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공룡들과 프랑스의 추피(T'choupi)에 빠져있지만(이른바 '추피지옥')...
미국에서 즐겨봤던 시리즈 중에 Mo Willems의 Elephant & Piggie (The best of the best!!), Pigeon 시리즈, Eric Carle의 여러 책들, Sesame Street, Peppa Pig, A Narwhal and Jelly Book, The Pout-Pout Fish, Clifford the Big Red Dog 등과 더불어 롤라(Lola) 시리즈가 있다. [Maisy Mouse는 영국에 비하여 미국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고(동네 Barnes & Noble에 한 권도 없었다), Dr. Seuss도 영어를 배우고 상상력을 키우는 데 좋은 것 같기는 하지만, 그림도 좀 기괴하고, 고전을 넘는 지위는 더 이상 갖지 못하는 것 같다. Pete the Cat이나 Biscuit도 꽤 읽히는데, 코드가 맞지 않는지 아이가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핑크퐁의 상어가족도 캐릭터 자체는 미국 전역에서-아마존 오프라인 매장에 가면 가장 잘 보이는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볼 수 있는데, 노래와 캐릭터가 유튜브로 먼저 뜨고 나서 스토리를 부랴부랴 만들어 채우는 상황이다 보니 아직 책으로서는 독자층을 형성하지 못했다(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뮤직비디오들은 퀄리티도 썩 괜찮지만(공룡 시리즈는 가사에서 각 공룡에 대한 엄밀한 '고증(?)'이 뒷받침되었음이 느껴져 감탄스럽다), 그야말로 양으로 승부하고 있다는 느낌도 드는데, Nickelodeon과 손잡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다니 기대해 볼 일이다. 장수현, "美 빌보드·MLB 강타한 `아기 상어`…동요계 BTS 등극", 매일경제 (2019. 12. 10.)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9/12/1031795/].
롤라(또는 룰루)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우면서도(위에 열거한 시리즈 중에 사람이 주인공인 책이 딱히 없다) 만연히 살다보면 디즈니의 압도적 공세 속에 의식하지 못하게 될 수 있는 특정 인종의 과잉대표성("whitewashing")을 교정할 수 있고(친소가 있을지언정 가족이 아닌 한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편견이 없다), 책이나 도서관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아주 만족스럽게 보았던 시리즈이다. 모두 스페인어로도 나와있는데,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좋아서 몇 권을 사기도 했다.
한국에서 최근 어린이 전집 몇 질을 빌려 아이와 함께 읽다가 롤라 책 두 권을 발견하고 아주 반가웠는데...
읽어주다 보니 원작과 상당히 달라져 있어서 크게 실망하였다. 글쓴이 Anna McQuinn은 2006년 National Parenting Publications Awards (https://www.nappaawards.com/product-types/childrens-books/) 등 여러 상을 받기도 하였는데(http://www.annamcquinn.com/prizes.html),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보니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Lola Loves Stories"와 "Lola at the Library" 뒤에 "with Daddy", "with Mommy"가 붙은 버전이 있고, Lola를 Lulu로 쓴 버전이 있는 등 원작 자체가 여러 버전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일단 텍스트에 큰 변화가 없다는 가정하에 자의적인 번역으로 원작이 가진 미덕을 크게 훼손하였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다.
비교 대상은 다음 두 책이다. 전집의 다른 책들을 모두 비교하여 보진 못하였지만, 같은 출판사에서 낸 "엄마, 도서관 가요!"는 "Lola at the Library"와 비교하여 볼 때 번역에 큰 무리가 없었고, "뽀뽀 물고기"는 원작인 "The Pout-Pout Fish"와 뉘앙스가 상당히 다르고, 원작만 못하다(생략).

원작도 좌우가 반전된 책들이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어떤 이유에서 다른 책을 냈는지는 모르겠다. 각 나라의 성평등지수에 따라 다른 버전의 번역권을 준 것일까? 과한 상상 같긴 하지만, 만에 하나 그래서 번역이 원작과 달라진 것이라면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번역본은 낱권으로는 구할 수 없고 전집으로만 살 수 있는 책인데, 설마 라이선스는 확보하고 책을 냈겠지?).

시작은 문제가 없다. 다만, 원작에서는 요일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번역본에서는 이 장 이후로 요일을 뭉개버려 '그 주의 책을 일주일에 걸쳐 읽고 다음주 토요일에(on Saturday"s") 다시 아빠와 함께 도서관에 간다'는 연속성 내지 일상성이 많이 퇴색되었다.
토요일 도서관에 다녀온 뒤에 아빠와 읽은 책 이야기, 또 일요일 낮에 전날 밤에 읽은 그 책을 따라하며 논 이야기는 생략하고 조금 뒤로 넘어가서...

