adaptation to UV radiation,"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May 11, 2010, 107 (Supplement 2) 8962-8968; https://doi.org/10.1073/pnas.0914628107.


  어머니를 통해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 (mtDNA)를 추적함으로써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면 고대사 상당 부분이 새롭게 쓰일 수 있을 것 같다(책 168쪽 이하). 우리와 일본인의 유전적 거리가 지극히 가깝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최근 동아사이언스에는 한국인 1,000명의 게놈 분석 결과 한국인 안에도 매우 다양한 유전적 특징이 나타났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윤신영, "한국인 생각보다 다양하다" 1000명 게놈 분석 결과, 동아사이언스 (2020. 5. 28.) http://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36998. '인간 유전체 다양성 프로젝트'에서 한 것과 같은 상염색체 연구, 특히 '이형접합도heterozygosity' 분석을 통하여 인류의 족보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Luigi Cavalli-Sforza, "The Human Genome Diversity Project: past, present and future," Nature Reviews Genetics 6, 333–340 (2005). https://doi.org/10.1038/nrg1596


  가족법제, 특히 부성주의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딸에게, 왜 '성(姓)'이 굳이 필요한지, 자신은 '일단 보기에' 여성 같은데[즉, 성(性)은 엄마와 같은 것 같은데] 왜 아빠하고만 성(姓)이 같고 한가족인 엄마는 왜 자기나 아빠와 성(姓)이 다른지, 엄마 아빠나 엄마 엄마는 왜 때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라고 하는지(양쪽 부모님께서 다른 지역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평소에는 거주지에 따라 구분하여 지칭하는 편이고, 아이도 호칭으로서는 네 분 모두를 할아버지, 할머니로 구분없이 부르고는 있다), 엄마는 왜 엄마 엄마가 아니라 엄마 아빠와 같은 성을 갖는지 등등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민법에서 인류 평화(?)에 가장 큰 기여를 했던 조문 단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부성 추정'에 관한 조항이라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를 들은 적이 있는데(우리 민법상으로는 제844조 제1항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 뒤이은, 제2항 "혼인이 성립한 날부터 200일 후에 출생한 자녀는 혼인 중에 임신한 것으로 추정한다.", 제3항 "혼인관계가 종료된 날부터 300일 이내에 출생한 자녀는 혼인 중에 임신한 것으로 추정한다."도 있다), 이제는 저런 추정 조항이 없더라도 유전자검사를 통해 엄마의 남편이 아빠인지 아닌지를 쉽게 가려낼 수 있다. 어찌 보면 아이들에게 아빠 성(姓)을 따르게 한 것도 생물학적 연계가 엄마만큼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아빠와의 연관을 애써 규범적(폭력적)으로 관철시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할 필요가 딱히 없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난자를 제공받기도 하고 대리모를 통해 출생하는 아이들도 있어서 엄마와의 생물학적 연관도 반드시 필연적이지는 않게 되었다.


  아무튼 우리 몸 속에 네안데르탈인 유전자 풀이 약 2퍼센트나 담겨있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D 통계량'에 관한 책 180쪽 이하). 인간이라는 존재, 인간의 역사가 참 보잘것없다는 생각도 들고, 아직도 인종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인류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라샤펠의 노인‘은 키가 162~164센티미터, 몸게는 77킬로그램 정도로 추정되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뼈에는 관절염과 골절 흔적들이 가득하고 이도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고기라도 먹을라치면 누군가가 그를 위해 잘게 고깃덩어리를 찢어주거나 또는 딱딱한 음식을 미리 씹어서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했을 것이다.

음식뿐 아니라 노인이 굽은 다리와 심한 관절염을 앓으며 무리에 남아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지속적으로 그를 부축해주어야만 했을 것이다. [] 이 네안데르탈인이 어떤 치료를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무리의 누군가가 그를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주었다. 라샤펠의 노인과 샤니다르의 네안데르탈인을 보고 있노라면, 척박한 환경에서 먹고살기에 바빴지만 무리 속의 약자를 돌보며 함께 사는 방법을 알았던 네안데르탈인의 인간미가 느껴진다. - P120

지난날의 편견 또는 환상을 걷어내고 보니 우리 모두 2퍼센트의 네안데르탈인이었다! 네안데르탈인과의 인연이 우리 몸에 남긴 흔적을 쫓는 작업에 우리 모두 관심을 갖고 동참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만 년 전까지 우리와 함께 지구를 거닐었던 수상한 이웃 인류의 참모습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은 계속될 것이다. 결국 이 책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며, 그들의 진면모를 파악하는 과정은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더불어 이 과정은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높은 벽을 쌓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비슷하지만 다른 존재를 동등한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는 연습이 되리라 믿는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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