일요일 밤에는 '엄마와 함께' 책을 읽었는데 그 내용은 왜 뺐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뒤에 나올 참사들에 비하면 큰 문제는 아니다. 요일을 한 번 빼버리고 나니 이제는 다시 넣을 수 없게 되었다.

원작을 읽어줄 때는 이 월요일 페이지를 읽으면서 Lola의 친구들("friends")인 코끼리, 하마, 젖소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이들은 뒤에도 등장한다), 번역본에는 친구들 이야기가 빠졌고, "Paris and Lagos"가 "이곳저곳"이라는 무미건조한 말로 대체되었다. 꼭 파리와 라고스는 아니더라도 구체적 지명을 넣었다면 그 나라와 지역에 관하여, 또 앞장 그림에 나오는 해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지명을 그냥 삭제해버렸다. 뒤에서도 구체적인 정보는 계속 자의적으로 삭제되는데(아이들은 더 알면 안 되나??), 아무튼 여기까지도 봐줄 만하다.
'엇, 이 책 왜 이래?'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화요일째부터였다.

번역본에서 "다음 날"은 이제 언제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사실 같은 시리즈의 "Lola at the Library"를 보면 롤라는 매주 화요일에는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간다. 그래서 두 책의 아귀가 딱 맞아떨어진다(그나저나 그 번역본인 "엄마, 도서관 가요!"는 아무 이유 없이 "룰루"가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가는 날이 "목요일"이라고 해놓았다. 왜 그랬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a story about friends"를 골랐다는 내용도 없어졌다.
가장 경악스러운 곳은 바로 다음 장이다. 한국 동화에 아이들을 내맡겨도 되는지 심히 고민하게 만들었던 장면이다.

아니 왜???
"친구에 관한 책"을 빌린 화요일 오후에 롤라는 벤을 만나서(아마도 도서관에서?) 그저 커피를 나누어 마시는 놀이를 하였을 뿐이다.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갔을 때 만난 다른 친구의 아빠 또는 엄마가 자기 엄마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보고 이를 따라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Lola at the Library"를 보면, 롤라는 화요일마다 도서관에 가서 "스토리타임"에 여러 친구들을 만나고, 오후에는 항상 엄마와 함께 간식을 먹는다. 저 위의 그림처럼 롤라 엄마는 늘 카푸치노를 마시고, 롤라는 주스를 마시며, 가끔 엄마 카푸치노 위에 얹은 생크림을 떠먹기도 한다).
그런데 번역본은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닌 둘을 아예 '부부'로 설정하고, 소꿉놀이를 하는 장면으로 만들어버렸다. 둘은 그저 각자 자신들의 아이를 데리고 왔다가 도서관에서 만난 이웃일 수도 있고, 정상가족이 아닐 수도 있는 등 "their babies"라는 말에 내포된 저 네 사람의 관계는 얼마든지 다양한 모습일 수 있다. 그런데 "여보, 차 마셔요!" 같은 오글거리는 대사까지 굳이 넣어가면서 관계를 왜곡한 것이다(진짜 가족이었다면 아이들이 탄 유아차 둘을 저런 식으로 배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아차 배치로 보아도 왼쪽 둘과 오른쪽 둘은 가족이 아닐 개연성이 크다).

책을 빌려 돌아온 화요일 "밤"에, "엄마"와 함께 "사나운" 호랑이에 관한 책을 읽고 잤고,

그래서 "다음날"인 수요일에 올라와 함께 정글 놀이를 한 것이다. "사나운" 호랑이는 "아기" 호랑이로 격하되었고, 이틀이 하루로 줄었으며, 친구 이름이 없어졌다. 번역본 책을 읽을 때 아이가 자꾸 "저 친구 이름이 Orla야."라고 하여 '그게 무슨 소리지?' 싶었는데, 원작을 꺼내봤더니 아닌 게 아니라 이름이 있었다. 덕분에 책을 비교해보게 된 것이기도 하다.

롤라는 매일 밤 책을 읽고 자는데, 요일이 빠지다 보니 그런 맥락은 이제 드러나지 않는다. Old MacDonald도 영어문화권에 특수한 것이니 그렇다 치자.

엄마가 어떻게 치료하여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내용, 즉 지식의 '주체'로서 엄마라는 메시지도 없어졌다. 붕대 위치는 또 왜 바뀌었는지??? (원작에는 젖소 왼쪽 앞다리에 붕대가 있고, 번역본에는 오른쪽 뒷다리에 붕대가 있다. 바로 뒷장의 그림에서도 붕대 위치가 다르다.)

목요일 밤에는 아빠와 함께 "우리 집"에 관한 동화책이 아니라 "건축"에 관한 책을 읽었다. 바로 이어지는 내용도 그렇고, 원작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을 읽었다는 뉘앙스로 읽힌다. 눈치 채셨겠지만, 롤라의 엄마와 아빠는 요일별로 번갈아가면서 롤라와 함께 책을 읽고 있는데(각자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므로), 요일을 없애고 나니 그런 나름대로의 규칙, 롤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이 가정의 룰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림에도 나오는 망치와 톱은 왜 번역하지 않은 것인지;;; (망치는 롤라가 잡고 있는데 사진에서는 좀 잘렸다.) 그리고 금요일에 롤라는, 상상 속의 집을 막연히 "멋지게" 짓는 "건축가"가 '추상적으로' '되었던' 것이 아니라, 어딘가 고장난 "내 집"을 '구체적으로' "수리""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롤라 혼자서 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아빠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혼자 망치질, 톱질을 하다간 다칠 수도 있고... 여담이지만, 장난감이나 교구가 우리처럼 잘 나오지 않는 대신 DIY가 일상화되어 있는 미국에서는 '만들기 컨텐츠'에서 어린이에게 위험할 수 있는 공정은 어른의 도움을 받거나 어른에게 맡기라는 경고가 반드시 나온다). 어느 쪽이 아이를, (어딘가 고장이 나면 직접 공구를 들고 고칠 수도 있는) 현실적이고도 자립적인 인격체로 양육하는 방향의 서사인지는 분명하다고 본다.

원작에서 금요일 밤, 아빠는 롤라에게 마법 구두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동화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창작한 이야기였다(빌려 온 책을 다 읽었기 때문에?). 그런데 번역본은 이 가족의 다채로운 독서생활을 단순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인 토요일, 롤라는 마법 구두를 신고 다시 도서관에 다녀왔다. 앞에서 본 것처럼, 아마 아빠와 함께였을 것이다. 번역본에는 도서관에 다녀온 내용이 빠졌다.

원작의 앞부분("sparkle")은 앞에서 이어진 것인데 빠졌다. 괴물에 관한 책도 필경 그날(토요일) 도서관에서 새로 빌려온 책일 것이다(바로 위에서 본 것처럼 번역본에는 도서관에 또 갔다왔다는 이야기가 빠졌다).

번역본은 또 한 번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책을 마친다. 지금껏 롤라는 전날 밤에 어떤 책을 읽으면, 다음날 그 책의 주인공처럼 행동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괴물에 관한 책을 읽으면 괴물이 될 수도 있지, 왜 안 되는가. "괴물이 되기 전에 얼른 다른 동화책을 읽어야겠어요."라는 사족은 개성을 말살하고, 타자를 배제하는 이데올로기 아닌가.

그와 같은 번역으로 인하여, 바로 다음 장에 나오는 위 그림이 생뚱맞은 것이 되었고, 원작이 가졌던 훈훈하고 귀엽고 유머러스한 마무리가 망실되었다. 어찌 보면 이와 같은 마무리가 롤라에 대한 애정도를 높여주는 "킬포"라고까지 할 수 있는데, 이를 전혀 살리지 못한 것이다.
아직 '사회'랄 것이 없는 아이들은 가족으로부터, 또 책으로부터 주로 세상을 배운다. 점점 우리나라에도, 가끔은 충격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입장이 올바른(차이와 개인성을 존중하고 배려하게 하는) 어린이 책들이 많이 나오고는 있다. 그러나 특정 어른군의 입맛에 따라, 고루한 기성 질서에 맞춘, 꽉 막히고 판에 박힌 책들도 여전히 많다. 특히 번역서의 경우 '이 책이 왜 좋다는 거지?' 싶은 경우가 있는데, 아이들 책이라고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자의적 번역-전횡-을 일삼고 있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유명한 책들은 원작을 함께 접하는 경우가 흔해진 만큼, 출판업계가 더 신경써주셨으면 좋을 것 같다.
아래가 바로 '추피지옥'... 하루에도 수십 번은 읽어주고 아이가 그야말로 추피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하고 있다. 추피가 네 발 자전거를 한 손 놓고, 또 두 손 놓고 타다가 넘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따라하느라 일부러 자전거에서 넘어지(는 척하)고는 반창고를 붙여달라고 한다;;;









